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文學과 評論

시, 본성으로서의 창조적 담론

by 담채淡彩 2010. 5. 24.

 

시, 본성으로서의 창조적 담론

 

박 민 수

우리 시대의 시는 창조 개념으로 이해되는 것이다. 우리 시대의 시는 한 시인이 유목적적 예술 의식을 바탕으로 만들어 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우리 시대에 하나의 상품이 되기도 한다. 유목적적 창조물을 수용하는 타자의 보상이 제공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시는 타자의 보상이 주어질 만큼의 중요한 가치를 담은 의도적 창조물의 하나인 것이다. 그 의도를 호라티우스는 교육과 즐거움으로 정의했지만, 이러한 정의는 시가 지닌 고상함의 숭배 의식을 바탕으로 할 때 좀 천한 느낌이 든다. 교육이나 즐거움은 지나치게 실용적이거나 지나치게 소모적이라는 생각을 주기에 충분하기 때문이다. 이런 면에서 우리 시대에서의 시란 무엇인가를 다시 살피고자 할 때, 이미 기원전 아리스토텔레스가 인간의 본능에서 시의 발생론적 근원을 찾고자 했던 것처럼, 다시금 인간의 본성적 산물로서의 시를 생각하게 된다.

 

시란 인간의 본성적 산물이다.

 

시의 이러한 발생론적 정의는 아리스토텔레스와는 좀 더 진전된 과학적 근거에 토대를 둔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아직 인지심리학이나 인간의 생물학적 본성 연구가 이루어지기 전에 추론적으로 그렇게 말했을 뿐이다. 19세기 다윈의 진화론이나 20세기 소쉬르의 언어 연구, 프로이트의 정신 분석, 피아제의 인지심리학, 가드너의 다중 지능 연구, 그리고 자연과학에서의 두뇌 연구는 인간의 본성을 새롭게 이해하는 단초를 제공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20세기 중반, 미국의 노암 촘스키는 언어를 본성적 산물의 하나로 보면서 우리의 다양한 언어생활을 가능하게 하는 언어 본성의 생물학적 보편 문법을 구축하고자 하기도 하였다. 언어와 언어 예술로서의 시가 인간의 본성적 산물임이 보다 과학적 근거에 의하여 증명되기 시작한 것이다. 이런 일련의 과정 속에서 최근 하버드 대학의 스티븐 핑커 교수가 제공하고 있는 언어의 본능성 탐구(The Language Instinct:그린비, 1994)와 예술의 본성적 근원 탐구(The Blank Slate:사인언스 북스, 2002)는 언어와 시에 대한 보다 더 본질적인 설명을 가능하게 해 준다.

 

시가 인간의 본성적 산물이라는 새삼스러운 정의는 최근 우리 사회가 보여주는 시 쓰기와 시 읽기의 변화되는 모습에 대한 긍정적이거나, 또는 부정적인 측면을 살피기 위한 것이다.

 

시의 목적을 교육이나 즐거움과 관련짓는 호라티우스의 접근이 오늘날 조금쯤 촌스럽게 느껴지긴 하지만, 사실 시는 즐거움이나 교육적 요인과 깊이 관련되어 있음이 사실이다. 세계 문학사에서 시가 지닌 이러한 전통적 관점에 대응하는 큰 변화가 이루어지는 것은 19세기를 지나서이다. 1910년 런던에서 열린 후기 인상파의 그림 전시회가 그 분수령이다. 세잔, 고갱, 피카소 반 고흐의 작품들이 새로운 예술 경향의 서막이 되었고, 이것이 이른바 예술계 모더니즘 운동의 시작이 된 것이다. 이러한 모더니즘은 그 철학이 인간의 즐거움에 호소할 수 있는 기존의 예술적 방식을 인정하지 않았다는 데 있다.(스티븐 핑크) 그리하여 시는 전통적인 시들이 지켜온 운율이나 매끈한 운문 구조, 또는 의미의 명쾌함을 무시하기도 하면서, 주관성이 강한 난해 담론을 산출해내기도 한다. 이러한 경향은 한국에서 1930년대 이상이나 1960년대 <현대시> 동인들에 의해 주도되었고, 이로써 한국 현대시는 전통적인 시 의식의 토양 위에 모더니즘이라는 거대한 산맥 하나를 형성해 낸다. 그리고 그 대척적 위치에 리얼리즘이라는 것이 자리를 잡고 있다. 마르크스의 예술 의식에 토대를 둔 것으로, 문학을 사회적 목적 수단으로 인식함으로써 발생된 것이다. 이러한 흐름 역시 한국 문학사에서 또 다른 하나의 산맥을 형성하게 되는데, 이것은 1920년대부터이다.

 

한국 현대시사가 만들어 낸 리얼리즘과 모더니즘의 두 갈래는 매우 숙명적인 것이다.

 

한국의 리얼리즘은 1896년 서재필의 독립신문을 통해 도입되기 시작한 자유민주주의를 배경으로 한 것과, 1920년대에 도입되기 시작한 사회주의를 배경으로 한 두 갈래로 나뉜다. 자유민주주의를 배경으로 그 현실적 오류를 비판하고 있는 리얼리즘 갈래를 흔히 비판적 리얼리즘이라고 하고, 사회주의를 찬양 고무하는 참여적 리얼리즘의 갈래를 흔히 사회주의적 리얼리즘이라고 한다. 비판적 리얼리즘은 1920년대 김형원 등에서 비롯되어 1960년대 김지하 등으로 이어지고, 사회주의적 리얼리즘은 1920년대 임화 등에서 비롯되어 1980년대 박노해 등으로 이어진다. 1980년대 이후 한국 현대시의 주도적 리얼리즘은 사회주의적인 것이다. 이것은 북한의 철학적 인식과 맥을 같이 하는 것으로, 남한의 정체성인 자유민주주의와 자본주의에 대척되기 때문에 강한 저항성과 투쟁성을 드러낸다.

 

한국의 모더니즘은 그 출발이 1920년대의 김소월이나 이상화가 보여준 전통 지향성에 대한 반발에서 비롯된다. 우리의 전통적 정서인 자연과 사랑과 그리움의 정서를 부정하면서 현대 문명과 도시를 새로움으로 추구하기 시작한 것이다. 1930년대 김기림이나 정지용을 출발점으로 삼아 1950년대 박인환이나 김수영으로 이어지는 맥락이 이것이다. 그러나 한국 모더니즘 역시 또 다른 하나의 맥을 형성하게 되었으니, 그것이 1930년대 이상에서 비롯되어 1960대 이승훈 등으로 이어지는 내면 탐구, 무의미의 시, 또는 파편적 글쓰기의 시이다.

 

한국 현대시의 리얼리즘과 모더니즘이 숙명적이라고 말하는 것은 이들 두 갈래가 양립할 수 없는 철학적 근거의 대립 양상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 대립은 상호 부정의 극단성을 갖는 것으로, 실제로 우리나라의 리얼리즘은 사회주의적 이데올로기로서의 강한 경직성을 보여주는 것이고, 모더니즘은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새로운 철학에 의해 확대되면서 진리나 진보를 더 격렬하게 부정하는 비사회적 경직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한국 현대시가 보여준 이상과 같은 양상은 실제로 부정적인 것과 긍정적인 측면에서 오늘날 한국 현대시의 실천적 시 읽기와 시 쓰기에 영향을 미쳐왔다고 할 수 있다.

 

부정적인 것으로 리얼리즘이 미친 것은 바로 사회의식에 혼선을 준 것이다. 남한의 정체성으로서의 자유민주주의와 자본주의를 사회주의와 대립시켜 사회주의적 경향을 표면화시켰으며, 이것은 알게 모르게 북한 체제에 동조한 꼴이 되었고, 남한 가치관 판도에 대혼선을 던져 주었다. 그 혼선의 연장이 우리가 지금 경험하는 사회 갈등의 한 갈래이다. 또 따른 부정적인 것은 모더니즘이 남긴 것으로, 시 쓰기의 격렬한 주관성과 무의미, 파편성 등에 의해 많은 시 독자들이 시 읽기를 포기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한 것이다. 이러한 부정적 요인은 우리 시대의 실용적 경제주의와, 전자 문화, 또는 쾌락적 감정주의의 물결 속에서 시 읽기의 문화적 보편성을 만드는 데 실패하였다고 할 수 있다. 시는 즐거운 것이 아니라 혐오스러운 것이며, 거부적인 난해한 무엇으로 인식하는 무의식을 안겨줌으로써 시 읽기, 또는 시 쓰기의 대열에서 돌아서는 사람들이 많아진 것이다. 그래서 시는 즐거움이 아닌 특정의 수단 또는  낮선 것이 되었고, 난해성의 괴물이 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우리 시대에 많은 비시적 요인들이 작용하고 있고, 그리하여 시 읽기의 독자들이 줄어들었다는 한탄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시를 읽거나 시를 쓰는 사람들이 어느 때보다도 많아졌다는 사실이 확인되기도 한다. 이것은, 인간의 본성적 산물로서의 시가 지닌 근원적 즐거움의 매력 때문이며, 이런 면에서 위에서 말한 리얼리즘 시나 모더니즘 시가 지닌 부정적 요인 안쪽에 매우 중요한 긍정적 요인들을 살아 있음을 확인하게 된다. 리얼리즘 시는 인간의 현실 참여적 본성을 노래로 구현하는 도구가 됨으로써 그 내용은 분노이되, 심리적으로는 분노의 언어적 표현에 의한 또 다른 즐거움을 경험하는 것이기도 하다. 솔직히 시를 통한 리얼리즘은 메시지의 완결성이 미약한 것이다. 여기에는 설득의 담론들이 더 효과적일 수 있다. 그러나 시 쓰기의 본성적 욕구에 지배되면서 또한 그 의식이 사회성을 지향할 때, 여기에는 당연히 시적 담론이 선택될 수밖에 없다. 사실 모든 예술의 경향은 불가피한 선택적 요인에 의해 성립되는 매우 주관적인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리얼리즘 시의 존재를 긍정할 수밖에 없고, 그것을 통해 시 쓰기와 시 읽기의 즐거움을 느끼는 작가와 독자들이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또한 모더니즘의 시는 삶의 보편성에 대한 적대적 파괴 속성을 지니지만 그 파괴적 속성 때문에 글쓰기와 글 읽기의 더 없는 즐거움을 경험하기도 한다. 모더니즘 시인들은 언어의 마술적 역동성, 그 이미지와 내면의 생명화, 또는 그러한 것들의 쏟아냄을 통해 아주 독특한 즐거움을 경험하게 되고, 수준 높은 독자들은 이러한 시를 통해 새로운 언어 세계의 황홀을 경험하기도 하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 시대의 저 끝없는 감정의 자동화와 기계화를 방어하는 원초적 생명력의 칼이 되는 것으로, 거기에 담긴 즐거움은 아는 사람만이 알 수 있는 것이다.

 

이상과 같이 우리 시대의 시가 갖는 부정적인 것과 긍정적인 것의 싸움에서 어느 것이 패하고 어느 것이 승리하고 있다고 단정짓기는 어렵다. 시를 창작하고, 시를 읽는 인간의 언어적 본성은, 그것이 본성이기 때문에 언제나 살아 있을 수밖에 없고, 그러하기에 기회 있을 때마다 많은 사람들로부터 그 본성 표출의 욕구가 드러날 수밖에 없다. 전국적으로 수없이 많은 시 전문지들이 꾸준히 시를 생산해 내는 매개 역할을 하고 있고, 많은 시인 지망생들이 시 쓰기의 열정을 불태우고 있으며, 특히 많은 중앙과 지방의 일간 ․ 주간 신문들이 서로 앞 다투어 아침마다 독자들에게 시 한편씩을 배달하고 있는 모습은 어떠한 환경의 억압 속에서도 살아지지 않는 시적 본성을 재확인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  

 

물론 이러한 낙관적인 분석이 비판될 수 있음은 사실이다. 교보 문고의 시집 코너가 계속 축소되고 있다거나, 시를 읽는 사회적 풍조를 찾을 수 없다는 한탄들이 꾸준히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면에서 우리는 몇 가지 돌이켜 생각할 일들이 있다. 그것은 특히 시인들에게 요구되는 것이며, 시를 가르치는 학교 교육에 요구되는 것이다. 시가 무엇보다도 즐거움이며, 그것을 통해 교육적 목적까지 얻을 수 있는 것이라면, 그리하여 시가 사회적 진실이나, 생명의 본원을 살려주는 힘을 갖는 것이라면, 또한 시를 읽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이 한 나라의 문화 수준을 증명하는 것이라면, 시인들도, 학교 교육도 해야 할 일이 있다. 시인들로서는 독자들에 대한 친절한 접근이 요구되고, 학교 교육은 제발 시를 시로 가르치는 것이 요구되는 것이다. 이러한 가운데 더욱 중요한 것은 학교 교육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나라의 학교 교육은 교육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모르고 있다. 시를 중심으로 말하자면, 우리나라의 학교 교육은 시를 왜 가르치는지 모르면서 가르친다. 학교 교사들과 만나 왜 시를 가르치느냐고 물으면, 그들의 대답은 아주 간단하다. 학생들의 정서 순화를 위한 것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전적으로 옳은 인식이라고는 할 수 없다. 더욱이 중 고등학교에 가면 시는 시의 이해 목적이 아니라 학교 시험이나 입시를 위한 것이다. 그래서 중고등학생들에게 왜 시를 공부하느냐고 물으면 아주 당연하다는 듯이 한결같이 시험에 나오기 때문이라고 대답한다. 그러나 시의 학교 교육은 시를 읽는 즐거움 또는 그 언어적 가치의 수용 능력을 기르기 위한 것이다. 시를 시로서 읽고 그것을 통해 언어 예술로서의 시가 지닌 잠재적 감동을 수용하는 능력을 기르기 위한 것이다. 그 능력을 통해 시 읽기가 제대로 이루어지고, 그것을 통해 인간의 감정적, 인격적 변화의 순간을 경험하기 위한 것이다. 그래서 시의 교육은 그 접근 전략이 다른 인지적 것의 학습과는 달라야 한다. 학교 시험, 또는 입시를 위해 시 공부를 한다는 인식으로부터 먼저 벗어나야 한다. 시 창작도 마찬가지이다. 시 창작이란 일차적으로 언어를 매재로 한 창작의 즐거움을 경험하고, 그것을 생명의 힘으로 승화시키기 위한 것이다. 그런데 지금 학교 교육은 시를 시로 가르치는 능력을 제대로 갖고 있지 못하다. 시를 시로 가르칠 수 없는 교사들에 의해 시를 가르치는 오류가 반복되고 있는 것이다. 당연히 사회적 시 읽기, 그것을 통한 고상한 문화 수준의 향상을 기대하는 것은 나무 위에서 고기를 구하는 것과 같다. 

 

초등학교에서는 1학년에서 6학년까지 적어도 160여 편의 시를 읽고 가르치며, 중고등학교에서는 선택을 제외하고 최소한 90여 편의 시를 읽고 가르친다. 이런 정도의 숫자면 최소한 시를 읽고 즐길 수 있는 기초 능력을 기를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정도의 시를 읽고 공부해도, 시는 여전히 재미없고 어려운 것으로 인식되는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시를 즐거움의 대상으로 선택하는 마음의 움직임을 만들어 내지 못한다. 그래서 불란서 사람들은 많은 시를 읽으며 생활한다는 얼마 전의 신문 기사가 우리의 현실이 되기에는 거리가 먼 것이다. 대학에 들어와 문학을 강의 받는 학생들에게서 항상 확인되는 사실이 이것이다.

 

라이프니쯔는 언어는 인간 정신의 가장 좋은 거울이다.라고 말한 바 있다. 시는 인간의 본성적 표현이며, 그것을 통해 창조와 수용의 언어적 즐거움을 경험한다. 그리고 감성적 변화를 통해 계속 정신문화적 자기 존재를 새롭게 향상시켜 나간다. 따라서 시는 인간 정신의 표현이며 거울이다. 더욱이 우리의 시대는 인간의 내면을 억압하는 많은 요인들로 어수선한 모습을 보인다. 경제주의가 만들어 낸 물질적 풍요와 육체적 쾌락 지향의 본성들이 잘 어울려 인간을 더욱 비인간화의 어둠 속으로 몰아가는 충동적 자질이 되고 있다. 이러한 시대적 흐름 위에 시를 바르게 가르치고, 즐겁게 받아들이며. 그것으로 충만한 생명의 행복감을 누릴 수 있도록, 필요한 마당을 펼쳐 주고 필요한 능력을 제공해 주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그 마당이 독자들의 공감과 호감을 살 수 있고, 그 능력 제공의 방법이 독자들을 끌어안을 수 있는 설득력을 갖는다면 이것은 분명 좋은 일이다. 우리 시인들과 학교 교육이 함께 풀어나가야 할 우리 시대의 아름다운 과제라고 할 수 있다.

 

점점 시를 읽는 인구가 줄어들고 있고, 또 좋은 시가 많이 창작되고 있지 못하다는 비판의 소리에 귀 기울여 이 글을 쓴다. 인간이 지닌 시의 본성을 살려냄으로써 우리는 더욱 아름다운 환경 속에서 아름답게 살아갈 수 있다. 이것을 지나친 공리주의라고 비판해도 할 수 없다. 시는 아름다운 것이다. 시는 인간의 생명 표현이며, 생명 창조의 힘인 것이다. 그래서 시 읽기와 시 쓰기는 그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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