老年日記67 - 가계부와 아내/담채
아내는 사십 년 넘게 하루도 빠짐없이
가계부를 써왔다
앓아눕기라도 하는 날에는 굼벵이처럼 누운 채로
몸을 굴려 허드레 종이에 적어두었다가
부스스 털고 일어나서는 마치 내 죄목을
꺼내 적듯 조목조목 적어나갔다
가계부 안에는 날마다 알 수 없는 바람이 일고
어둡고 긴 골짜기를 지나 바다로 갈 시냇물이 살고 있었다
아내는 날마다 그 골짜기로 가서
혼자 떠도는 행성처럼 쓸쓸한 언어들을 밤마다 적어 넣었다
내일이 두려워 적히지 못한 숫자들은 목구멍에 걸려
따끔거렸으리라
늘 직선으로 한 궤도를 오가던 아내가
이미 지나간 시간을 되새기고 싶지 않은
자정 가까운 시각
동굴 같은 눈을 열고 가계부를 쓴다
마치 다음 생으로 가져갈 목록을 정리하는 듯
콩나물 한 주먹과
종일 팔리지 않던 노점상 과일과
깜빡 졸다가 태워버린 꽁치 토막과
방점이 찍힌 우거지 냄새 하나까지 차례로 적어 넣는다
울음 끝에 매달린 쓸쓸한 언어들이 숨소리 하나 없이
우주를 유영하는 밤
언젠가는 바다로 가야 할 숫자들이
남아 있는 길의 거리를 재고 있는지
달 꽃 환하다
note
연대기를 알 수 없는 검은 책이다.
먼 시간을 집대성한 페이지를 넘기면 불탄 시간의 발자국이 떠도는
바람의 유적지, 막다른 길에서 삶은 일어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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