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의미 시의 이해-
제 1 강 - 무의미 시의 이해-
지금까지 시의 역할은 인간의 희노애락을 전달하는 수단과 방법이었다.
슬픔. 기쁨등 우리의 정서를 표현하고 또 작품 속에 철학을 담아
민중을 깨우치는것이 시의 역할이고 기능이었다.
그런데 현대 시론에서는 시는 그냥 시라는 것이다.
시는 그냥 스스로 존재하는 실체일뿐 인간의 필요나 용도에 따라
만들어지고 쓰여지는 도구나 장치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고 종전의 시론에서는
"시가 굳이 철학적일 것까지는 없다." 라고 했는데 현대 시론은
철학이 끝나는 자리에서 비로소 시는 시작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결코 노하거나 슬퍼하지 말라." 는
그 유명한 푸쉬킨의 시는 냉정히 말해 금언이나 격언이지
시가 아니라는 것이 요즘 시론이다.
다시 말해 현대시는 철학이여 이제 제발 나를 놓아 달라고
외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시가 우리들의 정서 표현 도구로서의 시일 때와,
스스로 존재하는 실체로서의 시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
전자는 인간에 의해 만들어지고 쓰임 받는 인간의 창조물이지만,
제 스스로 존재한다고 할 때는 그 자신이
창조자의 지위에 있다는 뜻이니 신분이 끝간데 없이 높아진 것이다.
바로 그 토대 위에서 탄생된 것이 앞 뒤 문맥도 맞지 않고
아무 메시지도 없는 무의미시인 것이다.
그럼 무의미 시에 대한 얘기는 다음 기회에 다시 언급하기로 하고
다음 시간에는 우리시단에 있어 무의미시의 출발점이랄 수 있는
조향 시인의 " 바다의 층계" 와 본격적 무의미시인
김춘수님의 " 눈물" 에 대해 배우기로 한다.
* 참고문헌:김준오 저 " 시론"
- 오늘의 용어-감상성(sentimentality)
감상성은 생각이나 감정이 시적으로 슬화되지 못한
정서 과잉 상태를 말한다.
감상성의 원인은 시에대한 인식의 부족에서 찾을 수 있으나,
그 밑 바닥에는 여러가지 요인 들이 있다.
첮째, 시인 자신이 감성적 정서의 표현에만 몰두하는 경우이다.
시인은 시보다 자신의 감정에 빠지는 오류를 범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시인의 개인적인 흥분이나 감상만( 넋두리)을 듣게 된다.
둘재, 시인이 자신의 정서를 설득력 있게 표현하기보다는
오히려 자신의 느낌이나 정서를 억지로 강요하는 경우이다.
이때 감상은 시의 한 부분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실제로는
다듬어지지 않은 유치하고 일방적인 설교에 불과하다.
셋째, 시인이 충분한 시적 상관물( 이미지) 없이
감정을 과도하게 직접적으로 표현하는 경우이다.
이런 감성을 탈피하지 못한다면,
시인은 감정만을 중요시하고 앞세우기 때문에
결국 감정 위주의 시를 창작하게된다.
좋은 시를 창작하는 길의 하나는 결국
개개인의 의식에 자라 잡고 있는 정서 과잉의 상태에서
벗어나는 일이기도하다.
" 오 괴로운 나의 넋!/ 머리에서 발톱까지/불순한 너의 짖밟음이여!
/광명의 한 낮을 암흑의 한밤으로/ 바꿔 사는, 오, 나의 슬픔!/이 시는 김형원의 " 불순한 피"의 일부이다.
이 시에선 시인의 개인적 감정만이 드러나 있다.
이런 시는 본받지 말아야할 것이다.
무의미시의 감상
남자와 여자의
아랫도리가 젖어 있다.
밤에 보는 오갈피 나무,
오갈피 나무의 아랫도리가 젖어 있다.
맨발로 바다를 밟고 간 사람은
새가 되었다고 한다.
발바닥만 젖어 있었다고한다.
- 김춧수님의 " 눈물"
이 작품에는 치환은유적 요소가 있다.
왜냐하면 " 남자와 여자" 의 이미지와 " 오갈피나무" 의 이미지가
단지 " 아랫도리가 젖어 있다" 는 공통성과 유사성만으로
결합되어 있기 때문이다.
때문에 이 두 이미지의 연결은 느닷없는 통합에서 오는 이질감을 준다
더구나 5행 이하의 장면은 그 앞의 장면과 너무 동떨어진 내용이다
그렇치만 이런 이질적 이미지들과 장면들의 통합이 이 작품의
시적 효과를 발휘하게 하는 요인이 되고 있다.
작품 < 눈물> 은 일상적 의미나 논리적 의미의 공백화를
시도한 작품이다.
시를 창작할 때 과거에 시도된 적이 없는 ,전혀 새로운 요소들을 결합시킴으로서, 새로운 의미와 자질을 생성할 수 있다고 할 때, 새로운 결합작용이란 이미지나 장면의 낯설고 당돌한 통합일 수밖에 없고 여기서 탄생가능한 그 새로운 의미와 자질도 일상적이고 논리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 수밖에 없다.
휠라이트가 순수한 병치는 비모방적 음악이나 추상화에
어김없이 나타난다 했을 때, 병치는 예술을 독자적이고
개성 있게 하는 원리임을- 일상적이고 논리적 의미를
배제하는 것임을 시사한 것이다.
자연과 현실의 모방이든 관념의 묘사든 또는 기존 작품의 모방이든
모든 모방적 요소가 존재할 때에는 치환적 요소가 있는 것이다.
치환은 의미의 예술이게 하지만 병치는 무의미의 예술이 되게 한다.
김춘수의 무의미시, 비대상시( 이승훈), 또는 절대시는 비모방음악과 추상화처럼 병치은유가 그 구성 원리가 된다.
조향의 < 바다의 층계> 를 예를 들어 새로운 결합으로서의 병치은유를
다시 한번 분석해보기로한다.
모래 밭에서
수화기
여인의 허벅지
낙지 까아만 그림자
비둘기와 소녀의 랑데뷰우
그 위에
손을 흔드는 파아란 기폭들,
나비는
기중기의
허리에 붙어서
푸른 바다의 층계를 헤아린다.
읽어보면, 장면과 장면, 이미지와 이미지의 연결이
우리의 일상적 감각을 벗어나고 있다.
이질적인 너무나 이질적인 이미지들이 비논리적으로 병치도어
현실이나 관념의 모방적 요소를 전혀 찾을 수 없다.
오히려 이 현실을 과감하게 해체하여 인위적으로 짜 맞춘,
이해가 불가능한 추상화와 같다.
우선 첫 연에 병치되어 있는 네개의 이미지는 절대
같은 자리 같은 시간에 놓일 수 없는 사물들의 결합이다.
요즘에야 휴대가 가능한 핸드폰이 있지만 예전에야 전화수화기가
바닷가 모래밭에 있을 수는 없었기에말이다.
또한 마지막 연에서도 나비를 기중기의 허리에 붙여 놓음으로
나비가 있어야 할 원래의 장소( 꽃) 에서 멀찌감치 추방되어 있다.
이런 병치는 모더니즘시의 주된 기법이 되어 있다.
그러므로 치환은유의 시는 " 의미의 시 " 가 되고 병치은유의 시는
" 존재의 시" 즉 무의미시가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휠라이트는 의미심장한 은유에서는 이 두 요소가
필요하다고 결론을 내린다.
-오늘의 용어-치환은유: 은유란 어원상meta(초월해서,over,beyond)와 phora ( 옮김)의 합성어로"의미론적 전이"란 뜻을 지닌다. 휠라이트에 의하면 치환은유란 어원상" epi(over.on.to)+phora(semantic movement)의 뜻이다.
* 병치은유:병치은유란 어원상dia(through)+phora(semantic movement) 의 뜻이다.따라서 치환은유와 병치은유의 공통된 요소는 의미론적" 운동"( phdra) 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