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文學과 評論

김영승 시모음

by 담채淡彩 2016. 1. 26.

반성 16 / 김영승 

 

 

 술에 취하여

 나는 수첩에다가 뭐라고 써 놓았다.

 술이 깨니까

 나는 그 글씨를 알아볼 수가 없었다.

 세 병쯤 소주를 마시니까

 다시는 술마시지 말자

 고 써 있는 그 글씨가 보였다. 

 

 

 반성 21 / 김영승 

 

 친구들이 나한테 모두 한마디씩 했다. 너는 이제 폐인이라고 

 규영이가 말했다. 너는 바보가 되었다고

 준행이가 말했다. 네 얘기를 누가 믿을 수 

 있느냐고 현이가 말했다. 넌 다시 

 할 수 있다고 승기가 말했다. 

 모두들 한 일년 술을 끊으면 혹시 

 사람이 될 수 있을 거라고 말했다. 

 술 먹자, 

 눈 온다, 삼용이가 말했다. 

 

 

반성 39 / 김영승 

 

오랜만에 아내를 만나 함께 자고 

아침에 여관에서 나왔다. 

아내는 갈비탕을 먹자고 했고 

그래서 우리는 갈비탕을 한 그릇씩 먹었다. 

버스 안에서 아내는 

아아 배불러 

그렇게 중얼거렸다. 

너는 두 그릇을 먹어서 그렇지 

그러자 아내는 나를 막 때리면서 웃었다. 

킥킥 웃었다.  

 

 

반성 83 / 김영승 

 

예비군 편성 및 훈련 기피자 자수기간이라고 쓴 

자막이 화면에 나온다 

나는 훈련을 기피한 적이 없는데도 

괜히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다 

내가 무슨 잘못을 저질렀을지도 모른다고 

어제나 그저께의 일들을 생각해본다 

나 같은 놈을 예비해 두어서 무얼 하겠다고 

어김없이 예비군 통지서는 또 날아 오는가 

후줄그레한 개구리옷을 입고 

연탄불이나 갈고 있는 나같은 놈을 

나는 문득 자수하고 싶다 

뭔가를 자수하고 싶다  

 

 

반성 97 / 김영승 

 

어깨동무 개동무 미나리밭에 앉았다. 

어릴 때 우리는 그렇게 노래부르며 어깨동무하고 가다가 

노래가 끝날 때마다 둘이서 함께 앉았다. 

그리고는 또 일어나서 노래를 부르며 갔고 노래가 

끝날 때 또 앉곤 했다. 

한 여나무 번쯤 앉았다 일어나면 

우리는 집에 올 수 있었다. 

이젠 어깨동무도 개동무도 미나리밭도 없다. 

술에 취하여 하루종일 넘어졌다 일어나도 

나는 집에 올 수도 없다.  

 

 

반성 99 / 김영승 

 

집을 나서는 데 옆집 새댁이 또 층계를 쓸고 있다. 

다음엔 꼭 제가 한 번 쓸겠읍니다. 

괜찮아요, 집에 있는 사람이 쓸어야지요. 

그럼 난 집에 없는 사람인가? 

나는 늘 집에만 쳐박혀 있는 실업잔데 

나는 문득 집에조차 없는 사람 같다. 

나는 없어져 버렸다.  

 

 

반성 108 / 김영승 

 

 

 나는 또 왜 이럴까

 나는 또 어릴적에 텔레비전에서 본 만화 영화를

 생각한다.

 벰, 베라, 베로 그 요괴 인간을 생각한다.

 빨리 사람이 되고 싶다.

 그렇게 외친 그 주제가를 생각한다.

 정의를 위해서 싸움을 한 그 흉칙한 얼굴들을 생각한다.

 하필이면 왜 정의를 위해 싸웠을까

 하필이면 왜 사람이 되고 싶었을까

 빨리 요괴인간이 되고 싶다 아무래도

 그렇게 외치고 있는 것 같은

 저 예절 바른 사람들을 생각한다.  

 

 

 

 

반성 156 / 김영승 

 

 그 누군가가 마지못해 사는 삶을 살고 있다고 할 때

 그는 붕어나 참새같은 것들하고 친하게 살고 있음을 더러 본다.

 마아고트 폰테인을 굳이 마곳 훤턴이라고 발음하는 여자 앞에서

 그 사소한 발음 때문에도 나는 엄청나게 달리 취급된다.

 그 누구를 사랑한다는 것도 사실 끔찍하게 서로 다르다.

 한 사람을 용서한다는 것도

 살벌할 만큼 다른 의미에서 거래된다.

 그들에게 잘 보여야 살 수 있다. 

 

 

반성 163 / 김영승 

 

 

 

 코끼리들이 문득 가엾다.

 코끼리 발바닥엔

 어느 정도 두께의 굳은살이 박혔을까.

 그 거대한 몸뚱이를 지탱하며 먹이를 찾아

 뛰어다닌 벌판.

 굳은살이라곤 입술과 유방과 성기밖에 없는

 불행한 남녀들이 다투어 몰려온다.

 귀족적이려고 매력적이려고 그리고

 지성적이려고 무지무지 애를 쓰고 있다.

 가엾다. 

 

 

반성173 / 김영승  

 

 

 어릴 때 본 검객영화를 생각한다.

 악당들이 미리 칼을 뽑고 삥 둘러싸도

 주인공은 태연하다.

 할 수 없이 끙 하며 술을 마셔 버리는

 그 고독한 주인공을 생각한다.

 악당들의 쫄개들이 하도 찝쩍대면

 할 수 없이 젓가락을 집어던지는

 그리하여 악당들의 눈에 가서 팍팍팍 박히게 하는

 그 탁월한 솜씨의 주인공을 생각한다.

 악당들의 두목이 나타나면

 할 수 없이 술을 마시다가

 할 수 없이 칼을 뽑는

 정말 할 수 없는 그 주인공을 생각한다. 
 

반성 190 / 김영승  

                                              

 

 쓸쓸하다.

 사생활이 걸레 같고 그 인간성이 개판인

 어떤 유능한 탈렌트가 고결한 인품과

 깊은 사랑의 성자의 역할을 할 때처럼

 역겹다.

 그리고 보통 살아가는 어리숙하고 착하고

 가끔 밴댕이 소갈딱지 같기도 한 이런저런 모습의

 평범한 서민 역할을 할 때처럼.

 그보다 훨씬 똑똑하고 세련된 그가

 그보다 훨씬 자극적이고 도색적인 그가

 수줍어한다거나 이웃에 대해서 작은

 정을 베풀고 어쩌구저저구하는 역할을 할 때처럼.

 각자 아버지고 어머니고 선생이고 아내고,

 어쨌든 이 무수한 탈렌트들과

 나는 살아야 한다.  

 

 

반성 563 / 김영승  

 

 

 형이상학적 사고 체계가 완벽한 나는 가끔

 여자의 성기를 가리키는

 우리나라 말 <보지>를 발음했을 때의

 그 전무후무한 공명을 숙고해 본다.

 

 생각해 보았는가

 아무도 몰래 묵묵히 <보지>를 발음해 보며

 고개를 끄떡거리고 있는 불타나 예수의 모습을

 그대의 아버지나 대통령이나 그대의 스승을

 

 생각해 보았는가

 마하트마 간디를.

 

 "지 에미 속을 얼마나 쎅혔을까

 대가릴 저 지랄도 해야만 글이 나온다던?

 저 드러운 저 똥 콧수염 저 으......"

 

 신문에 난 "내 잠 속에 비 내리는데"라는 수필집 광고에 나온

 李外秀 사진을 보며 어머니는 또 그러신다

 그러더니 또 별안간 "야 저 새끼 장가갔냐?" 하신다

 

 히히.

 

 <보지> 건

 <태멘> 이건

 <아훔> 이건.  

 

 

반성 569 / 김영승  

 

 

 술 마시면

 家屋으로 들어가고 싶다

 

 내 所有의

 家屋으로 들어가고 싶다

 

 正立方體가 아닌 球形의

 내 家屋으로

 영원한 家屋으로

 

 보증금도 月稅도 없는

 계약서도 영수증도 없는

 문패도 번지수도 없는

 수도요금도 청소요금도 없는

 무엇보다 전기요금 없는

 완전 투명하고 완전 불투명한

 완전 경계 없고 완전 독립된

 담도 없고 문도 없는

 

 마을같고 도시같고 국가같은

 쥐구멍같은 집

 子宮같은 집 膣같은 집

 집게(蟹)의 집같은 집

 

 술 마시면

 主人이 되고 싶다. 

 

 

반성 570 / 김영승 

 

 

 어머니는

 나 하고 단둘이뿐인데도

 들을 사람 아무도 없는 데도

 남의 얘기를 할 땐

 음성을 낮추어 쉰 목소리로 만들어 얘기한다

 

 --뒷질 며느리 바람나서 도망갔대

 --목사님네 쌀이 떨어졌대

 --구멍가게집 땅개가 큰 개한테 물려 죽었대

 

 당신은 아나운서요 ?

 제물포고등학교 졸업하고 외대 스페인어과 나온

 KBS1 TV 의 이윤성 뉴스 캐스터요?

 

 사랑한다는 말도

 못돼먹었다는 말도

 또박또박 발음 하는 당신은.  

 

 

반성 602 / 김영승 


 

 나는 이제 <술>이라고 부르지 않겠다

 <절제>라고 부르겠다.

 

 어제는

 <절제>를 무절제하게 마시고

 뽀옹

 입으로 방귀 뀌는 소리를 냈다

 

 액체의 속성은 흐름이다

 그리하여

 액체는 다 무절제하다

 

 물도 눈물도 땀도 정액도

 그리고 술도 피도.

 

 수도꼭지처럼 자지(cock)를 달고

 계량기를 달고

 

 한 달에 한 번씩 검침하여

 돈 받아 가라

 

 눈물도 땀도

 정액도. 

반성 606 / 김영승 

 

 

 마늘을 까다보니

 마늘은 어느새 알몸 같다

 너무나 고운

 천상의 여인의 알몸 같다

 

 투박한 것에 싸여

 숨겨진 것은

 다 곱다

 

 나는 이제 옷을 벗지 않으리라

 나는 나를

 까리라 

 

 

반성 608 / 김영승  

 

 

 어릴 적 어느 여름날

 우연히 잡은 풍뎅이 껍질엔

 못으로 긁힌 듯한

 깊은 상처의 아문 자국이 있었다

 

 징그러워서

 나는 그 풍뎅이를 놓아 주었다

 

 나는 이제

 만신창이가 된 인간

 

 그리하여 주(主)는

 나를 놓아주신다 

 

 

  

 

반성 673 / 김영승 

 

 

 우리 식구를 우연히 밖에서 만나면

 서럽다

 

 어머니를 보면, 형을 보면

 밍키를 보면

 서럽다

 

 밖에서 보면

 버스 간에서, 버스정류장에서

 

 병원에서, 경찰서에서…

 연기 피어오르는

 동네 쓰레기통 옆에서 

 

 

740 / 김영승  

 

 어둠-컴컴한 골목

 구멍가게 평상 위에 난짝 올라앉아 맥주를 마시는데

 옛날 돈 2만원 때문에

 쫒아다니면서 내 따귀를 갈기던

 그 할머니가

 어떻게 나를 발견하고 뛰어와

 내 손을 잡고 운다

 

 머리가 홀랑 빠졌고 허리가 직각으로 굽었고……

 

 나도 그 손을 잡고

 하염없이 울었다.

 

 맥주까지 마시니 돈 좀 생겨지나 보지 하면서

 웃는다

 

 이따가 다른 친구가 올 거예요 하면서

 나도 웃었다.  

 

 

 

반성 743 / 김영승 

 

 

 키 작은 선풍기 그 건반 같은 하얀 스위치를

 나는 그냥 발로 눌러 끈다

 

 그러다 보니 어느날 문득

 선풍기의 자존심을 무척 상하게 하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로 나는 선풍기한테 미안했고

 괴로웠다

 

 -너무나 착한 짐승의 앞이빨같은

 무릎 위에 놓인 가지런한 손 같은

 형이 사다준

 예쁜 소녀 같은 선풍기가

 

 고개를 수그리고 있다

 어린이 동화극에 나오는 착한 소녀 인형처럼 초점 없는 눈으로

 '아저씨 왜그래요' '더우세요'

 눈물겹도록 착하게 애기하고 있는 것 같았다

 

 무얼 도와줄 게 있다고

 타임머까지 달고

 좌우로 고개를 흔들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 더운 여름

 반 지하의 내 방

 그 잠수함을 움직이는 스크류는

 선풍기

 

 신축교회 현장 그 공사판에서 그 머리 기름 바른 목사는

 우리들 코에다 대고

 까만 구두코로 이것저것 가리키며

 지시하고 있었다

 

 선풍기를 발로 끄지 말자

 공손하게 엎드려 두 손으로 끄자

 

 인간이 만든 것은 인간을 닮았다

 핵무기도 십자가도

 콘돔도

 

 이 비오는 밤

 열심히 공갈빵을 굽는 아저씨의

 그 공갈빵 기계도  

 

 

반성 745 / 김영승 

 

 

 죽기 직전에 자기 아들에게만

 알았느냐? 하고 죽었다는

 옛날 장인들의 비법처럼

 나도 그런 거 하나쯤은 갖고 있는가

 

 반관에 450원

 국수를 삶으며

 고려청자의 비색 같은

 내 아픔의 연원

 그 아득한 고대 문명의 발상지를

 생각해 보며

 

 시계를 차고도 늘

 지각을 하는

 노예들과

 

 그리고 그렇게

 입 다물고 오래 참을 순 없는가

 

 당신을 사랑해요 혹시

 텅 빈 구멍을 메꿀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결국

 음흉하고 비열한 고백 속에서

 아름다운 여인이여 그대는

 재림한다고 하지 말고 해결한다고 하라

 재혼한다고 하지 말고 해결한다고 하라

 글쎄

 사랑한다고 하지 말고 해결한다고 하라

 

 이력서엔

 뒷간에 갖다 붙여 놓으면

 왼갖 잡다한 잡귀는 다 물러갈 것 같은

 잡귀 쫓는 부적 같은

 내 반명함판 사진

 덜덜덜 떨리는 손으로 정성껏

 결국 삐뚜로 붙여 놓고

 

 자기소개서엔 '나는 천재다'

 나는 왜 그렇게 쓸 수 없는가

 

 신문에서 오린 사원 모집 광고 문안에 왜

 식욕 있는 남녀, 성욕 들끓는 남녀

 라는 자격 ──

 

 그 자식들은 왜 나에게

 자기네들의 소개서를 써서 보내지 않는가

 

 아니면 '나는 미친 놈이다 으하하하하─'

 아니면 숫제 '나는 나는 갈테야 연못으로 갈테야

 동그라미 그리러 연못으로 갈테야……'

 

 더러운 놈들.  

 

 

  

반성 783 / 김영승 

 

 

 차라리 원시인들이 땀 삘삘 흘리며 굴리고 다니던

 도나스같이 생긴 그 커다란 돌덩어리를

 돈으로 사용했으면

 참 많은 게 탄로날 텐데

 

 간통도 개수작도

 그대가 생각하는 사랑도

 

 노동생산성 상승률과 실질임금 상승률이

 하등의 관계없이 겉도는

 그 모든 노예 시장,

 인신매매조차도 독점한

 1,2,3 ……n차 시험 합격자에 한하여

 면접시험 치르는

 부실한 유령 회사도

 

 앗!

 돈이 보이지 않는다.

 

 부피도 질량도 없는

 보혜사 성령 같은

 관념이

 

 모든 현상을 은폐시키고, 쉿 !

 

 박 과장 최 부장

 김 실업자

 

 다 굴리고 다닌다 

 

반성 825 / 김영승 

 

 

 언제나 손이 떨렸던 나는

 뜨거운 물을 옮길 땐

 신중에 신중을 다 해 무척 조심스럽게 옮겼었다

 그 물을 내가 끓인 것도 모르면서

 

 나는 이제

 주전자 정도는

 한 손으로도 자유자재로 옮긴다

 

 니나노집 찌그러진 주전자 같은

 내 심장의 물도.  

 

 

반성 828 / 김영승 

 

 

 

 TV 엔 아시안 게임

 110kg 급 용상 역도 경기에 나와 195kg 들다

 실패한 콧수염 기른 배불때기

 이락 선수를 보더니

 지랄하고 교만 떨더니 떨어뜨리네 하며

 어머니는 또 깔깔깔 웃으신다

 

 교만스럽게 생긴 것하고

 무게를 못 드는 것하고는 무슨 관계가 있는지 모르지만

 나도 깔깔깔 웃었다.

 

 52kg 에서 48kg에서 38kg까지 떨어졌던

 나의 체중

 

 나는 교만하고

 그리고 우습다

 깔깔깔. 

                                                                          

 

7년 만에 새 시집 '화창'을 출간한 김영승 시인은

"그동안 치사량에 가까운 방대한 양의 시 수만 편을

썼다"면서 "날 '반성'의 시인이라며 현실비판과 풍자

등등에만 초점을 맞추지만, 반성 연작시는 빙산의

일각이라 날 대표할 수 없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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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김영승 “난 숨길 것도 꾸밀 것도 없어

 

7년만에 시집 '화창' 펴내

 

【세계일보】 기사입력 2008.07.11 (금) 

 

연작시 ‘반성’으로 잘 알려진 김영승(50) 시인이 여덟 번째 시집

‘화창’(세계사)을 내놓았다.


자신의 가난한 처지를 투명하게 노출한 시집 ‘무소유보다도

 

찬란한 극빈’(2001) 이후 7년 만이다.

‘…찬란한 극빈’ 역시 1994년 ‘몸 하나의 사랑’을 발간한 이후

7년의 공백을 거쳤다. 같은 7년을 소비했는데, ‘화창’은

전작에 비해 두께가 절반이다.

시인은 “당시는 늘 술이 과해서 시를 선별할 짬이 없었다”고

정직하게 말한다. 2001년 10월 6일 술을 끊은 시인은

이번엔 또렷한 정신으로 시 63편을 골랐다.

쟁여둔 시 수천 편 중 ‘화창’한 빛을 뿜는 것들만 건졌다.

“폭우 쏟아진 뒤/ 이 화창,// 그게 죽음이리라// 나의 죽음이리라.//

고추잠자리는// 疊疊(첩첩) 열두 폭 치마 찢어질 듯 짓푸른/ 얼음

같은 깊은 하늘과 1:1로 同等(동등)하고/ 자체로 沈默(침묵)이다//

―赤卒

(적졸·고추잠자리의 별칭)아, 너 산타클로스냐?/ 나한테도 크리스마스

/ 선물을 주는구나// 神(신)의 음성이다.”

(‘화창’ 전문)

시인은 소박한 생활시에 숨탄것들의 존재론적 당당함을 담았다.

전능한 신이 미물 고추잠자리에게 외려 감사하는 장면은 뒤집힌

성화(聖畵)다. 신비한 후광과 오색광선은 조물주가 아닌 피조물에서

뻗치고 있다. 시인은 한계와 모순 가득한 인간 역시 그 자체로 떳떳

하고, 신성하다고 도발적인 선언을 하는 것이다.

절대자와 1:1로 마주하는 단독자의 기상은 김 시인이 평생 지녀온

삶의 태도다. 시 ‘화창’은 여기에 인류애를 덧댔다.

스스로 존엄하려는 시인의 의젓함은 시집 전반에 드러난다.

쉰이 된 시인은 고독했지만 치열했던 지난날을 담담하게 반추한다.

가끔 술독이나 극빈에 빠졌어도 스스로 당당했기에 아쉬움은 없다.

“그것이 自招(자초)한 고독이건/ 不遇(불우)의 고독이건/ 一生(일생)

고독했다는 것은 참/ 장(壯)한 일이다// 더욱 고독해야 하는데/ 이

오는 날/ 주전자 물이 끓는다.”

(‘고독’에서)

이번 시집에서 눈에 띄는 건 돌아가신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이다.

시집 ‘반성’(1987)에서 소설가 이외수를 향해 “대가릴 저 지랄로

해야 글이 나오다던? 저 드러운 저 똥 콧수염 저 으……”하며

푸근하게 잔소리했던 어머니는 2006년 3월 돌아가셨다.

슬픔과 허전함을 주체하지 못한 그는 금주 다짐을 깼다.

28세 때 홀로 된 어머니는 그에게 부성과 모성을 한꺼번에 쏟아준

든든한 뒷배였다. 어머니의 구두까지 그리워하는 그의 시는

어느 사모곡보다 애절하다.

“구두 속엔 발이 있는 게 아니라/ 구두의 어떤 알이/ 核(핵)이/ 胎兒

가/ 들어 있는 것이다 구두 속엔/(…)/ 어머니 구두를 유품으로

모셔오지 못한 게// 恨(한)이다.”

(‘구두’에서)

그는 내년 어머니에 대한 시편을 묶어 어머니께 헌정할 계획이다.
김 시인의 시에는 과장된 제스처가 전혀 없다. 평생 아웃사이더였던

그는 스스로 아름답고, 존엄했기 했기에 허영이 필요치 않았다.

그의 시에는 몸치장을 모르는 두 개체, 성인(聖人)과 아이가 숨어

있다. 육두문자가 섞여 있어도 그의 시가 해사한 이유다.


“숨길 것도, 꾸밀 것도 없습니다. 예쁘게 꾸미거나 장막을 쳐서

보호할 것이 내겐 없어요. 그런 개방성이 파괴적으로 발현되지 않는

선에서 다른 시인들, 다른 사람들도 나처럼 살기를 바랍니다.”

 

【김영승 시인

                                                                 





  약력
  
  1983년 성균관대학교 철학과 졸업
  1986년 계간 ‘세계의 문학’ 가을
          호에 반성・서 외 3편의 시
          를 발표 함으로써 데뷔
 
   
   시집
  『반성』
  『車에 실려 가는 車』
  『취객의 꿈』
  『오늘 하루의 죽음』
  『아름다운 폐인』
  『몸 하나의 사랑』
  『권태』
  『무소유보다도 찬란한 극빈』
  『흐린 날 미사일』


   <심판처럼 두려운 사랑> 책나무 1989
                          (장정일과의 2인시집)
    에세이
  『오늘 하루의 죽음』
     
   수상
   1991년 제3회 인천문학상 수상 
   1998년 제7회 인천예총예술상 수상.
   2002년 제 3회 현대시작품상 수상

   2010년 제5회 불교문예작품상 수상작품
   2013년 제13회 지훈문학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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