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文學과 評論

더위를 식혀주는 시 한 편

by 담채淡彩 2021. 7. 29.

막사발 속 섬에 사는 이에게 / 이병철

 

 

막사발에 달 떴다

노릇노릇한 달이 무인도처럼 탁주 위에 혼곤하다

 

술잔에 달빛 섬 띄워 놓고 자암의 외로움도 꽃 지듯 붉었겠다 쌀독에 얄팍하게 쌓인 쌀을 불려 술 담근 게 지난여름 일이다 누룩이 별을 흉내 내며 허연 쌀물 위에 어리비치더니 귀뚜리 울음 먹고 달짝지금한 빛으로 찰랑였다 술맛에 마음이 좋아 부엌을 함부로 구르던 개다리소반 절름발에 못을 박았다 반짇고리를 얻어 와 구멍 난 속곳들을 기웠다 탁주 한 사발에 고인 소낙비와 우레와 폭설이 대견하여 눈시울이 젖었다 다 지나간 일이다

 

얄궂은 두견새 밤 새워 노래하는 부리 끝에 어스름이 물려 있다 뒤란 대숲을 흔드는 바람 무성해지니 잠설친 고양이가 마당을 어슬렁거린다 고양이는 수염을 반짝이다가 막사발 내려놓는 소리에 놀라 지붕 위로 오른다 그 기척에 두견새 날아가 버린다 내 마음에도 텅 빈 마당이 있어 작은 발소리에도 반가움이 소스라치는 것일까 막사발 속 달빛 섬에 유배된 이가 누구인지 짐짓 궁금하다

 

술잔 속에서 나를 보는 누빛이여 막사발에 놋수저 부딪는 소리 쨍쨍 울리면 뒤란에 진 작약으로 화전을 구워 오시게 지상에서 가장 외로운 노을도 같이 이끌고 오시게나 나도 한껏 취하여 젖은 마음을 내어 말리고픈 것이리라 맑은 취기로 헹궈진 머릿속을 홍매화가 피어도 꽃술 죽어 벌 나비 부를 수 없는 내 처지를 읽어 주오 그대가 띄워 보낸 웃음 휘휘 저어 단숨에 술잔을 비우고 보니 그대는 없구나 탁주의 출렁임 따라왔다가 가시는 이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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