길 위에서
불각사佛刻寺의 밤 / 석여공
담채淡彩
2023. 3. 7. 07:24
불각사佛刻寺의 밤 / 석여공
눈 오네
좋네
추와도 겁나 좋네
누가 저 눈길 더듬어
차 먹으러 오면
눈발 아래
좋겠네
빵모자 쓰고
눈사람처럼 서 있을라네
허공에 찻잔 훈김 쏟으며
언 입으로 반길라네
어눌해도 좋아라
차 먹고 일어나면
짐짓 핑계대고
구들목 뜨신데 자고 가시라
소매 끌어 앉힐라네
아직 떨어지지 않는 잎새처럼
차 향 가시지 않은 찻이파리 같은 손으로
가야 돼, 거절하며
실은 눈발 휘날리는 속으로
허위허위 사라지는 뒤태
그 부처 보고 자픈 것이지만
눈 오네 펄펄
***
刻을 모신 말로 절간을 짓다
산문으로 빨려들게 하는 詩다.
눈 펄펄 오시는 날, 사람은 아무도 오지 않았다.
그래도 스님은 ‘눈 내리는 날 차향을
함께 나눌 벗 하나 없나?’하는 생각을 하고 있다.
구들까지 따뜻이 덥혀 놓았으니,
다반을 마주하여 이야기꽃을 피우면 하룻밤쯤은 훌쩍 지나갈 것 같다.
인정이야 따뜻한 아랫목에 손님을 재우고,
더러 말벗이라도 하는 게 좋겠지만, 산문에 든 이에게
아랫목 같은 게 무슨 소용이 있으랴.
경전에 나오는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라는 대목이
생각나는 詩이다.
승에게는 분명 서 있어야 할 자리가 있다.
그 자리에 앉아야만 보이는 게 따로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