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文學과 評論

감각의 향연

by 담채淡彩 2012. 1. 20.

 

감각의 향연

                            /이 홍 섭





시는 먼저 감각이다. 좋은 시는 섬세하고, 풍요로운 감각을 통해서 흘러나온다. 진부하기까지한 이 얘기를 서두에 꺼내는 것은 최근의 우리 시들이 이 감각의 중요성을 망각해가고있지 않은가 하는 우려가 부쩍 들기 때문이다.

시적 수련이란 다름 아닌 이 감각 열어놓기가 아니던가. 사물과 사태를 보고, 듣고, 냄새 맡고, 혀로 핥아보고, 살을 대보는 것, 즉 오감(五感)을 최대한 작동시키는 일이야말로 좋은 시를 향한 시인의 일차적 자세일 것이다. 백석이 모밀내를 맡으며 부처를 위하는 정갈한 노친네의 내음새(「北新-西行詩抄 2」)라고 하거나, 미당이 아내를 생각하며 삼천 사발의 냉수 냄새로 항시 숨쉬는 그 숨결 소리(「내 아내」)라고 표현할 때 우리는 시의 한 절정을 맛보게 된다.

젊은 시인들의 작품들에서는 뚜렷하게 시각적 표현의 우세를 볼 수 있다. 영상세대라 어쩔 수 없다지만 이는 분명 감각의 불구현상이다. 좋은 시는 감각을 다 열어놓는다. 다 열어놓고 투명하게 사물을 받아들인다. 리듬은, 운율은 이 투명함 속에서 자연스럽게 우러나오는 것이다. 감각을 열어놓지 않고 리듬이, 운율이 솟아나오길 바라는 것은 헛된 바램이다. 아무 의미도 없이 행을 가르고, 연을 나누는 현상은 이러한 불구가 낳은 병폐이다.

김춘수는 감각을 잃지 않으려 애쓴다. 그는 기억까지도 감각화 시킨다. 그의 시가 실패하지 않고 일정 수준을 늘 유지하는 것은 이 젊은 감각 덕분이다. 


나의 다섯 살은

햇살이 빛나듯이 왔다.

나의 다섯 살은

꽃눈보라처럼 왔다.

꿈에 

커다란 파초잎 하나가 기도하듯

나의 온알몸을 감싸고 또 감싸주었다.

눈 뜨자

거기가 한려수도인 줄도 모르고

발 담그다 담그다 너무 간지러워서

나는 그만 남태평양까지 가버렸다.

이처럼 

나의 나이 다섯 살 때

시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가 나에게로

왔다갔다.

― 「그리움이 언제 어떻게 나에게로 왔던가」(?현대시학?, 2003년 3월호) 전문


제목에 따르면 이 작품은 그리움이 언제 어떻게 왔는가를 묻고 있는 작품이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 작품은 감각의 눈뜸, 혹은 감각의 실존적 차원에 관해 다루고 있다. 다섯 살로 돌아가는 것은 그곳에 감각의 시작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시인이 함께  발표된 작품 「明井里」에서 랭보와 백석의 여인을 떠올리는 것도 같은 차원이다. 시인은 이들을 통해, 이들을 호명하며 감각을 유지하고자 한다. 시인에게는 그게 곧 행복이 아니겠는가.

투명함을 향한 감각의 삶이란 시간을 살아내는 시인에게 있어서는 남루를 향한 삶이다. 투명함을 지향할수록 나의 남루는, 병은 깊어진다. 좋은 시인은 기꺼이 그 남루를 껴안는다. 김사인은 그 남루를 예래바다에게 묻는다. 자 어떤가. 내 남루는 볼 만한가 라고.


눈 감고 내 눈 속 희디흰 바다를 보네

설핏 붉어진 낯이 자랑이었나 그대 알몸은

그리워 이가 갈리더라 하면 믿어는 줄꺼나 

부질없이 부질없이 손톱만 물어뜯었다 하면 믿어는 줄꺼나

내 늙음 수줍어

아닌듯 지나가며 곁눈으로만 그댈 보느니

어쩔거나

그대 철없어 내 입안에는 신 살구내음만 가득하고

몸은 파계한 젊은 중 같아 신열이 오르니

그립다고 그립다고  몸써리 치랴

오 빌어먹을, 나는 먼곳에 마음을 벗어두고 온 사내

그대 눈부신 무구함 앞에

상한 짐승처럼 속울음 삼켜 나 병만 깊어지느니

― 「예래바다에 묻다」(?문학동네?, 2002년 겨울호) 전문  


눈부신 무구함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그 어떤 절대적 원형, 혹은 훼손되지 않은 알몸의 세계이다. 시인은 그 알몸의 세계 앞에서 눈이 부시다. 그래서 아닌 듯 지나가며 곁눈으로만 본다. 시인은 이 눈부신 무구함 앞에서 상한 짐승이 되어 속울음을 삼킬 수밖에 없다. 속울음은 병을 키운다. 이 작품은 알몸의 세계 앞에서 시인의 감각이 어떻게 눈을 뜨고, 어떻게 리듬으로 실려 나오는가를 잘 보여준다.

송찬호는 꽃 그늘 아래서 귀신을 불러 묻는다. 감각의 세계란 어떤 세계인가. 그것을 문자로 옮기는 세계는 몇 근의 세계인가라고.


아아 그 꽃 그늘 아래에서 그댈 다시 만나게 될 줄이야


다시 보세 다시 만나세 그땐 재 넘어 꽃가마 타고 오겠다더니

이게 웬일인가 늙은 나무 아래 구부리고 앉아 살구꽃燈 몇 점 팔고 있으니

그 옛날 우린 꽃 꺾어 술잔 세어가며 놀았지

꽃이 질 땐 금개구리가 밤을 세워 울었고

뒤돌아 헤아려보니 내 詩業은 겨우 백 근의 무게도 지나지 않네

그 중에서도 깨알처럼 가려낸 검은 것이

겨우 몇 근의 문자이고 그 나머지도 흰 종이의 무게라네

그대가 건너온 세상은 어떤가, 거긴 아직도 연화지옥인가

오늘은 내가 걷겠네 그대는 내 어깨에 앉아 꽃가지나 쳐드시게

어떤가, 살구꽃 내려앉으니 내 어깨도 노닐만 하잖은가


나는 왼쪽 어깨에 앉아 있는 귀신을 오른쪽 어깨 위로 옮겨 앉혔다

― 「살구나무꽃 그늘 아래에서」(?문학판?, 2003년 봄호) 전문


꽃 꺾어 술잔 세어가며 놀았던 세계란 어떤 세계인가. 시인은 이 구절 밑에 정철의 「장진주사」에서라는 주석을 달고 있다. 그것은 감각의 향연 감각의 잔치를 말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뒤이어 詩業의 근수를 묻는 것은 감각의 세계란 도대체 얼마만한 무게를 지니고 있는가를 묻는 것. 시인은 오늘은 내가 이 세계에 도취될 터이니 자네는 내 어깨에서 꽃가지나 쳐드시며 마음껏 즐기게 라고 말한다. 아름다움이란, 감각이란 귀신도 불러내야하는 세계가 아닌가.

김경미에게 있어 무량사는 감각의 사원이다. 감각의 세계란 늘 설렘을 동반하는 세계이다. 그녀의 시는 늘 설렘으로 빛나고, 그 설렘 때문에 슬프다.


무량사 가자시네요 이제 스물아홉의 당신

아직 무엇이든 약속할 수 있고 깨도 좋은 나이

잠시 나도 오래전 그 나이인 줄 알아 웃었나봐요


뻔뻔키보단 서글프죠 늦은 미혹(迷惑)


흰 벚꽃들 얼른 지고 차라리 당신 발이라도 다쳤으면

거기 꽃그늘 아래 어린 여자들 보면 부끄럽기나 할 테니

스물아홉 살의 당신 쪽이 약속 하나쯤 깨도

무량사는 여전히 거기 있을 테고 난 차라리 혼자 가지요

미혹의 거품 가만히 맥주잔처럼 기울여

거기마당 한켠에 따라버리고

못 지켰던 내 스물몇 살의 약속들 곁에 따라버리고

지키지 못한 약속들끼리 몇 생을 거듭하며 갚으라다가

어느 생엔가는

나, 열아홉쯤으로 무량사 가자고 늙은 당신께 가자구요

지키지 못한 약속들 때문에 봄은 계속될 거구요

― 「약속」(?현대문학?, 2003년 3월호 )


무량사는 누구나 마음 한 켠에 지니고 있는 사원이 아니겠는가. 가고 싶어도 함부로 갈 수 없는 사원. 그러나 여전히 거기에 있는 사원. 미혹과 열망과 안타까움과 아쉬움으로 빛나는 사원. 그곳으로 가는 약속은 번번이 깨지고 말 것이다. 그러나 그 깨짐 때문에 봄은 계속된다. 감각의 세계란 그런 것이 아니겠는가. 설렘으로 가득찬 세계, 미혹되지 않으면 오지 않는 세계가 거기에 있다.


이홍섭|시인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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