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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장글, 詩作 note

神과 나눈 이야기 6 - Neale Donald Walsh*

by 담채淡彩 2022. 9. 26.

神과 나눈 이야기 6 - Neale Donald Walsh

 

사후에 대하여

죽음 이후, 사후에는, 자기가 지금까지 어떤 존재였는지,

그 모든 것을 훤히 볼 수 있다.

​그때는 “그게 우리의 깨달음에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재의 지금 이 순간에는 그렇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말하는 저승이나 내세에서 사후에 “어떠한 심판이나

처벌도 존재하지 않는다”. 심판하기를 좋아하는 것은

“인간들” 뿐이다.

심지어 스스로도 자신을 심판하지 않는다.

이것을 우리가 받으들이기를 거부하는 “위대한 진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이곳에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했던 모든 것들을 다시 돌아보고 우리가 말하는 ‘자신’과

​‘되고자 하는 자신’에 근거하여, 만일 뭔가를 달리 선택할

것이 있다면 ​다시 선택할 “기회”는 (종교에서는 ‘업장’ 혹은

​‘Karma’라고도 함) 주어지게 된다.

 

“현생 이후” 우리 삶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지금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을 만큼

경이롭다. 그 체험은 다른 차원의 체험이다.

어떠한 고통이나 두려움, 심판이 없이 단지 “자신의 지난

생을 다시 조명할 기회‘를 가지며, 우리는 그것을 통해

이곳에서의 체험을 ​어떻게 느끼고, 그 다음에 어디로

가고 싶은지 판단하게 되는 것이다.

 

현재의 우리중 상당수가 현재 수준에서 자신에 관해 내리는

결정과 선택들을 “체험”할 또 한번의 기회를 갖기 위해

이 고밀도의 “상대계로 다시 돌아오기를 결정”할 것이다.

 

아울러 “선택받은 소수”인 다른 이들도 “다른 사명”을 갖고

이 세상에 돌아올 것이다.

그들은 밀도와 물질 속에서 남들을 건져내려는 ‘영적인

목적’을 갖고 밀도와 물질의 이 세상으로 돌아오며,

이 지상에는 우리 중에 늘 그런 식으로 선택한 사람들이

존재한다.

 

우리는 그들을 금방 알아볼 수 있다.

그들은 오로지 “남들을 도우려는 목적” 하나로 지상으로

돌아온다. 이것이야말로 그들의 기쁨이요, 열광이다.

그들은 “봉사”하는 것 이외는 어떤 것도 추구하지 않는다.

우리는 그런 사람들을 놓칠래야 놓칠 수 없다.

그들은 어디에나 있고, 그들의 숫자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다. 우리가 그런 사람에 대한 소문을

들을 기회는 항상 존재한다. ​

그런 사람은 누구에게도 묻지 않는다.

그들에게는 물을 게 없다.

 

한번의 생으로 진리를 누구에게 전하는 역할을 하는 것은

대단한 것이며 큰 기쁨이다.

‘더 나아지려는 것’은 “신성한 본성”이므로 항상 ‘추구하라’,

무슨 수를 쓰더라도 추구하라. 계속 앞으로 나아가면서

우리가 자신이 진실로 좋아하는 일을 하도록 하라.

 

몸이 하는 일을 삶이라고 주장한다면, 우리는 무엇 때문에

이곳에 왔는지 이해하지 못한다.

적어도 나를 기쁘게 해 줄 일, “자신이 누구인지” 말해줄

일을 하라. ‘생계를 위해 좋아하지 않는 일’에 시간을

낭비하지 말라. 그건 “삶”이라 할 수 없다.

 

그건 사는 것이 아니라 “죽어가는 것‘이다!

우리는 ‘딸린 식구, 먹여야 할 어린 것들, 나만 보며 사는

아내’ 등을 생각하여 좋아하지 않는 일을 한다면

“삶을 낭비하는 것”이다.

 

“자신이 꼭 해야 하는 일이란 건 없다”

자식이 있건 없건, 배우자가 있건 없건 간에 누구나

“기쁨을 누릴 권리”가 있다.

그것을 “추구”하고 그것을 “찾아내라”.

그러면 내 가족들은 우리가 돈을 벌건 못벌건 간에 상관없이

“기쁨에 찬 가족”이 될 것이다. 만일 그들이 기뻐하지 않고

일어나 나의 곁을 떠나려 한다면, 그들 나름의 기쁨을

찾을 수 있게 “사랑으로” 그들을 떠나 보내라.

그러나 자신이 어떤 희생도 마다하지 않고, 심지어 자신의

행복까지 희생하면서 가족을 부양하는 家長이 바로

‘자신’이라면, “내 자신이 하는 일을 사랑하도록 하라!”

​그렇게 하는 것이 자신이 창조하는 자기 자신을 생생하게

진술할 수 있게 해주기 때문이다.

 

자신에게 책임이 주어졌을 때, 그 책임을 다하기 위해

자기가 싫어하는 일이라도 열심히 하는 사람이 바로

‘자신’이라면 “그 일을 사랑하고 사랑하고, 또 사랑하라.”

그렇게 하는 게 자기 자아 이미지, 개념을 전폭 뒷받침

해 줄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 “몸이 하는 일”이 하찮은 것은 아니다.

그것들은 “중요”하다. 그러나 우리가 생각하는 식의

그런 것은 아니다. ‘몸의 활동’은 어떤 존재상태에

이르고자 시도한다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어떤 존재상태를 반영한다”는 의미에서 중요하다.

 

만사가 질서잡혀 있다면, 사람은 행복해지려고 뭔가를

하는 게 아니다.

누구나 행복하다. 그래서 뭔가를 하는 것이다.

자비로워지려고 무슨 일을 하는 게 아니라, 자비롭기

때문에 그런 식으로 행동한다.

 

“의식이 깨어있는 사람”에게는 “영혼의 결정”이 ‘몸의

결정’보다 먼저 이루어진다. “의식없이 행동하는 사람”만이

몸이 하는 일을 ‘매개’로 영혼의 상태를 만들어내고자 한다.

‘우리 몸이 하는 일이 삶이 아니다’란 이 표현이 뜻하는 바가

바로 이것이다. 그럼에도 “우리 몸이 하는 일이 우리 삶의

현상태를 반영해주는 건 사실”이다.

​이것은 또 다른 “신성한 이분법”이다.

 

만일 우리가 몸의 일들에 아무 관심이 없는 정도로까지

성숙해지면, 우리는 다른 차원에서 그러한 것처럼

이 지상에서도 훨씬 더 자유롭게 자신의 ‘기쁨’을

추구하게 될 것이다.

 

신은 말한다.

“행복한 건 좋은 것”이라고, 즉 자신이 하는 일에서

‘행복해 하는 것’을 좋은 것이라고 말한다.

우리가 지금까지 해온 일이 바로 ‘자신이 누구인지’에

관한 진술이다.

 

누구든지 간에 자기가 무슨 일을, 왜 하고 있는지

깨닫는다면 모든 것을 “사랑”할 수 있다.

“스스로가 원치 않는 일을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질병, 건강 문제에 대하여

모든 질병은 “정신의 상태(마음)”에서 창조된다는 것을

먼저 알아야 한다.

질병들의 상당 부분에서, 우리는 “자신에게 연민”을 느끼고,

“남들의 주의”를 끌기 위해 그 병들을 놀라우리 만치

잘 이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어쩌다 “그 병을 사랑하지

않을 때”라고 해봐야, 그것들이 “정도 이상으로 진전”되었을

때와, 애초에 우리가 그 병들을 지어내면서 생각한 정도보다

“훨씬 더 심할 때”뿐이다.

 

모든 병은 자기가 스스로 ‘창조’한다.

이것은 의사들 조차도 사람들이 어떤 식으로 자신을

아프게 하는지

알고 있을 정도이다.

 

즉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병을 사랑(?)한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대다수의 사람들은 전혀 의식하지 못한 채

그렇게 하고 있다. 그들은 자기네가 뭘 하는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병이 들면 그들은 왜 병이 자신을 덮쳤는지 모른다.

마치 자기 스스로가 저지른 것이 아니라, 하늘에서 뚝

떨어지기라도 한 것처럼 느낀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의식하지 않고 살기 때문”에

이런 일이 생긴다.

 

- 담배를 피우면서 자신이 왜 암에 걸렸는지 의아해 한다.

- 고기와 지방을 먹으면서 왜 동맥경화가 일어나는지

의아해 한다.

- 한평생 동안 화를 내면서 왜 심장마비가 왔는지

의아해 한다.

- 스트레스를 받으며 남과 경쟁하면서 왜 뇌일혈이 생기는지

의아해 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신을 죽음으로 몰아갈 만큼 “걱정”하며

살지만, ​이것은 당장 뚜렷히 드러나지 않는다

“걱정”은 마음 활동중에 “미움” 다음가는 “해로운 것”으로

거의 최악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자신을 심하게 파멸시키는

형태이다. “걱정”을 그만두면 건강은 이내 좋아질 것이다.

​‘걱정’은 마음이 ‘자신과 신의 연관성을 이해하지 못할 때’

보여주는 “마음의 행동”이다.

​“걱정”은 정신에너지를 허비하게 만들고, 몸에 해를 주는

생화학 반응들을 창조하여, 소화불량에서 관상동맥

​폐색까지 “온갖 병”들을 일으킨다.

 

“두려움”은 ‘우리자신’의 모든 것에 맞서는 대립물이다.

​그것은 우리의 정신 건강과 육체 건강에 대립하는 결과를

낳는다. 두려움은 “걱정이 증폭된 것”이다.

 

“미움”은 가장 위험한 정신상태이다.

그것은 몸에 독을 퍼뜨려, 사실상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초래한다.

“걱정, 두려움, 미움”은 그 파생물들인 불안, 애달픔, 노여움,

탐욕, 불친절, 심판하기, 비난 따위와 함께 어느 것이나

몸세포들을 공격한다.

이런 조건하에서 건강한 몸을 갖기란 ‘불가능’하다.

“자만심, 방종, 욕심”들은 다소 덜하지만, 역시 신체의

“질병”이나 “불편”을 일으킨다.

 

질병의 치유 방법

 

우리 삶에서 “생각”하지도 않았는데, 어떤 일이 일어나는

경우는 절대 없다. “생각”은 자석처럼 그 “결과”를

우리에게 끌어다 준다.

 

때로는 생각이 명백하지 않아서 확실한 원인으로 나타나지

않은 것처럼 보일 때가 있다. 즉, ‘나는 고약한 병에 걸릴

거야’ 라고 직접적으로 생각하거나 말하지는 않았으나,

‘나는 살 가치가 없는 놈이야’, 내 인생은 늘 엉망이야,

​사는 것이 신물이나, ​신이 나를 벌할 거야‘ 등의 식으로,

생각하거나 말하는 수가 많다.

이와같은 경우같이 “생각”은 보다 훨씬 더 “미묘한 형태”로

나타날 수가 있다.

 

“생각”은 미묘하면서도 강력한 에너지 형태이고, 생각은

‘거리’에 구애받지 않는다.

생각은 세상으로 퍼져가며, 말보다도 더 빨리 우주을

가로지른다. “말”은 그보다 덜 미묘하지만 더 짙은 에너지

형태이고, ​“행동”은 셋 중에서 ‘가장 짙은 에너지 형태’이다.

 

우리의 마음은 “부정적인 생각”들로 막혀버렸다.

그건 생각들 중에는 우리에게 “주입된 것”들도 일부 있지만,

​상당수가 “자기 스스로가 지어내거나 불러 일으킨 것”들이다.

그러고 우리는 며칠이고, 몇 달이고, 몇 년이고 그런

생각들을 지닌 채 즐긴다. 그러고 나서, 자신이 왜 질병에

걸렸는지를 의아해 한다.

이것이 우리 자신의 현주소이고, “모든 질병은

마음에서 나온다”는 의미이다.

 

“부정적인 생각”의 결과들이 일단 “물질 형태”를 띠고 나면,

그 결과를 뒤집기는 어렵다. 그것을 뒤집으려면 “최고의

믿음”이라는 “행동”이 필요하다.

“우주의 긍정적인 힘에 대한 남다른 믿음”이 있어야 한다.

​우리가 이 힘을 “신”이라 부르든, 어떤 이름이라 부르든

상관은 없다.

 

“치유자(Healers)”들은 바로 “이런 믿음”을 지닌 사람들이다.

이것은 “절대 앎”에 전달되는 믿음이다.

“치유자”들은 바로 지금 이 순간의 “우리는 전체”이고,

​“완벽하고 완전한 존재들”임을 알고 있다.

“그런 앎”은 산도 옮길 만한 힘을 갖고 있기에, 우리 몸의

분자들은 ​더 말할 나위도 없다. 거리에 구애됨 없이

멀리 떨어진 곳에서도 ​치료를 해 줄수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건강한 삶

우리는 자신의 “사고방식의 문제”를 “해결”한다면,

일부 “건강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새로운 큰 문제들이 발전해가는 걸 막을수 있을 뿐 아니라,

일부를 치료할 수 있고, 새롭게 생기는 문제들을 예방할

수 있다.

 

우리는 자신의 몸을 함부로 굴린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신의 “몸”보다는 ‘자동차’에 더

신경을 쓴다. 그러나, “제발 자신을 잘 보살피도록 하라

많은 사람들이 몸을 “사용”하지 않아 자꾸 약해진다.

그리고 온갖 독소와 독극물들, 음식으로 가장된 ‘고약한

물질’들로 몸을 가득 채운다. 그런데도 이 경이로운

엔진인 ‘몸’은 여전히 우리를 위해 용감히 달려가고 있다.

 

우리는 자신의 수많은 질병 경험과 상식화된 이 진실들을

잘 알면서도, ​병을 갖기 직전까지는 몸을 함부로 굴리는

​예전 습관으로 곧 되돌아가 버린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 자신이 “살려는 의지가 없기 때문”

이다. ​이것은 “진실”이다.

 

“진실한 말들”은 다 그렇듯이, 그 말들에는 우리를 ‘깨어나게’

하는 효과가 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깨어나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 ​오히려 대다수의 사람들은 “잠”자고

​싶어한다. ​이 세상이 이런 상태로 된 건, 이 세상이

​“자면서 걷는 사람들”로 ​가득차 있기 때문이다.

 

“담배”를 피우는 사람은 ‘살려는 의지가 없는 사람’이다.

자기 몸속에 “술”을 들이 붓는 사람들도 ‘살려는 의지가 없는

사람’들이다. ​비록 적은 양이라 하더라도 우리의 “몸”은

술을 마시라고 만들어진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더욱 중요한 것은 ‘술’이 ‘정신’을 해친다는 것이다.

누군가가 ‘적당한 술과 담배는 해롭지 않다’라고 주장한다면, ​

그리고 단서조건으로 ‘우리가 사는 데로의 삶의 맥락 속에’

라고 ​조건을 붙인다면, 우리의 그 선택에, 신은 “동의”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진실은 달라지지 않는다”. ​

​단지 신은 우리가 그 진실을 “무시하는 것을 허용할 뿐”인

것이다.

 

‘우리가 사는 대로의 삶의 맥락 속에’ 라는 뜻은 사실은

우리의 ​몸이 현재 우리가 사는 데로의 방식과는 다르게

살도록 ​설계되어 있다는 의미로 이해해야 한다.

즉 현재 인간이 이해하고 영위하는 삶의 관점에서는

“적당한” 정도의 독소들을 취해도 한 평생 사는데(수명을

80여년으로 규정한다면) 문제가 없을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의 몸은 애초에는 현재 우리가 사는 데로의

삶의 방식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 훨씬 더 영구히

지탱되도록 ​설계되어 있었다.

 

“생명”은 영원히 죽지 않는다.

우리는 “불멸의 존재들”이며, 그저 “형태만 바꿀 뿐”이다.

애초에는 우리는 그것조차도 바꿀 필요가 없었다.

형태를 바꾸기로 결정한 것을 “우리”였다.

 

신은 고작 80여년 버티다가 사라질 것으로 “인간의 몸”을

창조하지 않았다. 최초의 인간들은 고통이 없이, 죽음이라

불리는 것에 대한 “두려움 없는 몸”으로 살았다.

애초에 상대계의 물질인 몸의 모습을 하고 얻은 체험을 통해,

우리 자신을 ‘참된 자신’으로 인식할 기회를 갖겠다는

​“멋진 발상”은 우리 영혼들에게서 나왔다.

 

​창조론과 진화론에 대하여

“생명”은 우리가 수십 억년이라 부르는, 눈 깜짝할 찰라의

순간에 일련의 단계를 거쳐 진화했다

오직 “상대계”에서만 “어떤 주장”을 옳고 그르다고 판단한다.

(진화와 창조에 관하여)시간이 “시간이 아닌 절대계”에서는

‘모든 사물이 하나같이 모든 것’이 된다.

​- 어떤 한계나 구분을 지을 수 없다.

 

모든 것은 눈 깜짝할 사이에, “창조론자”들이 말한 그대로

성스러운 한 순간에 창조되었다. 그리고 “진화론자”들이

말한 그대로 소위 수십 억년이라는 장구한 세월에

​진화과정을 통해 나타냈다.

따라서 그 양쪽 다 옳은 것이다.

​- 모든 것은 “우리가 그것을 어떻게 보는가”에 달려있다.

삼위일체의 의미에 대하여

대다수의 우리들은 ‘진리’를 알고 싶어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이해하는 식대로의 ‘진리’”를 알고 싶어한다.

이것이 우리의 ‘성장과 진화’를 가로막는 ‘최대의 장애이다.

자신의 이해틀과 부합되는 것들은 모두 받아들이고,

그렇지 않은 것은 배척한다.

 

우리가 “자기식 진리”를 제외한 모든 것에 마음을 닫고

있는 한, ​우리는 “가르침”에 마음을 열 수 없다.

그래서 분명히 어떤 이들은 이 글을 ‘악마의 글’이라

부르고 배척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들을 귀있는 자들은 들을 것이다.’

​우리는 죽게 되어 있는 존재들이 아니었다.

 

우리의 “물질의 몸”은 우리의 마음으로 창조해낸 현실을

​체험하고, 우리가 창조해 낸 자아를 영혼으로 인식할 수

있게 해주는 ​더없이 훌륭한 경이로운 도구이며,

영광스런 매개체로서 창조되었다.

 

“영혼은 고안하고, 마음은 창조하고, 몸은 체험한다.”

이 “순환구조”은 완벽하다. 그러고 나서 영혼은

자신의 “체험” 속에서 자신을 “인식”한다.

만일 영혼이 자신이 체험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거나,

무슨 이유에서인가 다른 체험을 바란다면, “영혼”은

그저 ​“새로운 ​자아 체험”을 고안해 내서, 문자 그대로

자신의 ​“마음을 바꾼다”. ​

​그러면 “몸”은 이내 “새로운 체험”을 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이 표현이 바로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라는 말의 의미이다. - 요한복음 11:25,)

 

그러나 “영혼이 결코 몸과 마음을 무시하지 않는다”는 것도

사실이다. 삼위일체의 존재인 우리는 자아의 세 측면들이

결코 불평등한 관계가 아니다. 어느 한 기능이 다른 기능보다

더 중요하지 않으며, “동등한 방식”으로 연관되어 있다.

 

(고안 - 창조 - 체험) :

우리는 고안한 것을 창조하고, 창조한 것을 체험하며,

​체험한 것을 다시 생각해 낸다.

창조의 순환원리

만일 우리의 몸이 뭔가를(예:넉넉함) 체험할 수 있다면,

우리는 곧 자신의 영혼 속에서 그것에 대한 느낌을 갖게

될 것이고, 우리의 영혼은 자신을 새로운 방식(넉넉함)으로

​그려볼 것이고, 그리고 우리의 마음에게 그것에 대한

새로운 생각을 제공해 준다.

그 새로운 생각은 더 많은 체험을 가져오고, 몸은 새로운

현실을 계속되는 존재 상태로 받아 들이고 살기 시작한다.

 

우리의 ‘몸’과 ‘마음’과 ‘영혼’은 ‘하나’이다.

우리는 “신성한 전체”이고, “성스러운 일체”이다

우리의 “궁극적 수수께끼”인 ‘신과의 정확하고 참된 관계’의

정의는 “너희는 내 몸이다”이고, 신의 모든 체험은 바로

​“우리들을 통해서 체험하는 것”이다.

​이런 신비를 ‘가장 완벽히 이해“한 사람들 중의 한사람인

‘나사렛 예수’는 이렇게 표현했다.

​(“아버지와 나는 ‘하나’입니다.” -요한복음 7:11)

 

그는 “불변의 진리”를 말한 것이었다.

그리고 우리가 “완전한 앎” 즉, “깨달음”에 이르는

다음 진리를 이해하게 되리라.

"In that day you will know that I am in my Father and

you in me, and I in you." (John 14:20)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안에

있음을 너희가 알리라.” (요한복음 14장 20절)

 

“궁극적 진리”에 대한 우리의 ‘이해 수준’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협소하고, ‘진리’는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광범위” 하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우리의 현재수준에서 그 모든 것을

알려고 하기에는 상당한 무리가 있다.

항상(forever)은 우리가 알고 있는 것보다 훨씬 더 긴

시간이고, ​영원(eternal)은 항상보다 더 긴 시간이다.

‘신’은 우리의 상상을 넘어서는 존재이고, 상상은 신을

능가하는 것이다.

‘신’은 우리가 “상상력이라 부르는 에너지”이다.

​‘신’은 창조이다. ‘신’은 “첫 번째 생각”이며, “마지막

체험”이며, ​그리고 ‘신’은 “그 사이(between)에 있는

모든 것”이다.

 

“나는 나이다.(I Am That I Am)”

우리는 "존재"하지 않을 수 없다. 단지 형상을 원하는 대로

바꿀 수는 있지만, 존재하지 않을 수는 없다.

하지만 대부분의 우리는 ‘자신이 누구인지’ 알지 못하는

수가 많다. ​그리고 그 때는 자신의 “반쪽”만을 체험할

뿐이다.

 

이것을 굳이 종교적인 표현으로 ‘지옥’이라고 말할 수

있겠으나, ​결코 심판받거나, 추방되는 일은 없다.

우리가 이 “지옥”에서 벗어나려면, 즉 “알지 못함”에서

벗어나는 확실한 방법은 “그저 다시 알기만 하면 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 일을 할 수 있는 공간”, 차원들 중 하나 속에

존재한다. ​즉 우리의 이해방식으로 표현한다면

‘삼차원’이란 현실이다.

물론 더 많은 차원들도 있다. 우리에게 이런 삶이 주어진

‘이유’는 자신의 “체험 속에서 자신을 알도록” 하기 위하여,

​그럴 때 우리는 ‘참된 자신’으로서 자신을 떠올릴 수 있으며,

체험 속에서 그런 자신을 창조할 수 있다.

그렇게 해서 그 원은 다시 크기가 “더 큰 원”으로 완성된다.

우리는 “끊임없는 성장과정”, “되어가는 과정” 속에 있다.

우리가 “될 수 있는 것”에는 아무런 한계가 없다.

 

업장(Karma)에 대하여

 

우리는 이 생에서 아무것도 배우지 않으며 배울 것이 없다.

단지 그저 “기억(remember)”해내기만 하면 된다.

즉 나 자신을 “재구성(re-member)”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깨달음”을 얻을려고 애쓰고 있다.

그러나 그들이 바로 “깨달음 그 자체”라는 것을 모르고

깨달으려고 애쓰고 있다.

 

과거생은 분명히 있었으며, 우리의 과거생에서 우리는

모든 삶을 다 경험했다.

종교에서 말하는 “업장(karma)”이라고 표현된 ‘갚아야

할 죄의 빚’이란 의미의 ‘빚’은 없다.

즉, 꼭 해야 하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가 하고자 하는 것들, “체험하고자 선택하는

것들”은 분명히 있다. 그리고 이런 선택들 중 일부는

“우리가 과거에 체험한 것들에 달려 있는 것들”이 있다.

즉 그러한 선택을 하고 싶은 자기 스스로의 “바램”은

‘과거 체험’에서 나온다.

 

이것이 통상 우리가 말하는 “karma(업)”라는 것과 꽤

“비슷한 것”일 수 있다.

즉 “업”은 ‘강제나 강요된 빚’의 의미가 아닌 “자신의 선택”

이란 것이 “올바른 의미”이다. ​만일 업이 더 나아지고,

더 커지려는 ‘내면의 바램’이라면, 그리고 진화하고

성장하려는 내면의 바램이라면, 아울러 그러한 방법으로

과거 사건들과 체험들을 돌아보려는 ​바램이라면

“업”은 존재한다.

 

그러나 ‘업’은 어떤 것도 요구하지 않는다.

애초에 요구받은 것은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분명한 것은 우리는 지금까지 그래왔듯이 “자유로이

​선택할 수 있는 존재들” 이다.

‘신들림’ 현상은 존재한다.

우리 모두 다에게 해당된다. 소위 어떤 인간도 “영력”을

갖지 않은 사람은 한명도 없다. ​단지 그런 영력이 있다는

것을 “모르거나”, “사용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을 뿐이다.

 

‘영적 능력을 사용한다’ 함은 “육감을 사용한다”는 뜻과

비슷하다. 이러한 능력들은 결코 종교에서 주장하는

‘악마와 거래’가 아닌 것이다.

 

神은 말한다.

​“너희가 언제 어디에 있든지 간에 내 본질인 평화로움에서

분리될 때마다 나를 부르도록 하라!

나는 그기에 있으리라. 진리와 빛과 사랑과 더불어!”

신과 나눈 이야기 - Neale Donald Walsh​

이제 당신들은 아주 특별한 체험을 하게 될 것이다.

당신들은 신과 이야기를 나누게 될 것이다.

아, 아, 나도 안다. 그런 일은 일어날 수 없다는 걸......

아마 누구라도 그런 일은 가능하지 않다고 생각할 (혹은

그렇게 배워왔을) 것이다.

신에게 말할 수는 있으되 신과 이야기할 수는 없다고, 요는

신은 응답해주지 않으리라는 얘기, 그렇지 않은가?

적어도정식 대화, 일상대화의 형태로는 불가능하다고!

내 생각 역시 그랬다.

그런데 우연히도 이 책이 내게 나타났다.

상징적인 표현이나 비유가 아니라 문자 그대로 나타났다는

말이다. 이 책은 내가 쓴 게 아니라 내게 나타났다.

그리고 당신들이 이 책을 읽을 때는 당신들에게도 나타나리라.

우리 모두는 우리가 받아들일 채비를 하고 있던 그 진리로

인도될 것이기 때문이다.

만일 내가 이 모든 내용을 비밀에 부쳤더라면, 내 삶은 훨씬

더 편해졌을 것이다.

그러나 이 책은 그렇게 하라고 내게 나타난 게 아니었다.

이 책이 내게 어떤 불편함을 끼치든 간에(신에 대한 모독이나

사기라느니, 과거에 이런 진실들에 따라 살아오지 않은 주제에

이런 걸 발표하다니 위선자라느니, 좀더 고약한 것으로

성자라느니 하는 말들을 듣는 불편함) 내가 이제 와서

공개하는 과정을 멈추는 건 불가능한 일이다.

또 나 자신 그러기를 바라지도 않는다.

내게는 이 모든 것에서 물러날 기회가 여러 번 있었으나

그런 기회를 붙잡지 않았다.

나는 이 책에 대한 세상 사람들의 말이 아니라

내 본능이 말하는 바에 따르기로 결심했다.

내 본능은 이 책이 말도 안 되는 얘기나 좌절감에 사로잡힌

사람의 영적인 상상력이 빚어낸 허무맹랑한 얘기, 혹은

잘못 살아온 생을 변명하려는 사람의 자기 정당화 같은 게

아니라고 말한다. 아, 사실은 나도 혹시 그런 게 아닐까

생각해봤다. 그런 가능성 전부를. 그리하여 나는 이 책이

원고 상태로 있는 동안 몇몇 사람들에게 읽어보게 했다.

그런데 그들은 감동받았다. 울었다. 그리고 이 책 속에

담긴 즐거움과 유머에 웃음을 터트렸다.

그들은 자기네 삶이 변했다고 말했다. 그들은 전율했다.

그들은 권능을 부여받았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변화되었다고 말했다.

 

그때 나는 이 책이 모든 사람들을 위한 것임을 알았으며,

이 책이 출간되어야 한다는 걸 알았다.

이 책은 책 안에 적힌 물음들에 깊은 관심을 갖고, 진정으로

대답을 갈구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놀라운 선물이 될

것이기에. 진지한 마음, 영혼의 간절함, 열린 가슴으로

진리를 추구해온 ​모든 사람들에게. 그리고 우리 대다수가

바로 그런 사람들이다.

 

이 책은 우리가 품어온 의문들의 전부, 혹은 그 대부분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삶과 사랑, 목적과 기능, 사람들과 관계, 선과 악, 죄의식과

죄, 용서와 속죄, 신에게 이르는 길과 지옥에 이르는 길에

관해. 그것은 섹스, 권력, 돈, 자식들, 결혼, 이혼, 필생의

과업, 건강, 미래, 과거....... 이 모든 것을 정면에서

다루고 있다.

또 이 책은 전쟁과 평화, 앎과 무지, 주고 받음, 기쁨과

슬픔, 구체성과 추상성,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진실과 비진실에 대해서도 살펴본다.

 

당신들은 이 책을 "만사에 대한 신의 가장 최근 발언"이라고

말할 수도 ​있으리라. 하지만 일부 사람들은 이걸 사실로

받아들이는 데 약간의 어려움을 겪을지도 모른다.

특히 신이 이천년 전에 말하기를 그쳤다고 생각하거나,

신이 성인들이나 무당들, 그리고 이삼십년 동안 열심히

명상해왔거나 최소한 십년 동안 그런대로 수행해온 사람들

(나는 이 중 어느 범주에도 들어가지 못한다)하고만

교류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진실은 신은 모든 사람과 말한다는 것이다.

 

선한 사람과 악한 사람, 성인과 악당 모두에게.

그 중간에 해당되는 우리 같은 사람들은 더 말할 나위도 없고.

이 책을 읽는 당신을 예로 들어보자.

신은 당신이 이제까지 살아오는 동안 수많은 방식으로

당신에게 다가왔으며 이 책 역시 그런 방식들 중 하나일 뿐이다.

당신은 제자가 준비를 갖추면 스승은 나타나기 마련이라는

옛 격언을 무수히 들어오지 않았는가?

이 책은 우리의 스승이다.

이 책이 내게 나타나기 시작한 직후 나는 내가 신과

이야기하고 있다는 걸 알았다.

 

직접적으로, 개인적으로, 반박의 여지가 없는 방식으로.

신은 내 이해능력에 적절히 맞추어 내 질문에 답해주고 있었다.

즉 내가 이해할 수 있는 방식과 언어로.

이 책의 내용이 일상 대화체로 서술되어 있고, 신이 가끔

내 과거의 체험들이나 내가 다른 출처들에서 얻는 지식들을

언급하는 것도 다 그 때문일 것이다.

이제 나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내게 일어났던 모든 게

다 신에게서 온 것임을 알고 있다.

​그리고 그것들이 종합되어 내가 던진 모든 질문들에 대한

훌륭하고 완벽한 답으로 나타나고 있다는 것도.

그 과정 어딘가에서 나는 하나의 책이, 발간할 의도가

​담겨있는 ​책이 탄생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리고 실제로 이 대화의 후반 부분이 쓰여지는 동안

(1993년 2월), 연이은 삼년간의 첫 부활절과 마지막 부활절

사이에 세 권의 책이 차례로 나오게 되리란 구체적인

얘기를 들었다. 그리고 각권이 다음가 같은 내용으로

이루어지리라는 얘기도.

 

1. 제1권은 주로 각 개인들이 당면한 삶의 과제와 기회를

중심으로 한 개인적인 주제들을 다루고

2. 제2권은 이 행성에서의 지정학적, 형이상학적 삶이라는

여러가지 어려운 과제들에 대해 다루며,

3. 제3권은 우주의 최고최상의 진실들, 영혼이 안고 있는

과제들과 기회들에 대해 다룰 것이라는.

이 책은 그 3부작의 첫권으로 1993년 2월에 완료되었다.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설명하자면, 나는 이 대화를

손으로 ​적었는데 마치 신이 목청 높여 얘기하기라도 하듯

특별히 강조한다고 여겨지는 문장들에는 밑줄을 긋거나

동그라미를 쳤으며, 그 부분들은 나중에 이탤릭체로

​표기되었다.

이제 나는 여기에 수록된 지혜를 되풀이해서 읽는 동안,

나 자신의 삶에 몹시 당혹해하고 있다는 사실을

고백해야겠다.

이제까지의 내 인생은 계속되는 과오와 실수, 얼마간의

몹시 부끄러운 행동들, 남들에게 상처를 줬거나

남들이 용서할 수 없는 것으로 받아들일게 분명한

선택이나 결정들로 점철되어 왔다.

나는 그런 것들이 남들에게 고통을 안겨줬다는 사실에

대해 깊이 ​자책하고 있기는 하나, 그 분들 덕분에

내가 배운,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배우고 있는 모든 것에

대해 ​더할 나위 없이 ​고마워하고 있다.

​내 배움의 속도가 느린 것에 모든 분들께 사과드린다.

하지만 신은 나로 하여금 내 결함들을 용서하고 두려움과

죄책감 속에서 살지 말라고, 항상 좀더 원대한 비전에

따라 살려고 애쓰라고 격려해 주신다.

나는 신이 우리 모두에게 바라는 것이 바로 이것임을

잘 알고 있다.

 

 

닐 도널드 월쉬

오리건 센트럴 포인트

1994년 크리스마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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