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文學과 評論

고요의 맨발”을 매만지는 격정과 슬픔의 언어

by 담채淡彩 2010. 5. 31.

고요의 맨발을 매만지는 격정과 슬픔의 언어




유 성 호





1. 반시(反詩)의 미적 범주


내게 강현국 시인은, 거의 예외없이 ?시와 반시?의 이미지와 함께 떠오른다. 이 완강하고도 오래된 편견은 두 가지 점에서 언제나 자연스럽게 반복된다. 하나는 물적 토대가 지극히 미약한 한 지역에서 그가 참으로 일찌감치 이 전위적 제호(題號)의 시 전문지를 시작한 매체적 선구자라는 사실 때문이고, 다른 하나는 반시(反詩)의 미적 범주와 그의 시세계가 매우 긴밀한 친연성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 때문이다. 그만큼 강현국 시인의 시적 권역은 ?시와 반시?가 가지는 이미지 곧 방외인 혹은 경계인의 속성과 깊이 연관되어 있다. 중심을 거부하면서 미학으로 새로운 시적 중심을 이루어가겠다는 포부로 시작한 이 저널이 이제는 10년을 훌쩍 넘어 누구나 인정하는 한국의 대표적인 시지(詩誌)가 되었으니, 反詩적 열정을 의 권역으로 쌓아올리려 했던 그의 문학사적 욕망은 어느 정도 중요한 성과를 올린 셈이다.

이처럼 그동안 우리에게 보여준 강현국 시인의 시세계는 우리 문학사에서 의 범주보다는 反詩의 범주에 귀속될 만한 여러 자질을 지니고 있었다. 우리가 보기에 그의 시는 사물의 표면을 인상적으로 포착하고 개괄하는 서경적 필치나, 시적 주체의 고백적 자기 표현을 위주로 하는 서정적 경향이나, 사회 현실의 반영과 극복을 지향하는 현실주의적 흐름으로부터 모두 비껴나 있었다. 그렇다고 그가 심미적(審美的) 완성도에 깊은 공을 들여온 것도 물론 아니다. 그의 시는 이러한 여러 지향이 놓치고 있는 어떤 지점에서 발원하는 세계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반시적 범주로 귀속된다는 강현국 시학의 핵심은 무엇일까.

먼저 그는 우리의 삶을 규율하고 유지하는 근본적인 조건들 예컨대 인간의 의지나 노력으로는 도저히 어찌할 수 없는 운명적 표정들을 노래하는 시인이다. 곧 생의 본원적 형식인 격정이나 슬픔 혹은 그리움 같은 가장 근원적인 정서적 세목들을 시 안으로 적극 불러들이는 시인이다. 그 점에서 그는 어느 누구 못지 않은 서정성의 시인이다. 하지만 그의 反詩적 속성은 그 정서들을 기표화하고 한 편의 시로 구성하는 과정과 방법에서 극명하게 나타난다. 그는 언어가 사물이나 정서를 지시하고 표현할 수 있다고 믿지 않는다. 다시 말해서 사물과 언어는 끊임없이 서로를 매만지면서도 서로의 표면에서 미끄러질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양보하지 않는다. 그만큼 강현국 시인은 주제의 서정성과 방법의 실험성을 지속적으로 결합하고 변주하며 그의 시학을 완성해가고 있는 시인이다. 바로 그 균형의 힘이 그로 하여금 전통적 서정시가 우세한 우리 시단에서 反詩의 범주로 귀속되게끔 하고 있는 것이다.

이번에 그가 새로이 펴낸 ?고요의 남쪽?(고요아침, 2004)은 이러한 그의 시적 적공(積功)이 확연한 일관성과 심화된 형상을 얻고 있는 성과이다. 가령 이 시집은 그의 오래고도 일관된 시적 욕망인 경계인으로서의 기웃거림을 지속하면서도, 삶의 격정슬픔을 내면으로 안아들여 거기에 고요의 속성을 부여하려는 그의 미적 욕망을 담고 있는 결실이라 할 것이다.



2. 고요를 꿈꾸면서, 의 기억을 넘나들다


강현국 시인은 이번 시집에서도 시가 가질 법한 통사적 완결성이나 의미론적 투명성을 친절하게 보여주지는 않는다. 오히려 유기적으로 얽힐 것 같아 보이지 않는 사물과 정서들을 한 작품 안에 불러모으면서, 그들끼리 의미론적으로 소통하게 하기보다는, 제각기 독립적인 의미망을 거느리게 하면서 서로 넘나들게 하고 있을 뿐이다. 그렇다고 우리가 그의 시적 충동이나 지향이나 가치들을 전혀 간취할 수 없는 것은 물론 아니다. 이미 말한 대로, 그의 시는 격정이나 슬픔 속에서 피어난다. 그리고 지나간 시간에 대한 그리움에 시적 시선을 주고 있다. 그런데 그 시선이 일관되게 고요에 감싸인 채 열리고 있고, 궁극적으로 그 고요를 꿈꾸고 있다는 점이 바로 이번 시집만의 이채로운 미학적 몫이라 할 것이다. 시집의 표제작인 고요의 남쪽이 그 대표적인 사례이다.


떡갈나무 그늘을 빠져나온 길은

황토 산비탈로 자지러진다

차돌처럼 희고 단단한 고요

오직 고요의 남쪽만 방석만큼 비어 있다

길은 또 한번 황토 산비탈로 자지러진다

온몸에 고추장을 뒤집어쓴 어떤 애잔함이, 출렁

섬진강 옆구리를 스치는 듯도 하였다

고요의 남쪽 전문


떡갈나무 그늘을 빠져나온 길온몸에 고추장을 뒤집어쓴 황토 산비탈로 자지러진다. 그런데 이 역동적 풍경을 감싸고 있는 것은 오히려 차돌처럼 희고 단단한 고요이다. 말하자면 고요의 남쪽은 텅 비어 있는데, 길은 또 한번 황토 산비탈로 자지러지고 있다. 이 비어있음(고요)/자지러짐(길)의 대위(對位)를 바라보는 시인의 시선은, 이 작품에서 거의 유일한 정서적 기표인 애잔함으로 집중된다. 그 애잔함섬진강 옆구리를 스치는 듯 출렁이며 고요의 남쪽을 흐르고 있는 것이다. 아니 더 정확하게는, 시인의 예민한 감각이 고요애잔함을 유추적으로 결합하면서 출렁이게 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시인이 꿈꾸고 있는 고요는 시인 개인에게는 어떤 허심(虛心)의 상태일 것이다. 또한 바깥 세계로 외연이 확장되면 그것은 어떤 근원적인 것의 현현(epiphany)을 가능케 하는 어떤 조건일 것이다. 그래서 시인이 어느 날 훌쩍, 사냥개 사라지고,/텅 빈 고요만 비에 젖어 슬펐네(가난한 시절4), 세월이 강물처럼 흘러갔다/고요의 남쪽이 다 젖었다(세한도12)라고 말할 때 그 고요는 젖어 있기도 하고, 고요의 뺨이 만지고 싶어/안주머니에 손을 넣어(개미와 더불어)본다고 할 때는 강렬한 접촉(skinship) 충동을 부르는 물질성의 실체가 되기도 한다. 이처럼 시인은 고요의 살을 만지고 고요의 소리를 들으며 고요의 속살까지 깊이 들여다본다. 이 오감(五感)을 통한 고요와의 접촉 충동은 이 시집에 편재(遍在)해 있는 기본적이고 궁극적인 힘이다. 나아가 칼도 經도 없이/바짝 마른 고요의 굴뚝으로부터/풀, 풀, 풀, 흩어지는 오직 흰구름(세한도2)을 바라보는 장면에서 고요는 모든 사물과 공존하면서도 그 사물을 감싸고 있는 바짝 마른 배경이 되기도 하다. 그러니 고요의 남쪽에서 섬진강 옆구리를 스치는 듯도 했던 것은, 애잔함이자 고요 자신이기도 했던 것이다.

결국 시인이 바라보는 고요의 남쪽은, 이렇듯 시인이 희원(希願)하는 사물들의 존재 방식이기도 하고, 궁극적으로는 시인이 완성을 욕망하는 어떤 정신적 지경(地境)이기도 하다. 그러니 그 고요는 감각적인 stillness와는 전혀 차원이 다른 정신적인 tranquillity에 가까운 어떤 것이라 해야 할 것이다.


육군 강병장을 만나러 간다 완주군 구이면 중인리 정자나무 근처에서 출발한 그 길은 논둑 밭둑을 지나 돌배나무 그늘을 가로지른다 초록에 막힌 산길은 물론 통화권이탈지역 솔방울 떨어지는 소리에 놀라는 것은 돌배나무 이파리나 날다람쥐만은 아니다 무르팍 깨지도록 그의 이름 부르며 물봉숭아 군단 곁을 지나거나 첨벙첨벙 개울을 건널 때 깜짝 놀라 흩어지는 모래바람 같은 길들


모악산 어디에도 육군 강병장은 보이지 않는다 날다람쥐가, 계곡 물소리가, 낡은 군화 한 짝이 아주 오래된 문지방을 넘나들고 있다

통화권이탈지역 전문


아마도 이 작품에서 시인이 만나러 간다는 육군 강병장은, 문맥으로 보아 젊은 날의 자신일 것이다. 말하자면 그는 완주군 구이면 중인리 근처 어디서 군 생활을 했었으며, 지금은 제대를 얼마 안 앞둔 병장의 기억으로 돌아가고 있다. 그런데 그 강병장을 만나러 가는 길은 논둑 밭둑을 지나 돌배나무 그늘을 가로질러 급기야는 초록에 막힌 산길통화권이탈지역에 이른다. 그것이 그리움의 발로이건 아니면 끔찍한 기억과의 조우에 대한 욕망이건 이 통화권이탈지역은 현재의 화자로 하여금 지난날의 강병장과의 만남을 좌절시킨다.

통화권이탈지역에서는 무르팍 깨지도록 그의 이름 부르며 물봉숭아 군단 곁을 지나거나 첨벙첨벙 개울을 건널 때 깜짝 놀라 흩어지는 모래바람 같은 길들의 기억이 출렁이고 있다. 첨벙첨벙 개울을 건널 때 깜짝 놀라 흩어지던 모래바람은 다 어디로 갔을까. 그러니 모악산 어디에도 육군 강병장은 보이지 않을 수밖에 없다. 다만 기억을 훌쩍 넘어버린 날다람쥐가, 계곡 물소리가, 낡은 군화 한 짝이 아주 오래된 문지방을 넘나들고 있을 뿐이다.

이처럼 의 기억 속에 눌어붙어 있는 존재/부재 혹은 욕망/현실의 경계선을 시인은 넘나들고 있다. 그 경계선에서 어느 것 하나로 귀착되지 못하고 그리워하며(후미진 시간의 한 끝인 당신(외출)), 기웃거리고 부대끼며(나는 오늘도 세끼 분의 공복과 하루 분의 권태를 자동지급 받습니다 당신 때문입니다(악어와 악어 사이)), 때로는 환각(幻覺)의 시적 욕망을 에 받아들이는 것이 또 다른 강현국의 시세계인 것이다. 그 스스로 몸은 한때 세계를 향한 전진기지(몸살)였다고 하지 않았는가.



3. 고독한 경계인이 완성하는 고요의 시학


공교롭게도 시집이 간행된 출판사 이름과 시집 제목 모두에 고요의 기운이 묻어 있다. 마치 아침남쪽고요를 매개로 하여 서로 수런거리며 가볍게 빛을 주고받는 시적 공간을 이루고 있는 듯하다. 그렇다고 시인의 고요가 마냥 평화롭고 허적(虛寂)의 분위기만을 주는 것은 아니다. 좀 더 깊이 들여다보면, 시인은 고요의 맨발(시작 노트)을 매만지면서도 자신만의 고독한 격정슬픔의 언어를 그 안에 담고 있다.


한 고요가 벌떡 일어나 한 고요의 따귀를 때리듯

이별은 그렇게 맨발로 오고, 이별은 그렇게

가장 아름다운 낱말들의 귀를 자르고

외눈박이 외로움이 외눈박이 외로움의 왼쪽 가슴에 방아쇠를 당길 듯 당길 듯

까마귀 나는 밀밭 너머 솟구치는 캄캄한 사이프러스, 거기


아무도 없소? 아무도…


별이 빛나는 밤 전문


사실 이번 시집에는 강현국 시의 오래된 미학적 방법론이었던 상호텍스트성이나 우연성 혹은 언어유희(pun) 같은 후기 현대 미학의 기법들이 여전히 활발한 외관을 취하고 있다. 위 작품도 이러한 우연성에 기반을 둔 자유 연상과 상호텍스트성이 상상적으로 깊이 매개되고 있는 시편이다. 시인이 이 작품에서 원용하고 있는 텍스트는 우리에게 잘 알려진 후기 인상파 화가 고흐(V. Gogh)와 그의 작품들이다. 고흐는 시 안에 나오는 까마귀 나는 밀밭, 귀가 잘린 사나이(자화상) 등의 그림을 그렸고, 고갱과 다투고 나서 헤어진 후 면도칼로 자신의 귀를 잘라버렸고, 그 뒤 파리에서 발작을 하여 권총으로 자살을 기도하기도 하였다. 물론 시의 제목도 19세기 후반의 고흐의 걸작인 별이 빛나는 밤에서 따온 것이다. 정말 참 우연한 일도 많(내 마음 갈 곳을 잃어)지 않은가.

그러니 이 작품은 고흐의 생애와 화풍과 죽음처럼 밀도 높은 격정(激情)을 그 안에 숨기고 있다. 이때 고요는 고요하지 않고 오히려 반어적이기까지 하다. 한 고요가 다른 한 고요의 따귀를 때리는 장면과, 고갱과 고흐의 이별 장면이 겹치는 데서 시인은 이별은 그렇게 맨발로 오고라는 표현을 얻어내고 있다. 그리고 고흐를 환기하는 귀를 자르고/방아쇠/까마귀 나는 밀밭의 이미지군(群)이 연쇄적으로 등장하고, 결국은 캄캄한 사이프러스가 그 안에서 솟구치는 환각을 불러오게 된다. 그러니 고요는 더 이상 적막함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따귀를 때리고 맨발로 이별하고 귀를 자르고 방아쇠를 당기고 결국은 캄캄하게 솟구치는 생의 어떤 비밀스런 역동성이다. 그가 노래하고 있는 고요의 다성성(多聲性)과 중층성을 엿보게 해주는 가편(佳篇)이라 할 것이다.


결국 강현국 시인은 내 시는 그러니까 당신과 우리 사이, 유목과 농경 사이, 머물다와 살다 사이에 있다 있다기보다는 하염없이 부대낀다(경계 허물기)라고 말한다. 또한 내 시는 결국 세계의 그것을 훔친 것이고 사물의 그것을 약탈한 것이다(경계 허물기)라고 말한다. 비록 시 안의 화자의 언표라 하더라도, 이는 모두 강현국 시인의 경계인적 속성을 잘 말해주는 사례일 것이다.

등단 근 삼십 년에 자진해서(생래적으로) 주변인으로 서성거려 온 로맨티시스트(유홍준, 발문) 강현국 시인은 그렇게 고요의 맨발을 매만지면서 생의 본원적 형식인 격정슬픔을 오늘도 자신의 고독 속에 안아들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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