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文學과 評論

자전거 타고 방 보러 간다

by 담채淡彩 2011. 7. 23.

여름의 초상/헤벨

 

여름의 마지막 장미가 피었다

그것은 금새 피라도 흘릴 것 같이 붉었다

섬뜻해진 나는 지나는 길에 말했다

인생의 절정은 죽음에 가까운 것이라고

 

바람의 입김조차 없는 날

흰 나비가 소리도 없이 지나갔다

그 날개짓이 공기를 흔든 것도 아닌데

장미는 그걸 느끼고 지고 말았다

 

 

 

 

자전거 타고 방 보러 간다

                               /박형권

 

 

자전거 타고 방 보러 간다

장마전선이 물폭탄을 쏟아부은 동네의

자작한 하수도를 따라

늘 곰팡이가 솟아오르는 우리의 정오(正午)를 지나서

나팔꽃 아래 듬성듬성 파인

골목으로 들어선다

비가 새지 않으면 방이 아니라고 믿는

공인중개사의 늙수그레한 자전거가 앞장을 서고

딸 자전거를 타고 나온 비옷 같은 아내가 그 뒤를 따르고

나는 아내의 젖은 꼬리를 물고

아직은 종아리가 단단한 페달을 밟는다

이 서울의 지표면에는

창틀이 마당과 맞물린 우리의 꿈을 품어주려고

축축하게 젖어서 기다려주는

반지하 단칸방이 있어

우리의 미래는 송이버섯처럼 번창하리

보증금 삼천오백만원은 우리 생명보다 소중하여

왼쪽 가슴에 단단히 찔러넣고 두근두근 돈이 심장소리를 들을 때

자전거 타고 방 보러 간다

대체 어디서 자고 무엇을 먹기에 그렇게 끈질기게 살아남는지

참새들이 골목에 나와 고단한 날개를 말린다

언젠간 바퀴를 크게 저을 수 있지만 오늘은 기어를 저속에 놓고

우린

자전거 타고 방 보러 간다

우리 네 식구가 냄새를 풍기며 구더기처럼 꼬물거릴

그 기도(祈禱)를 찾아서

 

 

 

< 창작과비평 > 2012년, 봄호

 

얼음의 시간/박정원

 

과녁을 그리던 수심이 묶여있다

 

수면을 잔뜩 깨문 구름의 어금니들

밑줄 그어진 물의 잔뼈들이 이렇게 견고하다니,

 

지금은 얼음의 시간

잔물결이 맨발로 견뎌야 할 저 강은

등 돌린 밤이다

 

톱날로 베어지는 물도 잇어

계절을 제 그림자 속에 가두어둔  울음은

관통해야 한다는 것

 

저것은 침묵의 두께

내 무릎 관절이 수천 번 오르내려야 할

미완의 경전이다

 

앙다문 물의 입술

굳어버린 물의 표정은 싸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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