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文學과 評論

無間地獄에 들다

by 담채淡彩 2010. 7. 9.

 

無間地獄에 들다




송 준 영

(시인․본지주간)



 


내가 스님을 처음 뵌 것은 1986년 더위가 한 참 기승을 부리는 8월 15일 광복절 날 오전 9시 경이고, 장소는 서울 장승배기 백운암 조실이었다. 그러나 사실 전혀 감정이 실리지 않은 이 한 줄의 글을 쓰고 나니 더욱 창망하여 말문이 막힌다. 생각이 아득해지고 머리에 무엇이 가득 찬 듯도 하고 텅 빈 것 같기도 하다. 무엇이 나를 허물어뜨리는가. 나를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만드는가. 알고 보면 우리가 과거를 회상한다는 것 자체, 그 과거가 원래 있지 않으며 있지 않는 과거란 말일 뿐, 없어지지 않은 기억의 한 파편일 뿐. 우리의 만남은 한 번의 만남이라도 천만 년의 만남이고, 우리의 헤어짐은 천만 년의 헤어짐이 분명하다. 그리고 이 이별은 우리 서로 서로가 만나지 않을 수 없는 이별이 아닌가.

 

스님은 늘 나의 정신의 본원처였다. 근래에 일체의 바깥소식에 관심 없이 하고자 하는 일에  몰두하다보니 스님의 입적 소식조차 접하지 못하고 있었다.

12월 13일 오후 10시경, 이 시각 나는 무엇을 하고 있었던가.

돌아보니 아무런 일도 하지 않았었다. 또 돌아보니 스님께선 아무런 일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다시 한 번 꽃은 지고 구름은 흩어지고 물은 흐르고 지나가는 눈발은 과거 또 과거에도 날았고, 미래 미래가 다하도록 하늘거릴 것이고, 오직 이 자리를 벗어나지 않고 하늘거리고.


스님과 나의 인연은 내가 40이 들던 1986년부터 시작된다. 아니 나와 스님과의 인연은 그보다 훨씬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아마 1974년 쯤 되었으리라. 청년기에 누구나 그러하듯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를 가슴에 담고, 채워지지 않는, 가득 차 넘치는 세상 번다한 고민을, 뜻대로 되지 않는 세월을, 갈증과 허기로 뭉쳐 진 하루하루를 어깨에 메고 다닐 때였다. 대구 반월당 조그만한 불교서점에 들려서 젖어드는 허무랄까 무상이랄까 이걸 메우기 위해 한 벽 가득히 찬 선서를 훑고 있었다. 눈 안에 깊숙이 자리 잡는 책 한 권. 서옹연의?임제록?이었다. 나는 그 때 서옹스님이 어떤 분인지 알지 못했다. 그저 서옹이란 이름이 마음에 들었고, 임제선사의 고함소리가 좋았고, 잠시 서가 귀퉁이에서 들여다 본 서옹스님의 착어가 무조건 좋아 보였다. 그 착어의 선구(禪句)들, 내가 도저히 알지 못한, 그 알송달송함이 마음에 들었다.


다시 내 나이 마흔, 1986년 나는 들뜬 마음으로 장승배기 백운암 임제선원으로 서옹스님을 친견하려 가는 인연이 익는다. 당시 강릉포교당에서 강릉불교청년회를 浮雲선화(참선하는 수좌)와 같이 지도하고 있었는데, 부운스님의 주선으로 서옹큰스님을 참문할 수 있도록 주선을 해주는 고마움을 받게 된다. 부운스님은 선방 수좌로서 이 당시 나의 도반이다.

마흔이 들던 전 후에 나는 떨칠 수 없는 화두로 거의 짓이겨지고 있었다. 잠자리에서마저 화두가 성성히 들리고 있었다. 잠 속에서 공부에 도움이 되지 않는 꿈을 꾸어질 때는 다시 한 생각이 나와 그래 공부하는 내가 이런 잡꿈이나 꾸어서 되겠나. 하며 나를 추스르며 다시 화두를 들곤 했는데, 새벽녘 아내가 일어나라고 깨울 때도 화두가 이어지고 깨어나도 계속 화두가 들리곤 할 때였다. 나의 온몸이 공부를 받아들이고 나의 6식 (六識) 전체가 서로 상통되고, 해체되곤 하든 때이다. 나는 몰두되어 눈을 감으나 눈을 뜨나 이 일 이외는 관심조차 없던 때. 나는 고향에 조상님이나 부모님한테로 갈 그런 생각조차 못하고, 내가 사는 강릉에서 가까운 정선 처가에 가서 명절을 지내게 된다. 심신이 가라앉을 대로 가라앉은 나는 처가 골방에서 한대의 담배와 ?전등록?을 즐기고 있었다. 사랑방에서는 설날 차례상을 차리는데, 심심하여 다시 ?전등록?을 펼치는데, 문득 어디선가 병과 병이 부딪치는 소리가 나더니, 향엄선사의 어떤 것이 아버지와 어머니가 처음 만나기 전 너의 본래얼굴인가?(如何是 父母未生前 眞面目麽) 공안이 보이는가 싶더니, 한 줄기 마음의 길이 열리고 세계의 이면이 올연히 드러났다. 내가 아는 시심마(是甚麽) 마삼근(麻三斤) 일귀하처(一歸何處) 공안들이  갑자기 발가벗은 채 달려 나왔다. 아득한 낭떠러지 끝에 올라선 것과 같은 상태, 한 달 정도 이어지든 울울함이 갑자기 둘려 빠져버린다.

이 일이 있은 후, 나는 여러 선지식을 만나 나의 이 깨우침을 나누어 보고자 하였다. 그리고 이 기막힌 사실이 사실인가, 허상인가를 점검하고자 헤매었다. 서운, 고송, 성철 등의 선사들 당시 내가 만나 참문한 스승들이었다. 나의 이런 상항에서 서옹스님과 인연이 닿는 자연스런 행운이 찾아왔다. 


8월 15일 부운수좌와 함께 임제선원 조실에 시봉스님의 안내를 받고 들어간다. 아랫목에 앉아계시는 큰스님은 차라리 단아한 한 마리 청학이었다. 형형한 안광(眼光), 입가에 깃든 미미소(微微笑), 몸에 우러나오는 간단명료함, 심신에서 우러나오는 고적함, 바로 노고추(老古錐)1)였다. 나는 그때 바로 이분이구나.하는 탄성이 마음에서 저절로 우러났다.

나는 스님에게 삼배의 예를 올리고 꿇어앉았다. 부운수좌가 미리 전화를 드려서 참문하려 가는 수선행자(修禪行者)임을 염통한 까닭에선지 스님은 전신에 온화한 기운을 보이신다.

공부하는 학자라고.하시는데 조실이 온기로 가득 차 넘실거린다.

나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한다. 시자가 따라주는 작설차를 입안에 머금으며 내 공부를 여기서 마감해야 하고, 내 공부를 마땅히 조사스님한테 인가를 받음으로 이 한계상항에서 자유롭게 훨훨 날아야 한다는 결심이 앞선다. 돌이켜 보면 처음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 세계 말고 또 다른 세계가 있다는 걸 알고 금생에 이 일을 마쳐야한다고 초발심(初發心)한 일(이때 나는 18세 였다)이 엊그제께 같은데, 벌써 20년이 지나 돌아와 다시 18세 나이로 스승님 앞에 꿇어앉은 나를 본다.

그래, 묻고 싶은 게....

(이 멍충이 놈아 뭘 묻고 싶은거냐?)

나는 부끄러운 새악시 마냥 겨우겨우 말씀을 올린다.

스님, 제가 알고 싶은 게, 8식 이전의 소식입니다. 이 소식을 한 말씀해 주십시오.

(8식 이전의 소식은 부모미생전 본래면목(父母未生前 本來面目)을 나에게 내 보여주시란 말입니다.)

스님께서는 어눌한 내 말을 제대로 듣지 못하셨는지, 6근과 6경의 12처, 6식을 합친 18계. 7식. 제8식인 아뢰야식에 이르는 유식철학과 프로이드 정신분석학에 배대하여 한 20여분에 달하도록 친철한 가르침이 계셨다. 스님의 잔잔한, 동서를 회통하는 말씀. 너무나 오랜 세월이 흐른 듯한 진공상태인 것 같은 스님의 말씀 끝에 나는 허기지고 지쳐 있었다.

스님 저는 생사문제가 무너진 자리, 이 소식을 묻고 있습니다.

(전 그 말씀을 물은 것이 아닙니다. 전 생사문제가 허물어졌습니다.)

수선납자인가?

부운선화가 곁에서 열심히 참선하는 선객이다 라고 보충하는 말이 들렸다. 그리고 이즘 소식이 있어 점검 받고자하여 같이 오게 됨을 대략 말을 한다.


나의 살림살이는 긴 터널을 내닫는 열차와 같이 외길로 치닫고 있었다. 향상일로(向上一路)는 진공과 같은 한 길이고 틈도 없는 무간지옥(無間地獄)을 돌고 돌다 천길 낭떠러지 끄트머리에 발가벗고 서 있다가 한발을 내딛었다는 생각. 이 생각이 옳은 것이냐 그렇지 않은 것이냐, 이것이 그 당시 나에게는 가장 큰 일이었다. 18살에 초발심 후, 이 일은 장부일대사(丈夫一大事)였고, 가장 큰 문제였고, 생명을 건, 늘 내려가지 않는 체증으로 남는 내 가슴에 맴도는 문제였다. 이 일대사가 40 전후에 무너져 내리는 실제 체험을 얻고, 나는 이 일이 사실인가를 확증받기 위해 제방 선지식님네를 찾아 나섰다. 그 때의 수도일지인 「子正日誌」몇 도막을 옮긴다.


1985년 11월 14일

꿈이든 생시이든

말하고 싶지 않다.

이 기막힌 가슴이 탁 트이는 기쁨을

간 밤 무수한 이 뭣꼬?를 반복하였다.

너무 또렷한 오롯이 드러난 이 한 물건

어, 요놈봐라 요놈봐라.

봐라는 놈 봐라.

새벽잠을 깨우는데도 이 아침까지도 오롯이

반복되어지는 이 뭣꼬

또 다시 돌아오는 요놈봐라

긴 죽음과 삶에 걸쳐지는

그 어디에도 떨어지지 않는 요놈봐라

나는 말하고 싶지 않다.

아무 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다.


1985년 11월 15일

선불장(選佛場)2)

한 노스님의 회상.

선객이 너 댓 명 벽을 등지고 좌선 중에 있고, 그 중 나도 한 참학문도였다.

눈 푸른 납자들이 안광이 형형한 가운데

노스님만이 더 이상도 아니고 더 이하도 아닌 모습,

무공용(無功用)3)의 행위.

나는 스님의 입실제자였다.

스님은 나를 보고 계시었다.

그 후 밤마다 찾아드는 공부

그 후 밤마다 오롯함을 더하면서 찾아드는 선기(禪機).


* 꿈에 나타난 노스님은 어느 날 ?임제록연의?를 들치다 서옹선사인 것을 알다.


1985년 12월 21일

꿈은 꿈이었다. 삶도 꿈이었다.

꿈 아래 홀연히 찾아드는 꿈.

허! 그건 의식의 반영 없이 그대로 보라는 꿈이었지.

결국 그 꿈은 의식을 절실히 간직한 후

도장과 같이 찍혀 남는 흔적.

무무인(無拇印)4), 도장을 찍되, 도인을 남기지 마라는

꿈, 연발 일어나는 그 놈은,

그렇다. 도장을 찍더라도 도인은 남기지마는,

남길 수 없는 그 놈

고놈은?


1986년 2월 9일.

생일이었지

음 정월 정일

나는 졸업을 하고 쌓여도 쌓여도 더 쌓일 것 없는

그런 생일이었지.

부모미생전(父母未生前)의 나

그런 건 개한테나 주어, 참학인(參學人)의 속이나 편하게 하라.

그러나 말마라, 먹어도 먹어도 먹지 않는 내 나이.

날마다 나는 생일, 나는 생일

이날 나는 무시이래(無始以來) 고향에서 생일을 맞다.


소쩍새 소쩍다

소쩍다 소쩍새

옛 하늘 속에 소쩍다는 소리

옛 물결에 물결 이어서 일고

옛 사람 오늘도

소쩍다 소쩍새

소쩍새 소쩍다


나는 위산선사(潙山禪師)가 그의 제자 향엄(香嚴)에게 자네의 총명과 재주가 대단함을 나는 짐작하네. 그러나 우리에게 생사문제가 가장 근본적이라는 걸 자네는 인정할 걸세. 자, 그럼 나에게 자네가 부모에게서 태어나기 이전의 어떤 상태에 있었는지 이야기 해 주게.를 읽다가 문득 어디선가 병과 병이 마주치는 소리를 듣다가, 홀연히 심안(心眼)이 빛을 따라감을 보다가, 부모미생전(父母未生前)의 나가 임을, 도저히 알 수 없음을 알았다. 나는 웃었다. 콸콸콸 물 빠지듯 꼭 하루하고도 하루 낮을 웃었다. 끝내는 우스워 웃었다. ― 고불(古佛)의 공부도 별로 기특할 것이 없었군.― 1700공안 모두 한데 묶어 화장실 벽에 꽂아두라. 다시 한 수 적다.


옛 사람 홀연히 안광이 길을 찾는단 그 말 속지 말자 눈 감아도 감아도 안광의 길은 암흑만큼의 깊이에서 빠져나고 온 우주에 올연히 솟아 오른 병 부딪는 소리. 이 사람아 조주(趙州) 그 영감 차5) 말고 내 한 잔 주지 휘파람으로 달빛이 연못을 뚫어도 흔적 없다 누가 말 하던가 오직 연못을 뚫고 있을 뿐 일세


이 「자정일지」는 나의 40세 무렵의 파편이다. 그리고 1985년 12월 21일은 마흔들던 1월 1일 원단(元旦)이었다. 이 때에 찾아드는 내 정신의 변화는 다음 기회에 소상히 밝히기로 한다.


실눈을 뜨시고 미미소를 머금은 채, 어눌한 나의 말을 들으신 스님은 가느다란 솔바람 같은 소리로 나에게 물었다.

거 참 좋은 거 알았군, 그럼 내 다시 묻겠네.

삼복이라서 더운지 하여튼 나는 꿇어 앉아 얼굴에 땀을 훔치고 있었다.

나는 심신을 다시 가다듬고 말씀을 기다렸다.

움직일 때나 움직이지 않을 때나 너는 너를 잘 보고 있느냐?

나는 망설이지 않고 언하에 예, 그러합니다.

그래 그렇군. 그럼 깊은 잠에서도 너는 너 자신을 잘 지키고 있느냐?

예, 그렇습니다. 냉큼 대답을 올렸다.

그래 그렇다. 너는 너를 참 잘 알고 있구나. 그러면 꿈 가운데도 너는 너를 마음대로 쓸 수 있느냐?

예, 그렇습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디 우리가 이 자리에 앉아 있을 수가 있겠습니까?

나는 몹시 냉정을 잃고 흥분을 즐기고 있었다. 고요가 깨어지고 있었다.

거 참 대단하군, 그래 꿈도 없고 잠도 없고 낮도 밤도 아니다. 그럴 때 너는 너를 잘 알 수 있느냐? 그러할 때 너는 어디에 있더냐?

나의 의식은 아득해지고, 몽롱해지고, 바래지고 있었다. 황망하여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었다.

나는 나도 모르게 꿈속에 있습니다. 모기소리를 내었을 뿐이었다.

봐라, 그건 모르는 거여, 하나를 몰라도 다 모르는 거여.

말씀이 들렸다. 넌 가짜야 가짜. 나는 나 자신에 대한 자책감과 자괴감으로 온 몸이 무너져 내려앉았다. 깊은 수렁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나는 긴 세월이 흐르는 착각의 침묵 속에 꼼짝 못하고 꿇어 앉아 있었다. 얼마가 지났는지 부운선화가 나의 겨드랑이를 부추이며 큰스님이 피곤하시니 물러가자고 하였다. 일어서는 순간 나는 나의 몸을 가눌 수 없이 지쳐있음을 알았다.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캄캄하였다.

스님이 일어나시어 문밖까지 나오셔서 요즘 수좌치고 그 만큼 공부하는 사람도 없다. 기특하다. 내 년 이 때 다시 오라. 대략 이런 말씀을 하시며 어깨를 두드려 주셨다.

나는 버스 차창에 얼굴을 기대고 영동고속도로를 버스가 되어 달리고 있었다. 차창엔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는 사내의 얼굴이 비쳤다.


1985년 서옹스님과 첫 만남은 이렇게 끝났다.

그 후 나는 1년간 서옹스님을 가슴에 안고, 공부가 순일하지 않을 때는 스님의 미미소를, 형형한 안광을, 스님의 가늘고 긴 목소리를 떠올리며, 오직 이 문제를 끌어안고 1986년 8월을 맞이한다.

1년을 여삼추(餘三秋)와 같이 보낸 나는 백양사와 운문암, 서울 백운암으로 전화를 하면서 스님이 계시는 곳을 확인하였다. 다음 일요일에 무학재 넘어 수국사에서 대중법문을 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한 걸음에 강릉에서 달려간 나는 수국사에 들어서자마자 스님을 찾았다. 마치 스님께서 대웅전 옆 작은 방에서 법문할 준비를 하고 계셨다. 급히 스님께 삼배의 예를 올렸다.

너 왔구나.

하시며 얼굴에 환한 표정을 지으셨다. 그때 시자가 와서 스님 법문을 할 시간입니다.하는 전갈을 받았는데도 아무런 내색 없이 나를 물끄러미 건너보시더니 말씀을 하셨다.

그래, 그 때 어디 까지 했지?

예, 스님 오매중 일여(寤寐中 一如)하냐? 그렇다면 이 일여할 때 너는 어디에 있더냐? 속히 일러보아라.

까지 지난해에 했습니다. 나는 기다렸다는 듯이 소프라노로 읊었다.

응, 그렇군. 그럼 그럴 때 너는 어디에 있더냐?

나는 일어섰다 앉으며 단숨에 여쭈었다.

바로 여기입니다.

그러자 스님은 말이 떨어지자 말자 이르셨다.

거긴 그 자리라 해도 맞지 않는 거여. 이럴 때는 무어라 대답할 것인고?

하시며 대중법문이나 들어라하시는데 또 앞이 아득해졌다. 막 내 앞을 지나시는데, 장삼 깃을 당기며 나는 외쳤다.

이 자리입니다.

하니 잡은 나의 손을 홱 뿌리치시며 법상으로 올라가셨다.

나는 비를 맞으며 영동고속도로를 달릴 수밖에 없었다. 속절없이 내 앞에도 내 위에도 내 뒤에도 비는, 비는 내리고.


다시 1년. 또 다시 1년 8월 어느 날.

나는 매년 신춘문예를 기다리는 문학도가 되듯 어김없이 8월은 다가오고 나는 바싹 바싹 여의어만 가고, 공부는 점점 비워져만 가고, 이젠 살림살이랄 것도 없어지고.

어느 8월 한 해. 다시 백운암 방장에서 스님과 마주 앉게 되었다.

다짜고짜로 스님은 인사도 여쭙기 전에 물었다.

왜, 억울하냐? 억울한 건 너가 아니고 나다. 그럼 너라고 부르는 취현(나의 법명)은 뭐냐?

스님, 이 자리입니다.

그 곳은 이 자리라 해도 맞는 것이 아니다. 다시 일러봐라.

스님은 사정없이 정신을 차리지 못하게 나를 몰고 갔다. 나는 막다른 절벽에서 뛰어내리지도 못하고 돌아설 수도 없는 곳에서 1년 또 1년을 보내고 다시 1년 같은 하루를 진공 속에서 맞이하고 있었다.

그래, 그래도 억울하냐? 그럼 다시 한 번 해보자. 나에게 보배로운 지팡이가 하나 있는데, 네가 가졌다면 나는 이것을 너에게 줄 것이고, 너에게 이 지팡이가 없다면 너의 지팡이를 빼앗아 가겠노라 하는 법문이 있는데, 너의 견해를 한 번 일러봐라.

일반적으로 이 법문을 이해코자 하면, 주장자가 없으면 주장자를 주고 주장자가 있을 때는 주장자를 빼앗는 것이 우리의 상식이다. 그런데 스님은 전혀 일상을 뛰어넘는 법문으로 나의 살림살이를 점검하신다. 잠시 후 나는 말씀을 올린다.

스님, 스님과 저, 모두 같은 지팡이 안에 있는데, 무얼 주고받는단 말씀입니까?

한참 침묵하시든 스님께서 나를 넌지시 건너보시다 하시는 말씀.

아니야, 아니야. 탕기에 때가 묻어, 때가 묻어 나. 다시 참구해라. 왜, 국민학생이 100m 달리기를 하는데 얼마나 열심히 달리는지 옆에 누가 뛰는지 누가 뒤 따라 오는지 모르고 달리지, 그렇게 참구하라. 마치 철봉대에서 마지막 턱걸이 하듯 말이야


이렇게 다시 1년의 세월이 지푸라기 같이 구겨지고 혹은 날 선 작두와 같이 시퍼런 상태에서 나를 추스르며 스님을 되삭이며, 스님을 따라 실참실수(實參實修) 하길 어느 듯 7년이 흘렀다. 돌이켜 볼 수 없는 시간 속에 나는 아무 것도 남지 않았다. 당시 나는 강릉 포교당에서 ?반야심경?을 강(講)하게 된다. 그리고 틈틈이 ?반야심경?주소를 나름대로 사기(私記)하고 이해한 부분을 새로운 체계로 적어 내려가 한 권 분량의 책이 되어서 출판을 하게 된다. 이 책을 쓰게 된 것 역시 스님을 처음 참문할 때부터 시작한 것이니, 한 7년 열심히 참구한 도리를?반야심경?의 말씀과 같이 적은 것이니, 곧 나의 살림살이 전부이고, 또 스님에게 보여줄 나의 전부인 셈이다.

이렇게 쓰여진 육필원고를 들고 다시 백운암에 들렸다. 당시 스님께서 심장이 좋지 않아 건강에 문제가 있다 하시며 일본에 병원을 하는 신도가 있는데, 한 번 다녀와야겠다고 말씀하셨다. 마침 그 당시 도반인 성철스님께서 입적한 때였다.

거, 보따리에 든 것이 무어냐?

예, 저가 스님을 처음 찾아뵐 때부터 수선일지 삼아 쓴?반야심경?육필원고입니다. 스님께서 서문을 받고자 합니다.

허허, 선승이 뭐 글이 있나,

하시며 한사코 사양하신다. 그러나 나도 물러설 수 없는 외길이라 계속 졸랐다.

스님, 바로 그것이지요. 선승이 글이 없다고 한 자 적어주시면 서문으로 싣겠습니다.

그럼 ?심경?을 오래 탐구하였으니, 물어보자. 어떤 이는 반야바라밀(般若波羅蜜)을 요체라 하고, 어떤 이는 마음 심자(心字)를 요체라 하고, 또 어떤 이는 색즉시공 공즉시색(色卽是空 空卽是色)을 요체라 하는데, 너는 무엇을 반야의 요체(要諦)라 할 거냐?

예, 저는 모든 이들이 보는 바를 부정하지는 않습니다. 그렇지만 스님께서 물으셔서 굳이 말씀을 드린다면, 마하는 반야요 반야는 바라밀이고 바라밀은 다이고 다는 심이며 심은 경입니다. 또 관은 자재이고 자재는 보살이며 보살은 행이요 행은 심이고 심은 반야이며 반야 역시 바라밀이며 다이고 시며 조견이고 오온이며 개공도입니다. 저는 이 도리가 이러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반야심경?270자를 이어 암송하려 하는데,

그래 그래, 그만 됐어. 그럼 어디 무지역무득(無智亦無得)을 펼쳐보게. 그 곳을 읽어 봐.


나는 무지역무득의 장을 펼쳐 열심히 읽는다. 2쪽 가량 읽는데,

그만 되었다. 그 것 두고 가거라.

한 달포 후 스님한테서 기별이 와서 달려갔더니 다음과 같은 게송을 서문으로 주셨다.


사진 ― 1991년 서옹선사(80세), 필자(45세)

 

반야의 칼이여 부처와

조사를 처죽이고

싶어런 칼을 쓰고는

급히 갈어라 나무 까치는 날러서

하늘 밖에 사모치니

바로 천 봉오리 만

산악을 통과해 가도

佛紀 2535年 辛未年 4월 3일 西翁


이날 나는 카메라 필름 한통에 스님의 사진을 담았다. 왠 일인지 스님과 혹시 마지막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나는 내내 마음으로 울곤 했다.

그리고 다시 1년의 세월이 흘렀다. 되돌아보면, 이 당시 심신이 지칠 대로 지쳐 70kg의 몸무게가 57kg 정도로 바싹 말라 갔고, 공부의 무게는 모두 발산되어 1g도 안될 정도였을 터이니. 나는 죽음도 무방하다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들곤 하였다.

가을 백운암으로 스님을 뵈려가고 있었다. 봄에 찍었던 스님의 진영을 확대하여 가지고 조실을 찾았다.

오, 너 왔구나. 가지고 온 것은 뭐냐?

예, 스님의 진영입니다. 제 마음에 썩 들어서 한 장 크게 뽑았습니다.

하며 20호 크기의 스님의 진영을 내 놓자 거 참 천진하게 되었구나. 하시며 기뻐하셨다. 갑자기 스님께 나도 모르게 물었다.

스님, 저가 만약 마지막 참문제자로 너의 스승 서옹의 진면목(眞面目)이 어떻더냐고 묻는 사람이 있다면 저는 어떻게 대답해야 되겠습니까?

말이 떨어지자 말자 스님은 벌떡 일어서시며 나를 의미심장히 보며 외쳤다.

너, 반야 있쟎냐? 반야 말이야. 나는 반야다 반야야.

움추린 스프링이 티 듯이 지금도 잔음(殘音)이 남도록 고유한 가늘고 긴 소리, 나를 꼼짝할 수 없도록 몰아갔다. 나는 이제는 속지 않는다 하는 마음으로 조용히 일어서서 스님을 부축하며 말씀을 드렸다.

선지식이 중생들에게 그렇게 어렵게 법문을 하시면 누가 알아듣겠습니까? 스님 진중하십시오.

그래, 그럼 너는 어떻게 말할 거냐?

언하(言下)에 전광벽력(電光霹靂)과 같이 외쳤다.

나도 반야다. 나도 반야야.

스님은 나를 한 참 보시더니 크게 웃으시며 말씀하셨다.

넌, 역시 반야를 잘 숙지하고 있구나. 그러할 뿐이다.

대략 더듬어보니 스님께 참문한지 7년이란 세월이 갔고, 조사 앞에 머리 숙여 서래밀지(西來密旨)를 물은 지 꼭 7번이 될 때였다.

서옹당 상순 대종사님의 간절 노파심은 이와 같았다.



다시 한 해가 가고 여름 어느 날 새벽 4시경 혼곤한 잠 속에서 스님의 전화를 받는다.

취현이여, 나 아마 5일 정도에는 일본에 가야할 것 같아. 가슴이 영 좋지 않아. 아마 수술을 할지도 모르지.

힘이 없는 목소리. 피곤하게 느끼는 목소리가 전화를 타고 들려왔다.

이날 나는 새벽 6시 버스를 강릉에서 타고 곧 바로 스님에게로 달려갔다. 한 여름이 막바지인 8월 말일인 듯싶다.

10시 쯤 백운암 조실에 드니 제주도에서 올라온 법화원에 계시는 시몽스님이 앉아 있고, 당시 스님의 시자가 있은 듯하다. 스님은 반가워하시며 나에게 몇 가지 물건을 주시며 징표로 삼으라고 하셨다.

고방선사의 ?벽암록?과 스님 직접 친필로 현토하신 ?신심명?. 수처작주(隨處作主)라고 쓴 스님의 대필 글씨, 스님이 직접 수결 낙관한 스님의 저서 서옹연의 ?임제록?그리고 백양사 법맥을 인쇄한 계보 첩. 그리고 「시 송월조거사 (示 宋越祖居士)」라고 쓴 진리의 노래를 주셨다. 그 게송은 아래와 같다.


송월조거사에게                       示 

마음을 열어보이다                     宋越祖居士

 

부처와 조사를 초월하니

이 사람이 진인이다                    超佛越祖是眞人

면밀한데서 일보 이동하니

날으는 용을 보도다                    密移一步見飛龍

진리의 향주머니를 따서 깨드리니

온 나라가 훈훈하고                    摘破香囊熏大國

하늘 틈을 버선목 뒤집듯 열으니

맑은 바람이 울부짖도다                 撥開天窺吼淸風

 

임신년8월15일 서옹                    壬申八月十五日 西翁


게송을 주시며 말씀하셨다.

내가 네 이름을 하나 지었지. 월조야, 월조.

옆에 잠자코 있던 시몽스님이 월조는 달월 비칠 조자입니까, 하고 물으니 스님께서 아니야 뛰어넘을 월자에 할아비 조자야 하시었다.


아! 돌이켜보면 조사께서 나투신 간절 노파심이 이토록 지극하셨는데, 스님의 뜻을 전혀 받들지 못한 나는 오늘도 이렇게 허무맹랑(虛無孟浪)하게 살고 있지 않는가.

스님이 이르신 직절(直截)의 말씀, 끝내 가르쳐주지 안한 그 적절의 말씀. 부처와 조사, 천하의 선지식도 말씀하지 안한 그 말씀을, 오늘 전 매스컴을 통해 세간에 또 한 번 열반의 소식을 전하니 눈 있는 자 듣고 귀 있는 자 볼 뿐입니다.

?금강경?에 이르기를,

 

만약 모습으로 나를 보려 하거나

음성으로 나를 구하려 하면

이 사람은 삿된 도를 행함이니

여래를 보지 못하리라.


하신 것과 같이 스님의 가르침은 무릇 이와 같았습니다.


극락에서 무간지옥으로 들었다 해도,

무간지옥에서 극락으로 가셨다 해도,

무간지옥에서 무간지옥으로 옮기지 안했다 해도

부족합니다. 

실눈을 잘게 뜨신 참사람이

걸음도 당당하게 무간지옥에 들고

가없는 광명의 하늘 틈이 펼쳐집니다.

무간지옥이 된 눈먼 당나귀

소자(小子)

몰록, 일할(一喝)을 바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