花頭, 영원한 話頭
/이 혜 원
꽃처럼 동서고금의 시인들에게 강한 정취와 사색을 불러일으키는 대상은 많지 않을 것이다. 꽃은 아름다움의 대명사로서, 혹은 유한한 생명의 상징으로서 시인들의 감관을 자극해왔다. 대상에 대한 직관과 풍부한 상상력을 요하는 서정시의 특성상 꽃의 강렬한 인상과 특이한 생태는 각별한 시적 감흥을 제공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꽃을 대하는 시인들의 관심과 태도는 각양각색인 꽃의 형용만큼이나 천태만상이다. 미학적 감성이 충일한 시인들은 꽃의 현상적 아름다움에 몰입하고 삶의 방식에 고심하는 시인들은 개성의 발화라 할 만한 다양한 꽃의 생태에 주목한다. 유한한 생명으로 무한한 자연의 섭리를 증명하는 꽃의 생리에서 존재론적인 성찰을 이끌어내는 시인들도 있다. “내가 너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너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라는 시도 있지만 어떤 시인이 불러주었느냐에 따라 꽃은 제 각각 새로운 의미의 외장을 두르게 되는 것이다. 꽃은 시인에게 시심을 일으키고 시인은 꽃에 의미를 부여하면서 서로의 존재를 영위한다는 점에서 꽃과 시인의 만남은 운명적인 것이 된다. 부처님은 꽃을 들고 미소 지음으로써 높은 깨달음을 드러냈지만 시인들은 미소가 아닌 언어로써 그것을 그려내야 한다. 꽃이 던지는 화두를 끝내 언어로서 풀어내야 한다는 것이 시의 과제이다. 시인은 꽃이라는 화두를 매만져 또 다른 언어의 꽃을 피워내는 것이다.
1
꽃들이 갖는 저마다의 이름과 별명에는 그렇게 이름붙인 사람들의 삶과 정서가 깃들어 있다. ‘며느리밥풀꽃’, ‘각시붓꽃’, ‘애기똥풀’ 식으로 인간적인 체취가 강한 꽃이름들은 더욱 애틋한 감응을 불러일으킨다. ‘얼레지꽃’ 역시 그 이름으로 보아 만만치 않은 사연이 깃든 꽃으로 짐작할 수 있다. 박남준의 「그 곱던 얼레지꽃」(?문예중앙?, 2003년 가을호)은 ‘어느 정신대 할머니에 부쳐’라는 부제가 붙어 있듯이 얼레지꽃의 형상에 정신대 할머니의 삶을 비유한 시이다.
다 보여주겠다는 듯, 어디 한번 내 속을 아예 들여다보라는 듯
낱낱의 꽃잎을 한껏 뒤로 젖혀 열어 보이는 꽃이 있다
차마 눈을 뜨고 수군거리는 세상 볼 수 있을까
꽃잎을 치마처럼 뒤집어쓰고 피어나는 꽃이 있다
아직은 이른 봄빛, 이 악물며 끌어모아 밀어올린 새 잎새
눈물자위로 얼룩이 졌다 피멍이 들었다
얼레꼴레 얼레지꽃 그 수모 어찌 다 견뎠을까
처녀로 끌려갔던 꽃다운 얼굴에
얼룩덜룩 얼레지꽃 검버섯이 피었다
이고 선 매운 봄 하늘이 힘겹다 그 고운 얼레지꽃
얼레지꽃은 얇고 긴 꽃잎이 활시위처럼 팽팽하게 뒤로 젖혀진 특이한 형상을 하고 있다. 그로 인해 꽃의 속몸이 온통 드러나보이고 아마 그 때문에 얼레지꽃이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을 것이다. ‘얼레지’라는 말은 ‘얼레꼴레’라고 할 때의 그 원초적인 야유를 담고 있다. 오랑캐와는 상관도 없이 오랑캐꽃이 되어 버린 꽃처럼 얼레지꽃 역시 부끄러워야 할 아무 이유도 없이 조롱받는 꽃이 된 셈이다. 작고 연약한 꽃잎들이 잔뜩 힘주어 몸을 젖히고 있는 얼레지꽃의 형상은 자신에게 주어진 부당한 멍에에 항변하는 듯 하다. 시인은 이러한 꽃의 모양을 “꽃잎을 치마처럼 뒤집어쓰고 피어나는” 것으로 보았다. 치마같이 펼쳐진 꽃잎 속으로 점점이 흩어진 반점들에서는 ‘피멍이 든 눈물자위’를 연상한다. 아직도 매서운 칼바람이 몰아치는 이른 봄에 연약한 꽃잎을 낱낱이 열어젖히고 있는 얼레지꽃에 정신대 할머니의 한과 아픔이 겹쳐진다. 이용악의 「오랑캐꽃」이 그런 것처럼 얼레지꽃 역시 그 특이한 이름과 연약한 모습으로 인해 상처의 역사와 한의 뿌리를 대변하는 꽃이 되는 것이다. 구구한 사연이나 감정을 배제한 간결한 묘사와 적절한 비유가 핍진성을 더하고 있다. 다분히 문학적인 연상을 일으키는 얼레지꽃은 이 시인이 부여한 역사적 상상력으로 인해 더욱 구체적인 삶을 얻게 되었다. 다만 ‘이름’에 지나지 않던 이 꽃에 이제는 우리 민족의 상처를 공유하는 역사성이 깃들게 된다. 꽃은 시인에게 시상을 불러일으키고 시인은 꽃에 의미를 부여하면서 서로의 삶을 확장해 가는 것이다.
2
‘얼레지꽃’이 지극히 선명한 형상과 이름으로 시인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것과 반대로 형상도 불분명하고 따라서 이름도 잘 알 수 없어 묘한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꽃도 있다. 나희덕이 그린 「땅 속의 꽃」(?문학과사회?, 2003년 가을호)이 그러하다.
땅 속에서만 꽃을 피우는 난초가 있다
땅 위로 모습을 드러내는 일이 없기 때문에
그 꽃을 본 사람이 드물다 한다
가을비에 흙이 갈라진 틈으로 향기를 맡고 모여든
흰개미들만이 그 꽃에 들 수 있다
빛에 드러나는 순간 말라버리는 난초와
빛을 피해 흙을 파고드는 흰개미,
어두운 결사에도 불구하고 두 몸은 희디희다
현상되지 않은 필름처럼 끝내 지상으로 떠오르지 않는
온몸이 뿌리로만 이루어진
꽃조차 숨은 뿌리인
이 시에서 그리고 있는 ‘땅 속의 꽃’은 ‘무화과’와 같은 모순의 꽃이다. 꽃은 일반적으로 뿌리와 상반되는 향일성의 수직적 자세를 취한다. 꽃은 태양을 닮은 강렬하고 순간적인 생명이다. 하루를 주기로 명암을 달리하는 태양처럼 꽃은 순간적으로 명멸하는 생명의 상징이다. 꽃과 불꽃과 여자의 동질적 속성이라 하는 아름다움은 그 속절없는 유한성으로 특징지어진다. ‘영원한 아름다움’이란 일종의 모순어법이라 할 만한 것이다. 반면에 뿌리의 세계란 무명(無明)의 심연이요 유구한 시간성을 암시한다. 어둠을 질료로 태양을 향해 솟아오르는 꽃은 광대무변한 대지와 뿌리의 생명력을 증언하는 전령과도 같다.
그런데 이 시에서의 꽃은 일반적인 꽃의 생태와는 다르게 땅 속에서 피어난다. 이 꽃은 생명의 전령이라기보다는 어둠을 지향하는 은자(隱者)이다. 한껏 아름다운 자태로 피어올라 한순간이나마 경이와 찬탄을 자아내는 향일성의 운명을 거부하고 대지의 어둠을 자신의 세계로 받아들인 것이다. 마치 세상으로 나아가기를 거부하고 자신만의 세계를 탐구하는 은자처럼 이 꽃은 일종의 신비감을 자아낸다. 이 꽃은 다만 은은한 향기로서 자신의 존재를 드러낸다. 이 향기를 맡고 찾아드는 흰개미들은 은자의 덕을 느끼고 찾아드는 사람들을 연상시킨다. 세상으로 나아가지 않고 은일한 채 존재의 본질을 탐구하는 사람들이 있듯이 식물의 세계에도 그런 존재가 있다면 바로 이 ‘땅 속의 꽃’이 그러할 것이다. 이 꽃은 온 몸이 뿌리로 이루어진 채로 대지와 어둠이 함유하고 있는 근원적인 생명력을 신비롭게 증언한다. 이 꽃의 신비로움은 어둠 속에서 오롯이 빛나는 희디흰 몸으로 인해 더욱 강조된다. ‘빛에 드러나는 순간 말라버리는 난초’와 ‘빛을 피해 흙을 파고드는 흰개미’가 벌이는 결사의 장면은 건조할 정도로 담담한 이 시에서 가장 역동적인 부분이다.
시의 전반부는 철저히 이 신비로운 꽃의 묘사로 일관한다. 이 꽃은 땅 속에서만 핀다는 그 특이한 속성만으로도 풍부한 시적인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시인은 정갈하고 절제된 언어로 이 형이상학적인 꽃의 신비한 내포를 담백하게 전달하고 있다. 꽃에 대한 통념을 뒤집는 이 ‘땅 속의 꽃’의 생태를 통해 눈에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세계 사이의 부질없는 경계에 대해 새삼스럽게 되묻게 된다. 우리의 인식이란 대개 현상에 얽매어 그것의 본질에 대해서는 묵과하기가 쉽다. 꽃의 단발적인 개화에 찬탄하면서도 그 생명의 근원인 대지와 뿌리의 존재에 대해서는 잊고 지내는 편이다. ‘땅 속의 꽃’ 역시 “그 꽃을 본 사람은 드물다” 하고 “현상되지 않은 필름처럼 끝내 지상으로 떠오르지 않는” 숨은 꽃으로서 머물고 말 것이다. ‘땅 속의 꽃’에서 시인은 문득 현상과 본질에 대한 인식론적인 의문을 발견하고 있다. 이 세상은 눈으로 보이는 것 이상의 근원적인 세계와 맞닿아 있음을. 그리고 그 세계란 좀처럼 인식되지 않지만 매우 깊고 본질적인 존재의 근거라는 사실을. “온몸이 뿌리로만 이루어진/꽃조차 숨은 뿌리인” 이 역설의 꽃은 시인의 형이상학적이고 존재론적인 의문을 만나 현시된다. 그리하여 꽃과 뿌리란 근원적으로 하나라는 사실을, 생명의 현현이란 반드시 깊고 오랜 시간의 작용에 근거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증언한다.
3
박해람의 시 「블랙박스」(?서정시학?, 2003년 가을호)에서도 꽃과 뿌리의 깊은 관련을 살펴볼 수 있다. 그런데 이 시에서는 뿌리를 통해 꽃을 보는 것이 아니라 꽃을 통해 뿌리의 존재를 확인한다.
나를 알고 있는 모든 슬픔과 우울함으로
이 오래된 말들을 부화시키고 싶다
어쩌다 부러진 꽃대를 얼른 땅에다 꽂아 둔다.
아내가 혀를 차듯 몇 마디 말과 함께 물을 넣어준다
세상과 세상을 연결해 주는 것이 호흡이 아니라
물인 것을 알았다
뿌리가 생겼나 확인하고 싶어도 할 수 없다.
다만 꽃이 피면 그것이 꽃나무의 새로 생긴 뿌리일 것이다.
이 시에는 ‘언어’와 ‘존재’의 문제가 병렬되어 그려진다. 진정한 ‘말’에 대한 희구와 강렬한 ‘생명’의 욕구가 절실한 생존의 문제로 제시된다. 이 시의 화자가 추구하는 말은 본래의 모양을 간직하고 있는 말이다. 본래의 말을 잃어버린 사람은 부러진 꽃대처럼 상처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리라. 이 시에서 화자의 아내는 부러진 꽃대에 몇 마디 말과 함께 물을 넣어준다. ‘말’이 ‘물’과 같이 필요불가결한 생존의 요건임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뿌리를 잃은 꽃대는 생명의 근원을 잃은 것과 다름없다. 부러진 꽃대에서 피어난 꽃이 유일한 생명의 증거가 될 수 있을 뿐이다.
말을 잃어버린 사람은 뿌리를 잃은 꽃대처럼 삶의 근거를 상실한 것이다. 이 시에서는 말을 잃어버린 사람의 단적인 예로 화자의 친구가 등장한다. “친구가 세상의 모든 말들을 잃어버리고 돌아오자/가족들은 서둘러 땅속으로 옮겨 심었다/그 친구의 블랙박스는 어디에서도 찾아지지 않는다”에서 말을 잃어버린 것은 극단적인 생존의 위기에 상응하는 것으로 그려진다. 식물의 블랙박스가 뿌리라면 사람의 블랙박스는 감추어진 말일 것이다. 친구의 위기를 증언할 수 있는 유일한 증거인 말이 사라짐으로써 그는 세상과의 소통 가능성을 상실하고 만다. 부러진 꽃대에서 피어난 꽃이 간절한 생명의 항변이듯이 이 친구의 경우도 “마지막 소리가 끊어진 자리에서/붉은 꽃이 순식간에 피었다 지는 것을 본 적이 있다”에서처럼 안타까운 절규를 보인 듯하다. “그러고 보면/세상 모든 다급함에는 뿌리가 자라는 것 같다”에서는 생명이나 존재의 근거가 위협받는 상황에서 더욱 절실해지는 근원에 대한 강렬한 동경을 보여준다. 친구의 경우는 극단적인 경우이지만 어쩌면 이 시대의 모두가 “압력에 찌그러져/본래의 모양을 잃어버린 깊은 암호”로서 세상에서 잊혀진 블랙박스인지도 모른다.
말과 생명의 본원에서 멀어져 뿌리를 잃고 방황하는 오늘날의 삶을 반추하게 하는 시이다. 시인은 부러진 꽃대에서 피어난 꽃잎의 경이로운 생명에서 잃어버린 말과 뿌리에 대한 강렬한 동경을 이끌어낸다. 시인에게 이 꽃잎은 ‘새로운 곳으로 가는 뿌리’와 상통한다. 꽃잎 그 자체가 눈부신 생명의 현현이고 보면 그것이 곧 새로운 생명의 출발점에 해당하는 뿌리이기도 한 것이다. “그러고 보면 가장 화려한 색깔은/맨 마지막에 가서야 몸에서 터져 나온다/ 그 힘으로 어디든 가는 것이다”에서는 생존의 위기 속에서 가장 절실한 생명의 욕구가 분출되며 그것이 곧 존재의 역동성이라는 사실을 역설한다. 시인이라면 ‘모든 슬픔과 우울함’에서 ‘오래된 말들을 부화’시킬 수 있는 힘을 얻어낼 터이다.
4
아름다우면서 영원한 것은 일종의 모순어법이라고 했지만 예술의 궁극적 지향은 바로 이 모순을 통합하려는 열정이라 할 만하다. 아름다움과 영원성이 결합하여 이루어낸 미적 성취는 ‘장엄미’로 대변될 수 있을 것이다. 영원히 아름답게 피어 있는 꽃이 있다면 이 장엄미의 극치라 할 수 있을 텐데 조용미의 시에서 바로 그러한 꽃을 만날 수 있다. 「마량간다」(?현대문학? 2003년 8월호)에서 그려내는 꽃의 장엄을 보자.
대웅전 사분합문의 어칸에는 커다란 검은 날개를 가진 나비 열두마리가 붙어 꽃살문의 장엄을 이루고 있다
노란 연둣빛 등을 한 동박새들이 반짝이는 동백잎과 눈 덮인 동백 붉은 꽃들 사이를 장엄인 듯 날아다닌다
대웅전 사분합문의 꽃살무늬를 묘사한 이 시에서 동박새와 동백잎과 동백꽃의 문양, 그리고 나비경첩의 조화는 ‘장엄’의 경지를 보여주고 있다. 만개한 채로 누대를 지내온 동백꽃 문양이나 활짝 펼친 날개로 그만큼의 시간을 지켜낸 꽃살문의 나비는 영원성을 희구하는 종교와 예술의 정신을 함축하고 있다. 이 시에서 장엄미를 발산하는 또 다른 대상은 ‘푸조나무’이다. 당진 당전마을의 푸조나무는 기품 있는 고목으로 장엄미를 자아낸다. 대웅전 사분합문 꽃살문의 아름다움에 취해 당전마을을 지나친 시인은, “푸조나무, 푸조나무는 내 머릿속에서 또 한동안 꿈틀거리며 맹렬히 잎을 피우겠다 내게 처음부터 늙은 나무였던 내가 보지 못한 그 나무는” 이라며 푸조나무에 대한 상상에 몰입한다. 푸조나무는 그 이름의 독특한 음가로 인해 ‘꿈틀거리며 맹렬히 잎을 피우’는 듯하다. “내게 처음부터 늙은 나무였던 내가 보지 못한 그 나무”는 ‘늙은 나무’ 또는 ‘늙은 나’로 애매하게 분절되면서 의미를 배가한다. “마음에 담아두고 펼치지 못하는 것은 병든 몸과 같다”는 다음 구절로 미루어 볼 때 시인은 마음에만 골몰하고 행동하지 못하는 것을 늙고 병약한 것으로 인식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대웅전 사분합문의 커다란 검은 나비에 반하거나 오래된 거대한 푸조나무에 몰입하는 것은 아무래도 젊고 건강한 사람이 행할 바라고 하기는 어려운 것이다. 시인이 갑작스럽게 ‘곽탁타’의 이야기를 꺼내는 것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곽탁타는 어떤 영혼을 가졌기에 옮겨 심은 나무마다 살아나고 무성히 자라나 가득 열매를 맺었을까 탁타가 가꾼 것은 나무일뿐 아니라 그의 등에 난 혹 또는 세상의 이치.
아무도 모르게 낙타처럼 굽은 등을 쭉 펴보았다가 다시 구부리는 것, 머릿속에 늙은 푸조나무와 검은 나비를 키우기보다 집에 두고 온 산부추분을 살려내야 하는 일이 먼저인 걸 알겠다
나는 늙은 푸조나무도, 밤나방처럼 가만히 붙어 몇백 년이라도 꽃살문을 떠메고 있으려는 커다란 나비경첩이 주는 무거움도 내려놓고 꽃살문 앞 떠난다 마량 간다 까막섬 간다
곽탁타는 나무 가꾸기의 달인으로 알려져 있는 전설적인 인물이다. ‘탁타’는 ‘낙타’란 뜻으로 곱추였던 그가 기꺼이 자신의 이름으로 받아들인 그의 별명이었다 한다. 그는 타고난 섭리에 따라 본성에 이르는 방식으로 나무를 가꾸었고 자신 또한 그렇게 살아갔다. 섭리를 거스르지 않고 본성에 이르는 곽탁타의 생존의 방식에서 시인은 건강하고 자연스러운 삶의 태도를 깨닫는다. 또한 머릿속의 어떠한 장엄의 광경보다도 살아 있는 풀 한포기 가꾸는 것이 더 의미 있다는 결론에 이른다. ‘늙은 푸조나무’와 ‘커다란 나비경첩’에 매달려 있는 생각의 ‘무거움’을 내려놓고 시인이 향하는 길은 ‘집에 두고 온 산부추분’이다. ‘꽃살문’의 장엄을 지나 시인이 향하는 ‘까막섬’은 장엄과 영원의 경지보다 더 절실한, 소박한 생명의 섭리를 암시한다. 꽃살문의 장엄을 완성한 장인의 정신보다 생명을 다룰 줄 알았던 곽탁타에게 더 많이 이끌리는 것으로 보아 앞으로 시인의 행로 역시 미학적 완성 이상으로 삶의 방식에 대한 진지한 질문을 지속해 나갈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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