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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장글, 詩作 note

存在로서의 生命

by 담채淡彩 2022. 9. 29.

 

存在로서의 生命/

 

 

살아 있는 모든 것에 본시부터 생명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생명의 가장 원초적 단계로 볼 수 있는 것은 Virus라고 하는 극히 미세한 생명체인데 이것은 자기복제능력이 있는 DNA를 포함한 단백질과 지방의 복합체라고 할 수 있다.

 

생물과 무생물의 차별점이 자기복제능력의 유무라고 한다면 이 Virus는 스스로는 번식능력이 없고 숙주(宿主)인 다른 세포 속으로 들어가야만 비로소 자기복제를 시작할 수가 있는 것이다.

 

지구상에 가장 먼저 생겨난 생물체, 즉 생명의 기원은 아마도 갖가지 원소로 구성된 화학물질의 덩어리가 어떤 계기에 의해서, 예를 들어 부싯돌이 부딪혀서 불꽃을 내듯이, 이런 Virus와 같은 자기 복제능력을 가진 단백질, 즉 최초의 생물이 되었을 것이라고 여러 과학자들이 추정하고 있다.

 

어떻게 단순한 무기화합물의 덩어리가 복제능력을 가진 생물로 진화할 수 있겠는가 하는 의문이 없을 수 없겠지만 30억년동안 수많은 혜성의 충돌, 고열과 빙하기의 반복, 화산 폭발과 벼락같은 변화를 반복해온 지구의 역사로 볼 때, 그러한 우연의 확률을 전혀 배제할 수는 없다.

 

그러나 고도로 발달한 현대의 과학기술로서도 아직은 무기물로부터 단백질을 화학적으로 합성해 낼 수 없음도 또한 사실이다.

 

온전한 생명체라기에는 좀 부족하고 일종의 생명의 파편(破片)이라 할 수 있는 이 Virus같은 자기복제능력을 가진 단백질의 덩어리가 진화하여 현존하는 지구상 모든 생명의 종들의 기원이 된다는 것이다.

 

생명의 기원이야 어떻든지 간에 생물, 그 자체는 기초 구성이 수소, 탄소, 질소 등 수많은 무기 원소로 이루어져 있으며 생명이 끊어지는 순간부터 어떤 순서를 거치든, 기초 구성 원소로 회귀하게 되어 있는 것이다.

 

어떤 생물이라도 태어나서 죽음을 피할 수 없으며 이 과정은 무기원소가 오묘한 조화를 일으켜서 생명을 이루었다가 다시 무기원소로 회귀하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한조각 구름이 모였다가 흩어지듯 생명이란 그렇게 생겼다가 덧없이 사라지는 것이다.

 

그렇게 생겼다가 사라지는 생명이건만 살아있는 동안 모든 생물이 살아가기 위하여 기울이는 노력, 이른 바 생존욕구는 그야말로 눈물겹다.

 

눈물겨운 생존경쟁을 벌이면서도 자기와 닮은 또 다른 생명체 즉 자기 복제품인 자손을 지구상에 남기기 위하여 기울이는 노력 또한 눈물겹다 아니할 수 없다.

 

인간의 아니 무릇 모든 생물의 기초 본능인 식욕과 성욕은 결국 이러한 자기 생명의 연장과 자기복제물의 재생산 욕구에 기초하는 것이다.

 

식물이라고 해서 식욕과 성욕이 없는 것이 아니다.

땅 속 영양분을 찾기 위하여 뻗어 나가는 뿌리의 끈질김과 햇볕을 더 받아들이기 위한 잎사귀의 애처로운 향일성(向日性)을 보라.

씨앗을 품기 위하여 벌, 나비를 불러들이는 꽃들의 요염함은 보라.

이들 또한 식욕과 성욕의 또 다른 표현에 다름 아니다.

 

그래서 쇼펜하우어라는 염세주의 철학자는 인간이 살아가는 것은 다만 ‘종족보존본능’일 뿐이라고 설파하기도 하였다.

최근에 유전자와 DNA의 구조 등이 밝혀지면서 어떤 생물학자는 모든 생물은 다만 유전자가 살아가기 위한 도구일 뿐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정신분석학자들은 인간이 느끼는 고차원적인 문화나 예술에 대한 추구, 자기성취에 이르는 명예욕 따위의 감정도 상대 이성(異性)의 관심을 끌기 위한 성욕의 또 다른 표현이라고 말하고 있다.

인간, 아니 모든 생물이 살아간다는 것의 본질이 이렇다.

 

무슨 거창하고 고상한 이론이나 훌륭한 목적을 내세우더라도 그 본질은 다만 스스로의 생명을 연장하고 자신의 유전자를 대대로 보존해 내려간다는 것에 다름이 아니며 유한한 생명이 끝나는 때부터 생명체를 이루던 본질은 다시 무기원소의 상태로 돌아가는 것이다.

 

신의 존재를 믿지 않는 나로서도 참으로 믿기 싫은 유물론적(唯物論的) 생물관(生物觀)이다.

살아간다는 것이 실로 어이없이 허무한 일인 것이다.

 

그래서 쇼펜하우어는 말한다.

이렇게 허무한 삶에서 초탈(超脫)하는 길은 다만 자살할 수밖에 없는 것이라고-그러면서도 그 자신은 누가 자기를 해칠까 염려해서 머리맡에 늘 권총을 놓아두고서야 잠들 수 있었다는 일화도 있다.

 

아무래도 이번 주제는 내가 다루기에는 너무 벅찬 것 같다.

그냥 반야심경(般若心經)의 끝 부분으로 마무리하자.

열반한다는 것, 또는 성불(成佛)한다는 것은 윤회하는 삶의 고리에서 벗어나는 길이라고 들은 적이 있다.

 

오, 사라푸트라여,

여기에서 보면 일체의 법이

공(空)이라는 특징을 갖고 있느니라.

 

그것들은 생겨나지도 않고 멸하지도 않으며,

더럽지도 않고 청정하지도 않으며,

부족하지도 완전하지도 않느니라.

 

이 반야바라밀다는

일체의 괴로움을 없애 주나니,

진리 안에서 무엇이 잘못될 수 있겠는가?

 

반야바라밀다에 의해

이 진언은 다음과 같이 설해졌다.

갔다, 갔다,

저 너머로 갔도다.

가떼 가떼 파라가떼 파라삼가떼 보디 스바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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