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들이는 힘에 저항하는 부정적 지성
이 양 현
1
이수명의 ?고양이 비디오를 보는 고양이?와 유홍준의 ?喪家집에 모인 구두들?는 시적 성향이나 기법면에서 확연한 차이가 나는 시편들이어서 양자를 한 자리에 논하는 것 자체가 무리일 수도 있다. 그러나 세계를 해석하고 수용하는 방식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폭넓은 접점을 공유한 시인들이다.
시는 억압과 길들이려는 힘에 대항하는 부정의 지성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비천한 삶의 언저리를 쓰다듬어 그 삶과 하나가 되는 것이기도 하다. 이수명의 시는 부정한 현실에 날카로운 비수를 들이밀면서도 그 현실을 어루만져 다독여 줄 수 있는 따스함을 지닌 시편들이다. 시인은 폭력적인 억압구조 속에서 외로운 자유를 꿈꾸며, 정신의 심연에서 생의 기억들을 길어 올리는 ‘사고의 받아쓰기방식’으로 시쓰기를 시도한다. 그런 의미로 본다면 그의 시쓰기는 억압적이고 폭력적인 현실에서 내면의 자유를 찾아가는 길찾기의 형식이며, 그 현실 속에서 독자적인 세계를 창조하는 작업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수명이 인식한 세계가 추상적인 것이며 비현실적인 성격을 띤 것이라면 유홍준이 인식하는 세계는 경험적이며 구체적인 것들이며 현실적인 것이다. 시인이 추구하는 세계가 경험적인 것들이기 때문에 그것을 표현하는 언술방식 역시 직설적이고 원시적이다. 그가 경험하고 기억하고 퇴적된 생의 모습은 죽음, 육질, 부패와 소멸, 구속 이미지들인 핏물같은 것들, 썩어가는 고기 같은 것들, 가위로 절단되는 것들, 우리의 살 속으로 파고드는 죽음의 뿌리같은 것들이었고 그것들은 그로테스크한 괴기스러움을 발산한다. 그러나 그는 이런 끔찍한 생의 흔적들을, 이 치욕스런 현실들을 고통스럽게 끌어안고 꼭꼭 눌러서 삭히고 발효시킬 줄 안다. 그의 표현대로 그의 시편들은 만신창이의 상처를 너덜너덜 깁고 꿰매고 잇대어 만든 나뭇가지 같은 것이었다. 그러나 그 가지는 이미 그 내부에 꽃과 이파리를 잉태한 가지다.
좋은 시를 읽고 나면, 그 시의 이미지들이 그의 상상력을 자극하여 미적 감동을 불러일으키고 경이적인 정신적 체험을 하게 된다. 그것은 자신이 태어난 것 같은, 자신의 영혼이 쇄신된 것 같은 신선한 충격이 될 것이다.
2
이수명의 현실인식은 구체적인 시공을 가진 구체적인 대상이 아니라 구체적 설명이 삭제된 추상적 대상이다. 그러므로 그의 시에 나타난 이미지는 현실적 요소를 지녔다기보다 정신적 요소가 강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이런 이미지들은 잠재의식, 또는 무의식 속에 숨어있다 어느 순간 의식 밖으로 용출하는 무의식과 긴밀히 연관되어 있다.
그래서 그의 시에 나타난 이미지들은 원시적이기도 하고 충격적이기도 하다. 참을 수 없는 상태에서 내지르는 비명소리, 참을 수 없는 충동으로 울타리를 뛰어 넘는 짐승, 찍어내고 싶은 욕구로 번득이는 도끼날은 시인의 내면에 오랫동안 각인되었던 대표적인 현실 이미지 다. 이것은 그의 시가 원시적 충동의 영역, 한마디로 무의식의 영역을 지향하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이런 의미에서 그의 시는 독자들이 원하는 특정한 의미론적 자장이나 문맥, 감정의 촉수를 지니고 있지 않다. 그 대신 그의 시에는 삶의 원형만이 존재한다. 꾸밈과 의도, 의미의 흔적을 지우고 인간 본래의 진실 벌거벗은 외침만이 존재한다.
벽을 타고/비명소리가 마구 올라갔다./나도 따라 올라갔다./……/사방에서 화살들이 날아왔다./날아와 부러졌다.
― 「비명소리」부분
벽에는 도끼가 있다./벽을 따라 흘러다니는, 벽처럼 고여 있는 도끼가 있다./벽에서 도끼를 꺼내라./……/부서지는 존재의 비명을 부순다.
― 「벽을 바라보는 눈」 부분
거리에서는 한 블록을 지날 때마다 매복되어 있는 짐승을 만났다./……/나는 본적도 없는 거대한 짐승 하나가 내 안에서 뛰쳐나가는 것을 보았다./ ……/지붕의 기왓장들 하나하나가 차례로 떨어져 내렸다.
― 「또하나의 탈출」부분
빈방, 벽, 입없는 사다리, 복제된 사다리 부러진 화살이 내지르는 비명소리라는 소재를 통해 절망적인 심리상태를 표현한 작품이다. 「비명소리」의 비명소리는 빈 병에서 열린 커튼 사이로 확대되어 벽을 타고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고 그 소리가 복제된 사다리에 의해 무한한 공중으로 확대된다. 그리고 그것들이 화살이 되어 나를 향해 날아와 부러진다. 자아를 정점으로 하여 세계가 엉켜들면서 지르는 비명소리는 섬뜩하지 않을 수 없다. 사물들의 비명소리, 나를 둘러싼 비명소리 , 부러지는 화살들의 비명소리들은 자아가 외부 세계로부터 느끼는 불안의식이며 공포의식이라 볼 수 있다. 아무도 없는 어둠 속에서 방향을 알 수 없는 곳에서 들려오는 비명소리로 표현되는 공포의식 불안의식은 뭉크의 ?절규? 속에 나타난 불안과 공포를 환기시켜준다. 벽을 타고 피빛으로 사방으로 번져가는 비명소리, 자아를 향해 화살이 되어 내 앞에 자아를 공격해 오는 외부적 압력이라 볼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자아는 공포에 질린 상태라 볼 수 있겠다. 이런 현실에 시인 대항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시인은 비명소리와 함께 같이 올라가 비명소리처럼 화살이 되어 같이 부러지는 것이다. 그는 절규하고 소리치는 것이 아니라 그 소리에 사로잡혀 그 소리와 필사의 혈투를 벌이는 것이다. 「벽을 바라보는 눈」의 벽을 따라 흘러다니는 그리고 벽속에 고이는 도끼는 섬뜩한 공포라 아니할 수 없다. 그러나 시인은 도끼를 꺼내 그 도끼를 부순다. 도끼를 들어 현실에 저항한다.
이수명의 시를 읽으려면 기존의 시 읽는 방식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의 시는 기존의 언어관습를 따르지 않고 독자적인 언술방식을 구사하며 이미지의 산출 방식 역시 기존의 방식을 따르지 않는다. 그의 이미지는 다른 사물과의 비교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정신의 순수한 창조에 속한다. 잠재몽이 현재몽으로 바뀌어 나타나 머릿속에 떠오르는 이미지를 그대로 쏟아놓은 사고의 받아쓰기 방식을 구사한다. 그의 언어는 대상에서 벗어나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있는 언어유희적인 성격이 강하다. 기존의 시문법에서 벗어난 언어유희적 언술은 그의 미지의 세계에 대한 탐구의식에서 비롯된 것이다.
나는 미지 자체를 즐긴다. 그래서 시를 쓴다. 시적 탐구와 발견과 충격으로 경험하게 될 미지의 소용돌이에 휩싸이는 것. 그것이 시다. 사실 사물들은 눈앞에 언제나 미지의 상태로 존재한다. 기존의 관념과 인식이 가 닿지 못한 이 미지를 열어 보는 것. 우리의 몸과 삶이 이미 속해 있지만 관습에 젖어 알지 못하는 삶의 미지의 영역을 개척하는 것은 우리의 감각과 현실을 확장시켜 준다.1)
시인은 미지의 것과 만나기 위해 그 스스로 미지의 언어를 구사하며 미지의 사물들을 창조한다. 그래서 그의 시 속에 나타난 고양이들은 경험의 세계에 존재하는 고양이는 아니다. 사람들이 알고 있는 고양이가 새로운 관념의 고양이다. 시인은 고양이에 대한 관념을 지우고 전혀 낯선 고양이를 생산한다.
고양이를 관람하는 고양이들//…………/거대한/고양이 인형들//모두들 고양이를 추모한다/고양이 비디오를 틀어놓고//모두들 고양이 흉내를 낸다./고양이를 끄고 싶은데/고양이 비디오를 끄고 잠들고 싶은데/비디오는 계속 돌아가고//………
― 「고양이 비디오를 보는 고양이」 부분
고양이들이 고양이 비디오를 틀어놓고 우아하게 앉아 고양이를 관람한다. 비디오 속의 고양이는 거대한 고양이 인형으로 변주된다. 고양이들은 고양이를 위한 추모행사를 갖기도 한다. 이 고양이들의 모습을 주목하여 고양이를 쫓다보면 온 세상에 고양이로 가득 찬 것 같은 착각에 빠진다. 지구의 인간들이 고양이로 교체되고 그리고 인간의 모습은 사라진다. 인간이 고양이에 의해 사라지고 시적 대상인 고양이가 시인까지 삼켜버린 형식이 된 것이다. 삼킨다는 것은 욕망한다는 것이고 욕망의 대상과 하나가 된다는 의미다. 욕망의 대상인 고양이들은 이제 비디오 안의 고양이를 흉내내며 끊임없이 고양이를 소비한다. 고양이에 의해 세계가 생산되고 고양이에 의해 세계가 소비된다. 생산과 소비의 형태로 세상은 비디오 테이프처럼 쉬지 않고 돌아간다.
고양이는 이제 비디오를 끄고 잠들고 싶어한다. 그러나 고양이는 비디오 테이프를 끌 수 없다. 고양이는 비디오 앞에 계속 앉아 같이 돌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기계에 연결된 비디오 테이프는 계속 돌아가고 고양이도 계속 돌아가고, 고양이 비디오가 고양이를 소비시키는 악순환은 계속된다. 비디오 테이프를 따라 돌아가는 고양이라는 상황설정은 상당히 재미있다. 시인은 고양이가 고양이를 보는 풍경을 통해 현대문명의 거대한 톱니바퀴에 끼인 채 욕망이라는 사슬에 꿰인 채 살아가는 비인간화된 모습을 보여준다. 아무런 의식없이 고양이를 흉내내며 비디오를 관람하는 고양이들은 삶의 주체로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다. 거대한 전체속에 보잘 것 없는 부품으로 구속되어 살아가는 객체화된 생의 풍경이다.
시인은 이런 현실에 부조리를 느낀다. 부조리를 의식한다는 것은 현실에 허무를 느낀다는 것이며 그 현실을 부정한다는 의미다. 시인이 부조리한 현실을 놀이처럼 다룬다. 그 현실에 유머로 접근한다.
그가 마네킹을 끌고 간다./지나치는 상점마다 마네킹들이 서 있다./상점의 유리 너머에서 마네킹들이 그를 보고 있다.//한낮의 거리를 그가 마네킹을 끌고 간다./두 개의 그림자가 엎치락뒤치락한다./어디선가 깔깔대는 소리가 들린다.//그는 멈추어 서서/ 몸에 꽂히는 웃음소리를 뜯어낸다./그를 잡고 있는 마네킹의 손가락들을/뜯어낸다.//……/상점의 유리 너머에서 마네킹들이 그를 보고 있다./그가 마네킹에 끌려가는 것을/땀을 뻘뻘 흘리며 끌려가는 것을
― 「마네킹」 부분
마네킹이 바라본 삶의 풍경들’로 해석된다. 여기에서 마네킹의 시선은 절망을 경험한 자가 세계를 바라보는 시선이며, ‘상점의 유리 너머’에서 세계의 움직임을 바라보는 유머니스트의 시선이다. 추악하고 거짓투성이인 현실에 절망하면서도 그것들을 나와 상관이 없는 것인 듯 초연히 내려다보는 자의 시선이라는 점에서 절망의 가면, 불랙 유우머다.
시인은 ‘그가 마네킹을 끌고 간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것은 그의 착각일 뿐이다. ‘깔깔대는 웃음 소리’가 이를 설명한다. 그는 깔깔대는 웃음소리를 뜯어내고 또 다시 마네킹을 끌고 간다. 그러나 그는 안다. 그가 끌고 다니는 육신이 진짜의 자기 육신이 아니라 자신에게 맞지 않는 헐렁한 시체라는 것을 스스로 인정한다. 자아를 ‘몸에 꼭 맞지 않는 한 덩어리의 시신’으로 또는 가짜 인간인 마네킹으로 인식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끌고 가는 자/ 끌려 가는 자’ 가해자가 되기도 하고 피해자가 되면서 한낮 길거리에서 벌이는 해프닝은 지극히 비정상적인 상황이고 사물이 전도된 상황이다. 시인은 이런 비정상적인 상황을 깔깔대는 웃음소리, 들어붙는 마네킹의 손가락이 환기하는 이미지와 결합시키면서 진짜가 가짜에 끌려다니는 모습을 장난스럽게 보여준다. 뒤프레시스에 의하면, 유머리스트는 눈앞에 펼쳐지고 있는 생의 모습을 인형들의 움직임으로 파악하고 끄나불에 의해 조종되는 인형들의 기괴하고 부조리한 모습을 냉담한 자세로 바라본다고 한다. 그들은 외면적 현실에 냉담한 방관적 자세를 취하면서 유머러스한 상황을 진지하게 연출한다.
사람이 인형을 끌고 다니다 이제 인형이 사람을 끌고 다니는 풍경, 유리문 너머에서 깔깔거리며 웃고 있는 마네킹, 웃음소리를 무시하고 고집스럽게 인형을 끌고 가다 또다시 끌려가는 사람, 이런 상황연출은 소극에 가깝다. 사물이 제 위치를 벗어나면 낯설다, 우습다. 이것은 듀썅이 시도했던 화장실 변기가 샘이 되는 것과 같은 유머다. 광장에 위엄있게 세워져야할 동상이 진흙탕에 던져짐으로써 얻어진 초현실주의적 유머다. 시인은 폭악한 상황, 불안하고 절망적인 현실을 웃음을 통해서 우습고 재미있는 상황으로 뒤집어 놓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유머는 예상하지 않았던 것에 의해서 정신을 딴 방향으로 이끌어 관습적인 면에서 이탈시킴으로써 다른 실재 즉 초실재를 보여준다. 시적 장치로써의 전도는 본원적인 존재로 환원하고자 하는 존재들의 꿈을 담아낸다. 시인은 정상적인 상태에서 벗어난 상태, 사물의 위치가 뒤집어진 상황을 장난스럽게 드러내면서 원래의 사물의 본래 위치를 묻는 것이고 본래의 위치로 환원하고자 하는 사물의 꿈을 담아낸다.
3
유홍준은 고기, 부패, 소멸, 구속, 죽음 이미지와 연관시켜 현실을 바라보고 있다는 점에서 그의 세계관은 부정적이고 비극적이다.
그 나무는 지겨운 초록빛이다/그 나무는 너를 물들여 죽이려 한다./그 나무는 네 눈알을 후벼팔 까마귀를 깃들인다/그 나무는 네가 목매달아야 할 가지가 자란다./그 나무는 네가 입어야 할 관을 키운다/ 그 나무는 네 아버지 무덤 위에 자란다
― 「그 나무는,」 부분
나무는 생명이고 자라는 것이라는 점에서 생성이미지다. 그러나 시인이 인식하는 나무의 이미지는 죽음이며 소멸이며 공포다. 시적 화자는 나무라는 존재를 ‘초록으로 불들여 죽이는 것’, ‘눈을 후벼팔 까마귀의 둥지’, ‘목매달아야 할 가지’, ‘시체를 눕힐 관’, ‘무덤 위에 자라는 것’으로 인식한다. 초록으로 무성히 자라는 나무는 뜨겁고 열정적인 생의지의 표상이 아닌 죽음의 표상으로 기술된다. 화자는 나무를 통해 생이 시작되는 순간부터 죽음이 뿌리내리고 있다는 사실을 냉엄하게 바라보고 생과 사의 심연을 들이댄다. 「식사」나 「절편」에 나타난 현실 의식은 더 끔찍하고 처참하다.
의자를 놓고 앉은 사람이 가위를 쥐고
일렬로 늘어선 자들의 성기를 잘라 국솥에 던져넣는다//………
숟가락 위에 고환을 떠 얹고/먹을까/말까//
망설이는,/망설이는,망설이는 煉獄의 아침//
― 「식사」 부분
떡방앗간 기계 헐떡거리며 혓바닥 내민다/떡집 여자 가위를 들고/쉴 새 없이 혓바닥을 자른다/
― 「절편」부분
‘가위로 잘려나가는 성기, 사타구니 휑한 사람들의 식사’, ‘헐떡거리는 기계, 쉴 새없이 잘려나가는 혓바닥’은 억압적인 구조 속에서 잃어가는 본원적인 가치들에 대한 상실감, 소멸감을 표현한다. 잃어버린 인간다움 삶일 수도 있고, 조상들의 기억 속에 저장된 신화같은 소중한 가치일 수도 있다. 크로노스는 아버지 우라노스의 성기를 자른다. 크로노스는 시간의 신이다. 시간 앞에서는 어느 것도 영원히 지속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성기를 잘라내고 혓바닥을 잘라내고 시간 속에 무의미하게 소멸되어 가는 것이 생이라는 의식을 드러낸 것이다. 여기에서 먹는 행위 역시 시간을 죽이는 행위이며 이것은 자신의 생을 소비하는 행위이기도 하다. 숟가락 위에 고환을 떠 얹고 망설이는 화자는 이런 생의 냉혹한 질서에 사로잡힌 자신을 들어다 본다. 그의 시편들은 대개 소멸이나 흔적이나 육질이미지를 띠고 나타나는데 이러한 이미지들을 통해 시인은 생은 화려한 것이 아닌 냉혹한 것으로 생성 지향적이 아닌 소멸지향적인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시인이 마주한 현실은 ‘검은 활자로 가득차 있는 책’으로 ‘주둥이가 지퍼로 잠겨진 채 매장되는 구속적인 세계’(「하품하는 책」)로 표현되기도 하며, ‘처음부터 폐쇄된 비상구’, ‘섹소폰처럼 웅크린 채 항문으로 우는 세계’(「우울한 자의 시간」)처럼 우울하게 갇혀 검게 썩어 가는 세계로 표현되기도 한다.
소멸, 구속, 부패, 상실이미지로 포착된 세계인식은 그이 죽음의식과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다. 죽음의식은 인간존재에 대한 구체적 관심과 집착으로 연결되며 이런 관심은 신발 이미지로 형상화된다. 신화나 민담 속에서 신발은 자아정체성을 의미한다. 숙부에게 왕의 자리를 빼앗겼던 이아손은 ‘외짝 신 사내가 왕이 된다’는 예언에 따라 왕의 자리를 되찾았다. 테세우스 역시 신발과 검을 들고 가 아버지를 찾게 되었다. 신발은 내가 누구인가에 대한 답을 준다는 점에서 자기와 동일시된다.
시적 소재로 신발에 대한 집착은 그에게 인간이라는 존재에 대한 성찰로 이어졌다. 그리고 신발을 찾는 행위는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행위라고 볼 수 있다. 여기에서 시인은 신발을 통해 현재의 생은 완전한가. 그 속에 중요한 무엇인 빠지지 않았는가. 등을 반복해서 묻는다
저녁 喪家에 구두들이 모인다/아무리 단정히 벗어놓아도/문상을 하고나면 흐트러져 있는 신발들/젠장 구두가 구두를/짓밟는 게 삶이다/밝히지 않는 것 亡者의 신발뿐이다./정리가 되지 않는 喪家의 구두들이여
― 「상가에 모인 구두들」 부분
상가집은 산 자와 죽은 자가 한자리에 모인 곳이다. 신발을 벗고 북천으로 떠나야 할 자와 신발을 신고 일상으로 되돌아 갈 자가 모인 곳이다. 죽음은 어느 누구도 피할 수 없는 것이기에 누구에게나 엄숙하고 장엄한 것이다. 그래서 엄숙한 자세로 죽음을 보내는 의식을 갖는다. 그러나 분주한 일상에 시달리는 일상인들에게는 죽음조차 분주한 일거리들 중의 하나일 뿐이다. ‘흐트러진 신발’은 죽은 자를 대하는 산 자의 흐트러진 마음에 대한 비유적인 표현이다. 망자에 대한 문상은 의례적으로 치러야할 인사치레일 뿐이지 망자에 대한 경건한 조의는 아닌 것이다. 문상을 마치면 그들은 짓밟히고 짓밟는 일상으로 복귀된다. ‘돼지고기 삶는 마당가에 어울리지 않는 화환 몇 개 세워 놓고/ 봉투 받아라 봉투,/화투짝처럼 배를 까뒤집는 구두들’ 이 그것이다. 그래서 죽음의 현장은 가장 세속적인 장소로 전도된다. ‘흐트러진 신발-정리되지 않는 신발-화투짝처럼 뒤집힌 신발’은 물신주의적인 공간으로 흥청거리는 상가집의 풍경을 사실적으로 묘사한다. 또한 이것은 물신주주의에 물들어 욕망에 뒤집혀진 내면의 풍경들이기도 하다. 그래서 시인은 현실에서 비껴선 자리, 담장 밖에서 북천에 뜬 신발자리 별을 바라보게 된다. 헐거운 신발을 신고 바라보는 그 동안 잊고 있었던 잃어버린 신발의 모습으로 화자의 미적 대상이다. 그것은 고단한 일상의 권태와 물질의 질곡으로부터 벗어나 정신의 투명함과 그 자유로움에 도달하고자 하는 인간적 염원이기도 하다. 이 작품은 죽음의 현장에서 바라본 삶의 비루함과 그 비루함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인간의 꿈에 관한 것이다.
떨기나무 아래 비둘기가 쓰러져 있다/나는 나무보다 지겨운 修道者, 죽은 비둘기를 걷어찬다/죽은 비둘기 고기를 뜯어먹으며 벌레들이 예배를 드린다/기도를 올린다 서쪽하늘에 光輝가 번진다 광휘 속에 부활한 벌레들이 꿈틀거린다 아름답다
― 「聖금요일의 노을」 부분
‘수도사의 발에 걷어 채인 죽은 비둘기’, ‘비둘기 고기를 뜯어먹는 벌레’, ‘꿈틀거리는 벌레들로 가득 찬 붉은 노을’이 기묘한 연결고리를 형성하면서 죽음과 삶의 알몸을 드러내 준다. 여기에서 ‘죽은 비둘기’, ‘죽은 고기를 뜯어먹는 벌레’ 이미지는 그로테스크한 삶의 실체를 드러내주는 소재다. 그러나 그로테스크한 삶은 뜯어먹은 행위라는 육체적 동일화 과정, 예배와 기도라는 정신적 동일화 과정을 통해 아름다운 노을로 승화된다. 거칠고 비루하고 뒤틀린 생이 해체와 죽음의 과정을 거쳐서 투명하고 아름답고 영원성을 지닌 것으로 변화된 세계를 보여준 것이다.
4
세계의 폭력과 부패를 예리하게 점묘시키면서 형식의 새로움을 제시하고 있는 두 시집은 개성성의 개발을 적극적으로 이끌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을 요한다. 세계에 존재하는 부정적 징후들을 표현으로 끌어 올려 굳어버린 사고와 행동에 충격을 가하면서 본원적인 것을 돌아보게 하는 시편들은 우리들이 잃어버린 것은 무엇이며, 무엇을 찾아내야 하는지를 직관적으로 제시한다.
현실은 늘 뒤틀려 있다. 뒤집기를 해 보아도 마찬가지다. 그렇다고 마냥 뒤틀림 속에 구겨져 있을 수만은 없는 것이 삶이기도 하다. 꿈은 그런 절망감, 죄절감에 희망을 준다. 시는 희망으로 가는 통로를 마련해준다. 그런 의미에서 시는 꿈꾸기다. 시로 꾸는 꿈은 메마르고 뒤틀린 삶에 생기를 주고 황폐한 정신에 미적 감동을 준다.
?고양이 비디오를 보는 고양이?와 ?상가집에 모인 구두들? 시편들은 뒤틀린 세계를 발가벗겨 내면서 그것을 어루만지는 방법을 제안하며, 그런 현실을 발효시켜 향기로운 술을 빚는 방식을 제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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