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文學과 評論

내가 읽은 시/문맹 외 / 유홍준

by 담채淡彩 2019. 5. 13.

문맹 / 유홍준

 

펄프를 물에 풀어, 백지를 만드는 제지공들은 하느님 같다

흰 눈을 내려

세상을 문자 이전으로 되돌려놓는 조물주 같다

 

티 없는 , 죄 없는

순백

無化의 길 ……

 

더욱 완전한 백지에 이르고자

없애고 없애고 또 없애는 것이 제지공의 길이다, 제지공의

삶이다, 마치 거지의 길이며 성자의 삶 같다

 

그러므로,

 

오늘도 백지를 만드는 제지공들은 자꾸만 문자를 잃어

간다, 문맹이 되어간다

 

문명에서ㅡ문맹으로

 

휴일 없이

3교대 종이공장 제지공들은 출근을 한다

 

 

연두

 

다관 속에 아침을 담는다

여린 찻잎으로 숙우가 기울어지면 마른 잎이 오금을 펴는 소리

머금었던 하늘이 연둣빛이다

저 여린 찻잎이 토해낸 녹색의 피

뜨거움에 볶이고 수없이 주무른 손 끝에 덖여

밀봉된 입

그늘에서 서서히 말라간 찻잎의 마음들

이제야 찻잔 가득 속마음을 털어 놓는다

 

나 한때 다향茶香처럼 푸르렀으니

그 물기어린 시절은 연두였으니

내 몸에서 빠져 나간 시간들은 헐거나 눈이 멀어

모두 퇴색되었다

 

우러난 차 한 잔, 오래 마른 침묵이 열리고

녹차를 따던 여린 손과

바구니에 담긴 햇살이 이렇게 싱그럽다

연두 한잔으로 마음을 채워

걸쭉한 피를 걸러낸다

마음의 응어리를 다 풀어 놓는다

 

 

 

설화(舌花)

 

내 몸에 자주 꽃이 핀다

 

사철 봉긋 봉긋,

명절이나 집안 행사 때가

가장 꽃 피우기 좋은 시기

입안에 숨어 있던 꽃씨를 틔워

알알이 쓰린 꽃잎을 혓바닥에 피운다

 

까칠한 설화

맵고 짠 음식에 닿으면 벌겋게 만개한다

좋아하는 평소의 음식 모두 물리치고

매미처럼 한세상 청렴하게 살다가겠다고

찬물로 세치의 혀를 달랜다

 

일복 많은 종부, 나는 저 꽃의 속내를 알지만

어찌할 수 없어

칭얼대는 설화를 달래가며 밤을 지샌다

 

 

몸이 몸에게 보내는 붉은 메시지

나는 그의 경고를 무시한다

 

 

 

꽃 피울 곳은 오직 이곳

설화가 지친 몸에 뿌리를 내린다

 

기다리는 마음 / 김민부

 

 

일출봉에 해 뜨거든 날 불러주오
월출봉에 달뜨거든 날 불러주오
기다려도 기다려도 님 오지 않고
빨래 소리 물레 소리에 눈물 흘렸네

 

봉덕사에 종 울리면 날 불러주오
바다에 바람 불면 날 불러주오
기다려도 기다려도 님 오지 않고
파도소리 물새 소리에 눈물 흘렸네

***********************************

이 노래를 모르는 한국인은 아마 없을 것이다.
이 시는 <기다리는 마음>이라는 김민부의 詩다.

 

여기에 장일남이 곡을 붙이고 테너 박인수가 불러 국민적

애창가곡이 되었다.

사람이 외로워도 그냥 저냥 사는 것은 기다림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 기다림을 이토록 쉬운 말로, 이토록 절절하게 풀어낸

시가 또 있을까. 그 기다림은 외로운 산모퉁이에 홀로

서 있는 망부석의 슬픈 사연이라고 해도 좋고,

이산가족의 아픈 애환이라고 해도 좋다.

 

기다림이 소중한 것은 기다림이야말로 '없는 자'나

'잃어버린 자'에게 유일한 희망이기 때문이다.

 

요절한 우리 시대 국민적 시인

김민부는 타고난 서정시인으로 어릴 때부터 그 천재성이

드러났지만, 그 천재성을 다 드러내지 못하고 31살의

젊은 나이에 요절했다. (사고인지 자살인지 모를 화재로)

그의 대학 동기생인 이근배 시인은 "버릇없이 신의 영역을

침범하여 시의 천기를 누설했기에 신이 질투하여 그를

일찍 데려갔다."고 할 정도로 그는 시의 진실에

가까이 갔던 시인이다.

 

김민부는 1941년 3월14일 부산 수정동에서 6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부산 성남초등학교를 거쳐 고교 2학년 때인 1956년 8월

첫 시집 <항아리>를 내었다.
본명은 "병석"(炳錫)인데 일제시대 호적 잘못으로 중학시절

부터 "민부(敏夫)"라고 불렀다.

스스로 "아이노꼬"(혼혈아)라고 할 정도로 깊숙한 눈에

저음의 목소리, 이국적인 마스크를 한 이 소년은 실은

코흘리개로 누런 코를 닦지 않고 윗입술로 받치고

다녔다고 그의 옛친구 조용우(전 국민일보 회장)씨가

회고한 적이 있다.

 

 

그는 영남의 명문 부산고교 2년 재학시절에 동아일보

신춘문예(1957년)에 시조 <석류>로 입선, 3학년 때

한국일보 신춘문예(1958년)에 시조 <균열>로 2년 연속

당선되어 세상을 놀라게 했던 천재다.

 

그는 고교시절 부산시내에서 한다하는 문학지망생들을

모아 <죽순> 동인 (뒤에 <난> 동인으로 개명)을 만들어

그 대장노릇을 하고 다녔다.

그보다 2년 뒤 한국일보 신춘문예 당선으로 시인이 된

박태문(경남상고), 장승재(경남고), 권영근(부산상고),
오영자(경남여고), 박송죽(남성여고), 황규정(부산고),

박응석, 임수생 등이 그들이다.

그는 고교시절 부산·경남은 물론 전국의 문예콩쿨을

휩쓸어 이 땅에 불란서의 천재시인 랭보 같은 존재가

되었다. 고교생이 일반 무대에서 신춘문예로 당선된다는

것은 당시로서는 상상할 수 없었던 일이다.

[출처] 기다리는 마음 / 김민부|작성자 동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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