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현대 철학과 화쟁 사상 가로지르기
/이 도 흠
1. 머리말
한국 사상을 재조명할 때 필요한 작업이 현재적 맥락화와 보편성의 추구이다. 요즘 우리 사상이나 동양철학에서 21세기의 대안을 모색하려는 노력이 활발하다. 그러나 “동양 사상이 대안이다.”라는 주장에서 공허감을 느끼는 것은 그것이 ‘보편성과 오늘의 현실맥락을 배제한’ 당위적이고 선언적인 공리공론에 그치는 경향이 짙기 때문이다. 동양으로 돌아가자는 것이 동양의 전제정권으로 돌아가는 것이라면, 비합리적이고 야만적인 중세의 농업사회로 퇴행하고자 하는 것이라면 차라리 현재의 고통을 감내하는 것이 더 낫다. 현실, 우리가 디디고 있는 21세기 이 땅의 모순에 대한 비판과 대안에서 출발하지 않는다면 그것이 아무리 지극한 철학이라 하더라도 현재적 의미는 없다. 오늘날의 복잡해진 사회현실에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면 그것은 성현들의 현학적이고 신비적인 은유 놀이로 그칠 뿐이다.
더불어 우리의 것에 관한 논의가 세계적 보편성을 가지려면 서양 사상과도 대화를 하여야 한다. 필자는 하버마스가 왔을 때 “숙제 검사를 받는 학생”의 태도를 보여 준, 흔히 ‘서구이론의 수입오퍼상’으로 불리는 한국 지식인의 태도에 대해서 비판한 바 있다. 그러나 “우리 것이 좋은 것이여”식의 국수주의적 태도 또한 위험하다. 동양으로 돌아가자는 것이 동양식 전체주의나 봉건으로 돌아가자는 것은 아니며 ‘동일성에 바탕을 둔 우열과 배제의 논리’가 20세기의 야만을 낳은 동인이기 때문이다. 동양사상에 관한 논의가 ‘우물 안 개구리의 잔치’로 끝나지 않으려면 서양 철학과 많은 ‘대화’를 나누어야 하며 단순히 동양사상과 서양철학이 유사한 개념 몇몇을 등치(等値)시키는 데서 벗어나 ‘형이상학적 보편성’을 찾는 데로 나아가야 한다. 때문에 “동양사상에서 대안을 찾자”는 것은 동양사상의 위대성이나 ‘동일성’을 논하는 것이 아니라 ‘차이’란 관점에서 논의하여야 한다. ‘동일성’이 다른 것을 배척하는 것이라면 차이는 다른 것을 인정하면서 자기도 드러내는 것이다. 차이의 관점에서 동양사상을 논할 때 ‘형이상학적 보편성’을 찾을 수 있으며 궁극적으로는 양자를 회통(會通)시킬 수 있다.
탈현대(postmodernism) 철학은 입장에 따라 다양한 편차를 보인다. 크게 보아 현대성(modernity)의 철저한 부정이 강한 흐름인 가운데 이의 한계를 극복하고 현대성을 완성하고자 하는 사조도 강하며 양자를 절충한 입장도 있다. 이 논문에서 다루고자 하는 탈현대 철학의 범주는 현대성의 위기에 대한 성찰적 반성․비판과 함께 대안을 모색한 것으로 울타리를 치고자 한다. 즉 이성중심주의에서 이의 해체와 반성으로, 서구중심주의에서 탈식민주의로, 가부장주의에서 페미니즘으로, 과학기술만능주의에서 생태주의로, 이분법적 사유에서 퍼지식 사고로, 동일성의 사유에서 차이의 철학으로, 동일성의 읽기에서 다성성의 읽기로 지향한 것으로 한정하기로 한다. 이는 상당 부분 동양사상과 통하며 원효의 사상과 공유하는 부분 또한 지대하다. 이에 양자를 비교하여 공통점과 차이점을 드러내어 양자가 서로를 보완하도록 이끈다면, 21세기 인류가 진정으로 구원받을 새로운 패러다임의 길을 열 수 있을 것이다.
필자는 ?화쟁기호학, 이론과 실제?(한양대출판부)에서 원효의 텍스트로 원효의 텍스트를 읽는다는 전제 아래 ?대승기신론소(大乘起信論疏)? 등 원효의 정전(正典)만을 대상으로 분석하여 화쟁의 형이상학적 의미를 일곱 가지로 종합하였다. 논증의 전말과 원문은 이를 참고하기를 바라며 여기서는 이 글의 성격상 좀더 쉽고 간략하게 서술하기로 한다.1)
2. 현대성의 위기와 불일불이(不一不二)의 패러다임
“이항대립(binary opposition)적 사유에는 하나가 다른 것보다도 우위를 차지하고 지배하는 폭력적 계층질서가 존재한다.” 데리다는 이성중심주의에 바탕을 둔 서구의 형이상학은 정신/육체, 이성/광기, 주관/객관, 내면/외면, 본질/현상, 현존/표상, 진리/허위, 기의/기표, 확정/불확정, 말/글, 인간/자연, 남성/여성 등 이분법에 바탕을 둔 야만적 사유이자 전자에 우월성을 부여한 폭력적인 서열제도이며, 처음과 마지막에 “중심적 현존”을 가정하려고 하는 인간의 욕망에서 비롯한 것이라고 비판한다.
홍수를 막는 방법은 크게 보아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댐을 쌓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물이 흐르는 대로 물길을 터주는 것이다. 서구 사회는 인간과 자연을 이항대립으로 나누고 인간에게 우월권을 주었기에 전자의 방식을 택하였다. 댐을 쌓듯 인간 주체가 자연에 도전하여 자연을 개발하고 착취하는 것을 문명이라 하였고 이것으로 그들은 17세기 이후 전 세계를 지배하였다. 그러나 댐은 물의 흐름을 방해하여 물을 썩게 하고 결국 거기에 깃들여 사는 수많은 생물을 죽이고 심지어는 주변의 기후를 변화시키고 지진을 일으키기도 한다. 바로 이런 것들이 이항대립에 바탕을 둔 서구의 폭력적 패러다임이 낳은 현대성의 위기이다.
20세기 인류사회의 모순의 근저에는 이항대립의 야만이 숨어 있다. 실존주의든 현상학이든, 마르크시즘이건 서구의 현대 철학은 이항대립의 사유체계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변증법 또한 이항대립을 더욱 공고히 한 구조이다. 이항대립의 사유체계 속에서 주체는 객체를 마음껏 해석하거나 변형시키면서 단지 주체를 세우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시켰으며, 이성은 합리성의 이름으로 무지몽매함을 밝히는 대신 진리를 절대화하고 과학기술을 도구화하였고 감성과 욕망을 최대한으로 절제시키고 억압하였으며 스스로를 도구화하였다. 인간이 우위에 서서 그의 의지와 편리대로 마음껏 자연을 개발하는 것이 문명이었고, 제3세계는 문명인 서구에 의하여 교화되고 근대화하여야 하는 미개와 야만이었으며, 여성은 자연과 마찬가지로 남성에 의하여 끊임없이 개발되고 착취되어야 하는 대상이었다. 이런 사고의 소산으로 인류는 지금 전 지구 차원의 환경위기, 소외와 불안의 보편화와 심화, 구조적 갈등과 폭력의 강화, 따뜻한 공동체의 붕괴와 도덕적 타락, 위기의 일상화 등의 모순을 겪고 있다.
반면에 댐을 쌓는 것이 근대적, 서구적 패러다임에서 비롯된 대안이라면, 물길을 터서 물을 흐르게 하고 나무를 심는 것은 화쟁의 불일불이(不一不二)의 패러다임에서 비롯된 대안이다. 우리가 동강 댐을 놓느냐 마느냐로 시비할 때 미국 정부는 ‘미국의 강들’ (www. americanrivers. org)이라는 시민단체의 운동에 굴복하여 이미 지어진 댐을 수십 개나 파괴하였다. 그러자 물은 흐르면서 자신을 정화를 하면서 1, 2급수를 회복하였고 물고기와 새들이 돌아왔다. 사람들은 때로는 물살을 가르고 때로는 낚시를 던지고, 또 때로는 아름다운 강가에서 사랑도 나누고 사색을 하며 느리고 여백이 많은 삶을 다시 향유하게 되었다.
원효는 탈현대철학의 타자성의 사유와 통하는 불일불이(不一不二)의 패러다임을 제시한다. 원효는 ?금강삼매경론(金剛三昧經論)?에서 다음과 같이 씨와 열매의 비유로 이에 대해 설명한다.
“열매와 씨가 하나가 아니니 그 모양이 같지 않기 때문이요, 그러나 다르지도 않으니 씨를 떠나서는 열매가 없기 때문이다. 또 씨와 열매는 단절된 것도 아니니 열매가 이어져서 씨가 생기기 때문이요, 그러나 늘 같음도 아니니 열매가 생기면 씨는 없어지기 때문이다. 씨는 열매 속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니 열매일 때는 씨가 없기 때문이요, 열매는 씨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니 씨일 때는 열매가 없기 때문이다. 들어가지도 나오지도 않기 때문에 생(生)하는 것이 아니요, 늘 같지도 않고 끊어지지도 않기 때문에 멸(滅)하는 것이 아니다. 멸하지 않으므로 없다고 말할 수 없고, 생하지 않으므로 있다고 말할 수 없다. 두 변을 멀리 떠났으므로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다고 말할 수 없으며, 하나 가운데 해당하지 않으므로 있지도 않고 없지도 않다고 말할 수 없다.”(?금강삼매경론?)
화쟁의 일곱 가지 의미 가운데 하나인 불일불이는 차이를 통하여 공존을 모색하자는 사유체계다. 씨는 스스로는 무엇이라 말할 수 없으나 열매와의 “차이”를 통하여 의미를 갖는다. 씨와 열매는 별개의 사물이므로 하나가 아니다[不一]. 국광 씨에서는 국광사과를 맺고 홍옥 씨에서는 홍옥사과가 나오듯, 씨의 유전자가 열매의 거의 모든 성질을 결정하고 열매는 또 자신의 유전자를 씨에 남기니 양자가 둘도 아니다[不二]. 씨는 열매 없이 존재하지 못하므로 공(空)하고 열매 또한 씨 없이 존재하지 못하므로 이 또한 공하다. 그러나 씨가 죽어 싹이 돋고 줄기가 나고 가지가 자라 꽃이 피면 열매를 맺고, 열매는 스스로 존재하지 못하지만 땅에 떨어져 썩으면 씨를 낸다. 씨가 자신의 존재를 유지하고자 하면 씨는 썩어 없어지지만 씨가 자신을 공하다고 하여 자신을 흙에 던지면 그것은 싹과 잎과 열매로 변한다. 공(空)이 생멸변화(生滅變化)의 전제가 되는 것이다.
세계는 홀로는 존재한다고 할 수 없지만 자신을 공하다고 하여 타자를 존재하게 하는 것이다. 씨는 스스로 공하나 썩어 열매를 맺는 것처럼 이것이 없으니 저것이 있고 저것이 없으니 이것이 있다. 또 씨가 있어 열매를 맺고 열매가 있으니 씨가 나오는 것처럼 이것이 있으므로 해서 저것이 있고 저것이 있으므로 해서 이것이 있다. 열매일 때는 씨가 없으므로 씨는 열매 속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씨일 때는 열매가 없으니 열매는 씨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들어가지도 나오지도 않으므로 존재한다고 할 수 없고 늘 같지도 않고 끊어지지도 않으므로 없어지는 것도 아니다. 멸하지 않으므로 존재하지 않는다 할 수 없고 나지 않으므로 존재한다고 말할 수도 없다. 이중부정을 통해 공한 것이 공한 것이기에[空空] 오히려 존재를 긍정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화쟁의 패러다임을 가졌던 최치원은 홍수를 어떻게 막았을까? 1,100년 전 신라 진성왕(887년~896년) 때 경상도 함양의 태수로 부임한 고운 최치원은 홍수로 툭하면 넘치는 위천의 물길을 돌리고 이 숲을 조성하였다. 하림(下林)은 사라져버렸으나 지금도 폭 200―300미터, 길이 2킬로미터에 걸쳐 200년 된 갈참나무를 비롯하여 114종, 2만여 그루의 활엽수목이 원시림과 같은 깊은 숲을 이루고 있다.
댐은 물을 썩게 하고 생명들을 죽이지만 숲은 빗물을 품었다가 정화한 다음 서서히 내보낸다. 사람이 걸어다녀 다져진 토양은 시간당 10밀리의 비를 품는 반면에 잘 가꾼 숲은 시간당 200밀리 이상의 강우를 가둔다. 고운 최치원은 왜 활엽수를 심었을까? 임업연구원이 광릉수목원에서 실험하였더니 활엽수 천연림은 사방공사를 한 침엽수와 활엽수가 섞인 숲에 비하여 우기에는 헥타아르 당 28.4톤의 물을 머금고 반대로 건기에는 2.5톤의 물을 더 흘려보내는 것으로 밝혀졌다. 고인 물은 썩지만, 흐르는 물은 산소를 머금고 이온 작용으로 자연 정화를 하며 온갖 생명들을 품는다.
이처럼 화쟁은 우열이 아니라 차이를 통하여 자신을 드러내고, 투쟁과 모순이 아니라 자신을 소멸시켜 타자를 이루게 하는 상생의 사유체계이다. 서구의 이항대립의 철학이 댐을 쌓아 물과 생명을 죽이는 원리를 이룬다면, 화쟁의 불일불이는 그 댐을 부수고 물이 흐르는 대로 흐르며 물은 나무를 살게 하고 나무는 물을 품는 원리이다. 화쟁의 불일불이는 이항대립적 사고, 우열과 동일성을 해체한다는 점에서는 데리다의 철학과 통하나 데리다는 해체는 하되 대안은 약한데 화쟁은 차이와 상생을 결합한 사유체계이다. 그리 나를 소멸시켜 상대방을 이루려 하는 것이 참사랑이요 화쟁의 불일불이이다.
3. 퍼지식 사고와 순이불순(順而不順)
서양은 아리스토텔레스 시대이래 ‘A or not―A’의 논리를 추구하였다. A가 아니면 나머지는 A가 아닌 것이어야 한다. 동일한 사물이 동일한 사물과 동시에 동일한 점에 속하면서 또한 속하지 않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즉 A이면서 A가 아니기도 하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것이 바로 이분법적 모순율이다. 서구의 거의 모든 철학과 예술은 이분법적 모순율을 인정하는 가운데 전개되었다. 이데아는 이데아이고 그림자는 그림자였고 주체는 주체요 대상은 대상이었지, 이데아인 동시에 그림자요 주체인 동시에 대상은 있을 수 없는 것이었다.
하지만 실제 세계는 ‘A and not―A’이다. 사람들을 모아 놓고 자기 아내를 사랑하는가, 사랑하지 않는가에 대한 질문을 하면 답은 정확히 ‘Yes or No'로 갈리지 않는다. 물론 상당수가 손을 들었고 그에 못지 않은 사람들이 손을 들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손을 들다가 만 사람, 손을 반쯤 들다 내린 사람이 꽤 존재할 것이다. 이들은 자신의 아내를 사랑하면서 동시에 사랑하지 않는 자들이다. 사랑한다고 답한 이들도 100% 절대적으로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사랑하는 마음도 싫어하는 마음도 있지만 사랑하는 마음이 더 강하기에 사랑한다는 쪽에 손을 든 것이다. 싫어한다고 손을 든 이도 마찬가지이다. 이렇게 실제 세계는 A가 아니면 not―A인 것이 아니다. 퍼지이다.
불교는 이항대립식의 분별심을 떠나 퍼지식으로 사고하려 한다. 따라서 불법의 논리는 “色卽是空 空卽是色, 一卽多 多卽一, 相卽相入, 無二而不守一, 不一而不二, 順而不順”에서 보듯 역설과 모순어법을 취하고 있다. 원효 또한 순이불순이란 방편을 통하여 진여실체에 이를 것을 역설한다.
“만일 각기 다른 견해로 쟁론이 일어날 때”란, 有라는 견해에 동조하여 설법하면 空이라는 견해와는 맞서며, 만일 空이라는 집착에 동조하여 설법하면 이것은 有라는 집착에 맞서는 것이니, 동조건 반대건 더욱 다툼만 조장하게 되는 것이다. 또 저 두 견해에 다 동조하면 그 안에서 스스로 모순을 일으켜 다투게 될 것이요, 만일 저 두 견해에 다 반대하면 그 두 견해와 다투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동조도 말고 반대도 말고 설법하라는 것이다. 동조하지 않는다는 것은 그 말대로 해석하자면 모두 다 허용하지 않는 것이요, 반대하지 않는다는 것을 뜻을 따라 말한다면 허용하지 않는 바가 없다는 것이다. 반대하지 않기 때문에 그 情에 어긋나지 않고, 동조하지 않기 때문에 도리에 어긋나지도 않는다. 정에 대해서나 도리에 대해서나 서로 어긋나지 않는 까닭에 ‘진여에 상응하는 설법을 한다는 것이다.(?금강삼매경론?)
글을 읽고 있는 지금은 낮인가, 밤인가? 태양이 작열하는 벌건 대낮 해변가를 거닐면서 옆의 사람에게 지금 낮인가, 밤인가 물으면 백이면 백, 낮이라고 답할 것이다. 통상 밝으면 낮, 어두우면 밤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낮은 12시에서 0.00001초도 모자라지도 남지도 않는 찰나에 스쳐간다. 정오에서 0.001초라도 지났으면 벌써 그만큼 밤이 진행된 것이며, 반대로 0.001초라도 모자랐다면 그만큼 낮이 덜 진행된 것이다. 밤도 또한 마찬가지이다. 그러니 어느 것을 분별하여 둘로 나누는 것은 두 극단을 취할 때나 가능한 것이다. 지금은 낮에서 밤으로 가는 과정이다.
이원론적 사고는 이것은 진리요 저것은 허위라 구분한다. 그러나 절대 진리도, 절대 허위도 없다. 정도의 문제이지 흑백의 문제는 아니다. 그러니 그것을 100% 진리라 하면 그것에 담긴 허위를 보지 못한다. 반대로 1%도 안 되는 허위를 근거로 전체를 진리가 아니라 하면 99%의 진리를 버리게 된다. 모든 사람이 허위라 하는 것에도 일말의 진리가 담겨 있고 모두가 진리라고 하는 것에도 한 자락의 허위를 담고 있다. 그런데 각기 다른 견해로 맞설 때, 한 의견이 진리라는 이유로 이에 전적으로 동조하면 반대되는 의견에 담겨 있는 진리를 잃게 된다. 또 한 의견이 허위라는 이유로 이에 전적으로 반대하면 반대되는 의견에 담겨 있는 허위를 보지 못하게 된다. 또 두 견해를 모두 옳다고 하면 두 견해가 스스로 모순을 일으켜 다투며 두 견해에 있는 허위를 들여다보지 못하게 된다. 반대로 두 견해가 모두 그르다고 하면 그 두 견해와 다투게 됨은 물론 두 견해에 담겨 있는 진리를 보지 못하게 된다. 그러니 올바로 진리를 전달하는 방법은 동조도 하지 않고 반대도 하지 않는 것이다. 전적으로 동조하지 않으므로 그 견해에 담겨있는 허위를 받아들이지 않게 되고 반대하지 않으므로 그 견해에 담겨있는 진리를 잃지도 않는다. 반대하지 않으므로 그 견해에 담긴 근본 취지와 목적을 어기는 것이 아니고 동조하지 않으므로 그 견해의 허위를 솎아내고 그에 담긴 도리를 제대로 받아들여 견해의 근본 뜻에 어긋나지 않는 것이다. 그러니 순이불순(順而不順)의 논법은 진정한 진리에 이르는 방편인 것이다.
사람도 마찬가지이다. 어느 사람을 무조건 선하다고 하면 그의 악을 보지 못하며 무조건 악하다고 하면 그의 마음속에 있는 선을 보지 못한다. 모든 이들이 불성(佛性)을 지니고 있음을 전제하고 모든 이들을 부처님과 같이 존귀한 존재로 다룰 때 자비행은 피어난다. 그렇다고 그들에게 남아있는 무명과 악을 보지 못한다면 이를 소멸시키고 그들 속에 잠재한 부처님을 드러낼 수 없다.
4. 차이의 철학과 변동어이(辨同於異)
데카르트가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고 외친 이후 서양 철학은 오랜 동안 주체중심적 사고를 하였다. 내가 어떤 동일성을 가져 나라고 하면 나는 언제나 그 동일성을 가지는가? 내가 대상이나 타자와 만날 때 나는 그 대상이나 타자와 대립적인 위상에 놓이는가? 동일성은 타자와 나를 구분하고 대립시키는 데서 비롯되기에 필연적으로 타자에 대한 배제와 폭력의 담론을 형성한다.
20세기는 배제의 담론이 지배한 역사였다. 폴 포트(Pol Pot)를 만난 이들은 그가 아주 온화하고 지적이며 상대방을 설득하는 능력이 뛰어나면서도 겸손하고 과묵하며 따스한 성품을 가진 사람이라고 한다. 그런데 그가 어떻게 캄보디아 인구의 1/4에 달하는 170만 명을 킬링필드로 보냈을까? 그의 뜻만큼은 숭고하였다. 캄보디아 농촌을 보고서 그는 캄보디아 전체를 농촌처럼 서로 사랑하고 연대하며 순박한 인심을 가진 공동체로 만들고 싶었다. 그러나 그는 도시와 시장, 학교를 없애버리고 안경을 낀 사람도 ‘도시스러움’을 갖고 있다고 처형할 정도로 ‘도시적인 것’을 철저히 배제하고서 절대 순수한 농촌공동체를 건설하고자 하였다.
나치즘의 유대인 대학살과 일본군의 난징 대학살, 스탈린주의와 수용소군도, 미군의 미라이 대학살, 유고의 인종 청소 모두 “너는 우리편이 아니다.”라는 배제의 담론의 소산이다. 임산부의 배를 갈라 태아를 불 속에 던져버린 일본 군인들이 악마의 화신이었을까? 아니다. 그들도 소설을 읽고 엉엉 울어버리고 첫사랑에 온밤을 설렘으로 지새우고 키우던 강아지의 죽음에 눈물을 훔치던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었다. 다만 “저들은 우리편이 아니야. 남이야. 저들이 사라져야 우리가 행복해.”라는 식의 배제의 담론이 그들을 그렇게 악마로 바꾸어버렸던 것이다.
나는 언제 어디서나 같은 모습을 가지며, 나는 나를 명료하게 드러낼 수 있는가? 어떤 사람이 보통 땐 멀쩡한데 새 중에서도 작은 새인 참새만 나타나면 벌벌 떨며 소리를 질러댔다. 그의 정신을 분석하였더니 젊은 날 ‘참새’라는 별명을 가진 경찰관에 혼수상태가 되도록 맞았던 경험이 있었다. 이성을 가진 나는 그를 잊었지만 무의식의 나는 그를 별명으로 대치시켜 기억하였던 것이다. 이처럼 나는 이성으로 설명할 수 없는 행동을 하기도 한다. 나의 안에 리비도가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내 안에서 리비도를 분출하려는 ‘거시기’[id]와 이를 통제하려는 자아[ego]와 승화시키려는 초자아[super―ego]가 서로 팽팽히 줄다리기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리비도를 억압하고 이성을 내세우기도 하지만 욕망의 포로가 되기도 한다.
라캉은 서양을 지배해 온 주체중심, 동일성의 사유를 비판한다. 욕망은 어디로부터 기원하는가? 이는 어머니로부터 떨어져 나온 결핍에서 비롯된다. 18개월 이전의 아기는 상상계(imaginary stage)에 머문다. 그는 이미지에 속박된다. 젖을 빨면서 어머니와 자기가 하나라고 생각한다. 자신과 외계, 주체와 객체간에 뚜렷한 구별이 불가능하다. 18개월이 지나면서 아기는 거울의 단계(mirror stage)로 진입한다. 아기는 거울에 비추어진 자기 모습을 보고 자기가 어머니와 다른 몸을 가진 주체라고 비로소 생각한다. 거울 속에 비친 대상이 나를 형성하는 것이다. 아이는 조각난 몸의 고뇌에서 하나의 전체성으로 자신을 통일시킨다. 어머니의 한 조각으로 알고 있던 아이는 처음으로 자신을 일관되고 자기 통제가 가능한 총체로 상상할 수 있게 되는 시기이다. 아기는 거울 속의 자기를 보면서 내면세계와 주위세계와의 관계를 정립하여 자기 동일화를 이룬다. 이 아기는 곧 ‘아버지의 이름 (the―name―of―the―father)’을 받아들이면서 사회화하는 상징의 단계(symbolic stage)로 진입한다. 언어와 상징을 수용하여 이제 말을 시작한다. 인간은 욕망을 억압하고 언어기호와 도덕, 윤리를 수용하면서 주체를 형성하는 것이다. 언어는 화자 개인을 초월하는 사회문화적 상징체계이므로 무의식은 자아로부터 독립된 질서와 체계를 갖는 큰 타자의 담론이다. 그러기에 무의식은 큰 타자(아버지의 이름, 법, 기표)의 담론이며 타자는 다른 장소에서 나타난 주체의 다른 모습이다. 라캉은 이를 “나는 내가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내가 생각하지 않는 곳에서 존재한다.”2)라고 한마디로 압축하여 주체중심주의의 사유에 있었던 현대 철학자들에게 외친다. 그러니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데카르트의 명제, 이에 기반을 두고 발전시켜 온 서구의 현대 철학은 전복된다. 나는 타자가 내재화한 것이며 타자는 다른 장소에 나타난 나의 다른 모습이다.
데리다는 이를 형이상학적으로 발전시켜 동일성에 바탕을 둔 서구 철학을 비판한다. “恣意性(arbitrariness)은 기호의 체계의 충만함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구성요소들 사이의 차이에 의하여 구성될 때만 일어나는 것이다.3) 의미작용은 낱말이나 사물의 충만한 본질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타자와의 차이, 구조 속의 차이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동일성은 하나의 다른 것이 또 다른 것으로, 대립의 한 용어가 다른 용어로 옮겨가는, 전복되고 모호한 통로에 불과한 차연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가 동일하다고 믿은 것은 차연 속의 타자이며, 타자 속의 차연에 불과하다. “같은 것은 다른 것의 다른 것이고, 다른 것은 자기와 같은 것이다.……타자는 절대적으로 자아일 때만, 즉 어떤 면에서 나와 동일자일 때만 다른 것이다4) ‘현존의 순간’이란 실제로는 不在와의 차이적 관계(differential relation)에 의해 산출된다. 진리의 기반은 훗설의 체계 내에서 비진리의 영역으로 배제시키려 했던 것에 의해 구조화한다. ……현존은 오직 동일성 내부의 다른 것, 즉 異他性(alterity)에 의존함으로써만 스스로 존재한다.5)
이렇듯 탈현대의 철학은 동일성을 차이로 전복시킨다. 차이가 동일성에 선행하며 형이상학이 근원으로 내세우는 동일성은 차이작용의 결과로서 생산될 뿐이다. “동일성이란 본질적인 차이와 특수한 역사적 ‘분할(segmentation)’을 초월하는 일반적 범주―그 자체로 차이의 동일화(an identification of difference)―로 관념화할 수 있는 것인데, 사회적 관계는 결코 이런 동일성―개인―으로 환원할 수 없는 타자성을 구성한다.…단순히 한 “사물”처럼 보이는 것이 사실은 하나의 “관계”라고 말하는 것은, 異他性이 동일성에 선행하며 이를 생산한다라고 말하는 것이다.”6) ‘나무’의 본질과 속성은 나무 안에 없으며 나무는 풀과 차이를 통하여 자신을 드러낸다. 나무를 목질의 줄기를 가진 다년생의 식물이라 말할 수 있는 것은 ‘풀’이란 타자와의 관계와 차이로부터 생산된다. 그럼 원효에게도 동일성의 폭력을 극복하는 철학, 차이의 철학이 있을까?
원효는 8세기경에 연기(緣起)와 공(空)의 철학을 바탕으로 차이의 철학을 논한다.
“같다는 것은 다름에서 같음을 분별한 것이요, 다르다는 것은 같음에서 다름을 밝힌 것이다. 같음에서 다름을 밝힌다 하지만 그것은 같음을 나누어 다름을 만드는 것이 아니요, 다름에서 같음을 분별한다. 하지만 그것은 다름을 녹여 없애고 같음을 만드는 것이 아니다. 이로 말미암아 같음은 다름을 없애버린 것이 아니기 때문에 바로 같음이라고 말할 수도 없고, 다름은 같음을 나눈 것이 아니기에 이를 다른 것이라고 말할 수 없다. 단지 다르다고만 말할 수가 없기 때문에 이것들이 같다고 말할 수 있고 같다고만 말할 수가 없기 때문에 이것들이 다르다고 말할 수 있을 뿐이다. 말하는 것과 말하지 않는 것에는 둘도 없고 別도 없는 것이다..”(?금강삼매경론?)
원효의 말대로 동일성이란 것은 타자성에서 동일성을 갖는 것을 분별한 것이요, 타자성이란 것은 동일성에서 다름을 밝힌 것이다. 동일성은 타자를 파괴하고 자신을 세우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바로 동일성이라고 말할 수도 없고, 타자성은 동일성을 해체하여 이룬 것이 아니기에 이를 타자라고 말할 수 없다. 主와 客, 현상과 본질은 세계의 다른 두 측면이 아니라 본래 하나이며 차이와 관계를 통하여 드러난다. 주체에는 이미 타자가 들어와 있고 타자 또한 주체를 형성한다. 화쟁은 주와 객, 주체와 타자를 대립시키지도 분별시키지도 않는다. 양자를 융합하되 하나로 만들지도 않는다. 어느 한 편에 치우치지 않으면서 중간도 아니다. 주와 객, 주체와 타자가 서로를 비춰주어 서로를 드러내므로 스스로의 본질은 없고 다른 것을 통하여 자신을 드러낸다. 진리란 것은 진리가 아닌 것과 차이를 통하여 진리를 드러내고 진리가 아닌 것은 진리와 차이를 통하여 진리가 아니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원효의 변동어이(辨同於異)는 차이의 철학과 통한다. 차이의 철학이 이타성(異他性)을 동일성에 선행하는 것으로 밝혀 놓는 데 그치고 있다면, 원효의 철학은 진속불이(眞俗不二)를 통하여 이타성(異他性)이 이타성(利他性)으로 전화할 수 있는 근거를 당위적이 아니라 필연적인 것으로 제시한다.
20세기를 통하여 인류는 이성이 도구화하여 또 다른 양상의 억압을 확대하고 이항대립이 폭력적 서열제도를 만들며 동일성의 사유가 타자를 배제한 야만을 고통스럽게 체험하였다. 서양 철학자들은 모더니티의 위기에 대한 성찰과 반성을 통하여 새로운 철학과 패러다임을 모색하고 있다. 앞 장에서 논하였듯, 원효의 화쟁 사상은 이와 통하면서도 이들의 사유를 넘어서서 새로운 패러다임의 지평을 열고 있다. 이것이 원효 철학이 혼돈과 위기의 21세기에 갖는 의미이자 가능성이다.
5. 진리는 역사 안에서 진리이다―맺음말을 겸하여
인간이 진리의 실체에 이를 수 없다면 인간은 무엇 때문에 살까? 허상을 실체로 착각하여 이데아를 추구한 데리다 이전의 후설, 하이데거, 사르트르, 마르크스 등은 모두 일거에 쓸어버려야 할 사상들인가?
삶의 목적은 완성에 이르는 것이 아니라 그를 향하여 나아가는 데 있다. 원자의 실체에 이를 수 없지만 연구를 진행시킬수록 우리가 점점 더 실체에 다가가는 것은 사실이다. 진리는 역사 안에서 진리이다. 모든 것이 상대적이고, 차이를 통하여 드러나기 때문에 아무 것도 확정할 수 없다면, 진리란 끝내 알 수 없는 것이라면, “지금 여기에서” 히틀러, 스탈린, 전체주의 등 악으로 규정되고 있는 것을 비판하고 저항할 수 있는 근거와 지표는 어디에서 오는가? 우리는 과연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이글턴은 “우리는 해체의 미궁 속으로 일단 들어가기만 하면 회의주의적 인식론에 빠지고 만다.”라며 포스트모더니즘의 불확실성에 대해서 비판한다.
그럼 대안은 무엇일까? 달의 의미는 “엄마얼굴, 조화, 쪽배, 관음보살……” 등으로 끊임없이 이어진다. 버스를 타고 지나면서 간판에서 ‘달’이라는 낱말을 발견하고 그 의미를 확정할 수 없다며 계속 물음표로 놓아두어야 하는가? 답은 지금 마주친 현실에서 그 가운데 몇몇으로 울타리를 치는 일이다. “언어를 우리가 행하는 것으로서, 우리의 실천적인 삶의 형식들과 뗄 수 없이 얽혀있는 것으로서 생각한다면, 의미를 ‘정할 수’ 있고 ‘진리’, ‘현실’, ‘지식’, ‘확실성’ 같은 단어들은 그 힘을 상당히 회복하게 된다.” 원자의 실체에 영원히 다다를 수 없지만 지금의 연구보다 더 실체에 다가간 연구를 21세기 오늘 새로운 과학이라고, 그렇지 않은 것을 허위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인간이 장대높이뛰기로 달에 이를 수 없다고 포기할 것이 아니다. 세계신기록을 넘어서서 높은 하늘에 이르는 자가 그 기록을 다시 깨는 자가 나타날 때까지는 가장 달에 다가간 사람이다. 나무가 풀과의 ‘차이’를 통하여 “목질의 줄기를 가진 다년생의 식물”이란 의미를 갖지만 지금 내게 저 나무가 그토록 소중한 것은 그 나무에서 어떤 스님의 설법을 듣고 깨우쳤다는 ‘역사’가 스미어 있기 때문이다. 차이와 역사, 공시성과 통시성, 주체와 구조는 둘이 아니라 하나인 것이다.
이성과 언어 저 너머에 진리가 있는 것이 확실하지만, 이성의 도구화에 대하여 증오하지만 우리가 발을 디디고 있는 땅은 멀쩡한 다리와 백화점이 무너질 정도로 비합리적이기에 우리는 이성을 가지고 그를 바라보고 대응을 취한다. 유토피아가 환상임에 불과하지만 그것이 있어야 우리는 현재를 바라보고 어둠 속에서 길을 찾을 수 있기에 별을 따라 길을 가는 나그네처럼 그를 고대한다. 하버마스의 말대로 합리성이 있어야 유토피아를 실현할 수 있기에 이성을 가지고 유토피아에 비추어 현실을 비판하고 그를 향하여 한 발 두 발 나아간다. 달에 이를 수 없는 것을 뻔히 알지만 장대높이뛰기 선수들은 오늘도 장대를 들고 더 높이 나는 비상을 꿈꾼다. 저 언덕 너머에 진리가 있음을 알고도 ‘지금 여기에서’ 물살에 휩쓸리고 있는 중생을 태우기 위하여 뗏목을 돌린다. 그를 일러 감히 진리라 한다. 욕망은 신기루, 우주 삼라만상은 쉬바신이 빚어놓은 환상, 진리가 허상이지만 그에 이르지 못하기에 나는 그를 향하여 나아간다. 기다리는 것이 정녕 오지 않기에 기다리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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