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文學과 評論

나의 애송시

by 담채淡彩 2011. 7. 23.

밥 한 그릇/장석주

 

귀 떨어진 개다리 소반 위에

밥 한 그릇 받아놓고 생각한다

사람은 왜 밥을 먹는가

살려고 먹는다면 왜 사는가

한 그릇 더운 밥을 위하여

나는 몇 번이나 죄를 짓고

몇 번이나 나를 속였는가

밥 한 그릇의 사슬에 매인 목숨

굽히고 싶지 않은 머리를 조아리고

마음에 없는 말을 지껄이고

가고 싶지 않은 곳에 발을 들여놓고

잡고 싶지 않은 손을 잡고

정말 해야 할 말을 숨겼으며

가고 싶은 곳을 가지 못했으며

잡고 싶은 손을 잡지 못했다

나는 왜 밥을 먹는가,오늘

다시 생각하며 마땅히

했어야 할 양심의 말들을

파기하고 또는 목구멍 속에 가두고

그 댓가로 받았던 몇 번의 끼니에 대하여

부끄러워한다 밥 한 그릇 앞에 두고, 아아

나는 가롯 유다가 되지 않기 위하여

기도한다, 밥 한 그릇에

나를 팔지 않기 위하여

 

 

퀵 서비스/장경린

봄이 오면 제비들을 보내 드리겠습니다
씀바귀가 자라면 입맛을 돌려드리겠습니다
비 내리는 밤이면
발정 난 고양이를 담장 위에
덤으로 얹어드리겠습니다 아기들을
산모 자궁까지 직접 배달해드리겠습니다
자신이 타인처럼 느껴진다면
언제든지 상품권으로 교환해드리겠습니다
꽁치를 구우면 꽁치 타는 냄새를
노을이 물들면 망둥이가 뛰노는 안면도를
보내 드리겠습니다 돌아가신 이들의 혼백은
가나다 순으로 잘 정돈해 두겠습니다
가을이 오면
제비들을 데리러 오겠습니다
쌀쌀해지면 코감기를 빌려드리겠습니다
 

 

 

미루나무에 대한 명상/임태주

 

나는 본다, 이스트처럼 슬픔이 부푸는

한 그루 미루나무의 둥그런 팽창을

잎잎마다 오후의 빛을 끌어 모았다가

차가운 발등 쪽으로 아주 조금씩 흘러보내는

깊은 물관부를 따라 바닥에 내리면

수박향 나는 치어를 기르는 시내가 흐르고

켜켜이 모래를 쌓고 있는 모래들

문득 상류가 그리워지는 때가 있는 듯

조그맣게 몸을 뒤틀어 부유하기도 한다

늘 제 스스로 만든 바람이

잎을 흔들어 피가 마르고

희망이 마른다

저렇듯 잎의 상처가 세월보다 가벼워지면

어둠 속에서 미루나무 한 그루 부풀어 오른다

나랑 오른다

날아, 오를까

기실 날개란 얼마나 비루한 것인가

저 흙을 움켜쥔 단단한 현세의 뿌리들

그러니 미루나무의 영혼이여

너무 높이 날지 말거라

생이 희박하므로

 

 

자전거 타고 방 보러 간다

                                박형권

 

 

 

자전거 타고 방 보러 간다

장마전선이 물폭탄을 쏟아부은 동네의

자작한 하수도를 따라

늘 곰팡이가 솟아오르는 우리의 정오(正午)를 지나서

나팔꽃 아래 듬성듬성 파인

골목으로 들어선다

비가 새지 않으면 방이 아니라고 믿는

공인중개사의 늙수그레한 자전거가 앞장을 서고

딸 자전거를 타고 나온 비옷 같은 아내가 그 뒤를 따르고

나는 아내의 젖은 꼬리를 물고

아직은 종아리가 단단한 페달을 밟는다

이 서울의 지표면에는

창틀이 마당과 맞물린 우리의 꿈을 품어주려고

축축하게 젖어서 기다려주는

반지하 단칸방이 있어

우리의 미래는 송이버섯처럼 번창하리

보증금 삼천오백만원은 우리 생명보다 소중하여

왼쪽 가슴에 단단히 찔러넣고 두근두근 돈이 심장소리를 들을 때

자전거 타고 방 보러 간다

대체 어디서 자고 무엇을 먹기에 그렇게 끈질기게 살아남는지

참새들이 골목에 나와 고단한 날개를 말린다

언젠간 바퀴를 크게 저을 수 있지만 오늘은 기어를 저속에 놓고

우린

자전거 타고 방 보러 간다

우리 네 식구가 냄새를 풍기며 구더기처럼 꼬물거릴

그 기도(祈禱)를 찾아서

 

 

 

< 창작과비평 > 2012년, 봄호

 

 

일몰의 빈손

오정국

 

저기에 무엇이 담길지는 생각지 말자

 

빈손이다

 

아름드리 팽나무 밑의

평상, 거기에 무릎 꿇고 앉아

공중으로 두 손을 받들어 올리는

노인네, 움푹 팬

궁기의 눈빛으로 올려다보는

하늘

 

빈 그릇이다

 

백발의 저 할아지에겐 식솔이 없다 비로소

경전도 주문도 털어 버렸다 다만,

오늘 하루의 햇빛에게만

예를 갖추겠다는 듯

 

멈춰진 손바닥의

순간, 순간들

 

비바람이 밀려온 건 그다음의 일이다

해가 서쪽 산으로 넘어가고

구름의 아랫배가 붉게 물든 것도 그 다음의 일이다

 

빈손이 쥐고 있는

빈손

 

어두워지지 않고는

깊어지지 않는

밤, 이윽고

 

빈손이 놓아 버리는

빈손

 

 

시집 < 파묻힌 얼굴 > (민음사, 2011)|

 

등대

이홍섭

등대

       /이홍섭

 

 나 후회하며 당신을 떠나네

 

후회도 사랑의 일부

후회도 사랑의 만장 같은 것

 

지친 배였다고 생각해 주시게

불빛을 잘못 보고

낯선 항구에 들어선 배였다고 생각해 주시게

 

이제 떠나면

다시는 후회가 없을 터

등 뒤에서, 등 앞으로

당신의 불빛을 온몸으로 느끼며

눈 먼 바다로 나아갈 터

 

후회도 사랑의 일부

후회도 사랑의 만장 같은 것이라

 

나 후회하며

어둠 속으로 나아가네

 

 

< 시집 > 『터미널』(문학동네, 2011

 

 


등대

이홍섭

 

 

나 후회하며 당신을 떠나네

후회도 사랑의 일부

후회도 사랑의 만장 같은 것

 

지친 배였다고 생각해 주시게

불빛을 잘못 보고

낯선 항구에 들어선 배였다고 생각해 주시게

 

이제 떠나면

다시는 후회가 없을 터

등 뒤에서, 등 앞으로

당신의 불빛을 온몸으로 느끼며

눈 먼 바다로 나아갈 터

 

후회도 사랑의 일부

후회도 사랑의 만장 같은 것이라

 

나 후회하며

어둠 속으로 나아가네

 

< 시집 > 『터미널』(문학동네, 2011

 

 

 

나 후회하며 당

강은교/

 

떠나고 싶은 자

떠나게 하고

잠들고 싶은 자

잠들게 하고

그리고도 남은 시간은

침묵할 것

 

또는 꽃에 대하여

또는 하늘에 대하여

또는 무덤에 대하여

 

서둘지 말 것

침묵할 것

 

그대 삶 속에 굳은 날개와

흐르지 않는 강물과

누워있는 구름

결코 잠 깨지 않는 별을

쉽게 꿈꾸지 말고

그러므로

 

실눈으로 볼 것

떠나고 싶은 자

홀로 떠나는 모습을

 

가장 큰 하늘은

등 뒤에 있다

 

 

 

 

< 시집 > 『터미널』(문학동네, 20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