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계를 건너온 사유의 분광들 _허형만 시 「나무들의 거리」외 네 편
박철영(시인. 문학평론가)
간혹 시를 통해 심정적인 고통을 위로받거나 공감으로 감전된 즐거움을 만끽하곤 한다. 시는 삶의 부분으로 전입되면서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잠시나마 마음의 여유를 안겨주며 소진된 활력을 되찾는 기제로 작용한다. 그것은 문장의 스펙트럼 안에서 확장되는 사유의 파동을 의미한다. 좋은 시들을 접하는 기회가 빈번한 것도 아닐뿐더러 발견한다면 행운이다. 시를 읽을 때마다 과연 시는 무엇이어야 하고, 내용은 무엇이 담아져야 하는가를 묻게 된다. 하루에도 수없이 다양한 매체를 통해 쏟아지는 시들을 보며 우리가 지향하는 사유들이 문장으로 공감되며 독자라는 대상과 소통하고 있는가에 대한 의문이 들 수밖에 없다. 현실적으로 그렇지 못한 시들이 많다는 것을 말하고 싶은 것이다. 그럴 때 시 의식과 지향해야 할 지점은 어디여야 하는가를 묻게 된다. 시가 현실과 분리되지 않은 보편성을 함의하고 있을 때 심정적 공감과 긍정적인 감전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시인들이 고통을 감내하며 담아내고자 하는 궁극적 사유는 삶 속에서 이룬 치열한 성찰로 실현되는 것이다. 시에 내재된 사유의 깊이와 무게는 앞서 말한 것들과 비례한다. 다섯 편의 시에서 허형만 시인의 시는 발화 지점과 시적 대상에 포함된 일상의 범주를 ‘자연’의 영역까지 확장하여 관통하고 있다. 특히 <나무들의 거리>와 <도피안사到彼岸寺에 와서>의 두 편에서는 자연과 인간의 지향하는 지점을 동일한 시각에서 바라본다. 사유의 관성으로 도달한 시적 대상은 의식 안에서 동조화되어 사회의식으로 환기시킨다. 이성적 관조를 통해 발화된 사유 망을 ‘자연의 영역’으로만 구분하지 않고 시적 궁극이 추구하는 감상적 사유를 이미지로 구체화한다. 시인은 복잡한 현실을 벗어나고 싶을 때 숲을 찾아간다. 숲의 나무를 보며 ‘코로나’에 갇힌 현실을 불편보다 긍정으로 환기하고자 한다.
날마다 숲에서 생각하는 것 중 하나가
나무와 나무들의 거리입니다.
숲의 나무들처럼
서로 떨어져 있으면서도 함께 서 있음은
서로의 외로움을 이해하기에 알맞습니다.
숲의 나무들처럼
홀로 서서 이리 서로 바라볼 수 있음은
서로의 가치를 존중해줄 수 있어 좋습니다.
우리는 나무들의 거리처럼
코로나로 인해 비록 거리를 두고 있지만
그 거리는 오히려 그리움을 다스리기에 알맞습니다.
우리는 나무들의 거리처럼
이 거리두기가 오히려 꿈꿀 수 있어 좋습니다.
-<나무들의 거리> 전문
시인은 나무들이 군락을 이뤄 숲을 만들고 그 안에서 공생하고 있는 산을 찾아간 것이다. 아름다운 숲을 보며 자연이 주는 상쾌한 공기와 신록의 아름다움에 심신을 위로받은 것으로 만족하지 않는다. 숲에서 일상을 잊거나 여유를 만끽하며 보낸 시간은 누구에게나 소중한 것이다. 하지만, 허형만 시인은 자연적 풍경을 낭만을 위한 예찬이 아닌 우리의 현실과 관계론적 인식으로 접근한다. 숲을 구성하고 있는 나무들의 공생을 보며 자연 속에는 인간들이 지키지 못한 생태적 ‘거리두기’를 유지하는 것을 발견한다. 나무들의 공생을 위한 서식 환경을 보며 그렇지 못한 현대인들과 사회 현실을 떠올린다. “날마다 숲에서 생각하는 것 중 하나가/ 나무와 나무들의 거리”가 갖는 아름다운 기여를 효과적인 긍정으로 바라본다. 스스로 나와 다른 존재에 대한 존중감과 일정한 거리(공간)를 유지하며 생존하는 나무들처럼 인간도 그렇게 살아보자는 것이다. 그럴 때 “숲의 나무들처럼/ 서로 떨어져 있으면서도 함께 서 있음은/ 서로의 외로움을 이해”할 수 있는 존재에 대한 소중함을 알게 된다. 숲과 마찬가지로 인간이 아름답게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은 ‘거리두기’라는 자연 질서의 회복에서 찾고자 한다. 상대방을 바라보며 공동체의 소중한 일원임을 인식하면서 ‘코로나’의 ‘거리두기’가 나쁜 것만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시인은 한 곳만을 바라보지 않는다. 산사를 찾아간 심사도 그래서 각별한 의미가 있다.
연밥은 모두 보시하고
숭숭숭 뚫린 심장 가득
메마른 허공만 무장무장 쟁인 채
꺾인 무릎으로
깨달음의 언덕을 건너가고 있는
적멸의 연을 따라가고 있느니.
*도피안사到彼岸寺: 강원도 철원군 동송읍 관우리 화개산에 있는 대한불교조계종 제3교구 본사인 신흥사의 말사.
-<도피안사到彼岸寺에 와서> 전문
서울에서 멀지 않은 철원의 도피안사到彼岸寺에는 대웅전 안 부처만 모신 것은 아니다. 경내에 존재하는 모든 사물은 부처의 불성을 갖고 있다. 일주문을 들어선 순간부터 그 자체가 수행의 지점에 닿겠다는 신념을 실천하는 만행萬行인 것이다. 금강문을 들어서며 부처를 품은 연꽃이 무성하게 만개했을 연못 안 풍경은 인간의 탐욕이 다반사인 분열적 욕망과는 사뭇 다른 세상으로 다가온다. 그런 지점을 찾아 나선 수행 의지는 허형만 시인의 오랜 탈속적 정진에서 체화된 문학 정신임을 확인할 수 있다. 시인은 연꽃이 피었던 연못 안의 “연밥은 모두 보시하고” 말라비틀어진 껍데기만 매달고 있는 ‘연밥’ 꼬투리를 보며 깊은 무상감에 빠져들었다. 생명성으로 팽팽한 충만과 긴장감으로 가득했던 ‘연밥’ 속은 텅텅 빈 채 허공 같은 하늘을 떠받치고 있다. ‘연밥’이 맺혀있던 그 안의 시간을 인간의 욕망으로 이해해보려 하지만, 한 순간에 사라져 버린 ‘비움’의 의미를 깨닫게 된다. 자연의 이치 속에서 이뤄지고 있는 생명의 귀거래사가 결국 인간의 삶과 닮았다는 것이다. ‘충만’과 ‘비움’의 순서는 불교에서 말한 색즉시공과 공즉시색의 다른 모습일 뿐이다. 빈 ‘연밥’ 대공을 보며 고통의 절정에서 오는 생명성으로 충만의 극치와 비움으로 교차되면서 그것마저 영원하지 않은 순간(찰나)이란 것을 보여준다. 자연을 통해 보여주는 충만은 인간이 추구하는 욕망과 달리 과잉도 결핍도 없는 본래 모습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비움’의 자연법칙은 엄정해서 시공을 소유할 수 없다는 것을 ‘도피안사到彼岸寺’를 통해 보여준다. 일주문 안 연못 속을 가득 채웠던 연꽃 향기도 “숭숭숭 뚫린 심장 가득/ 메마른 허공만 무장무장 쟁인 채” 부처가 부귀와 영화를 버린 채 만행에 나선 심정을 헤아렸을 것이다. 법정 스님의 ‘무소유’도 이미 부처 안에서는 으레 행해야 하는 수행의 방편인 것을 ‘연밥’은 상징하고 있다. 가진 것을 다 버려야 도달할 수 있다는 ‘적멸’의 길은 탐욕을 극복할 수 없는 인간으로선 요원한 지점이다. 삶에 대한 반성은 시간이 경과되면서 자아에 대한 새로운 변화를 요구한다.
겉옷을 벗으시고
수건을 허리에 두르신
당신께서 발을 내밀라 하십니다.
“제 발은 절대 씻지 못하십니다”
베드로처럼 저도 선뜻 내밀지 않다가
부끄럽지만 당신의 뜻을 따랐습니다.
대야에 물을 가득 채우신
당신의 뜨거운 사랑도 가득 채우신
당신께서 더럽고 상처 난 발을 씻어주십니다.
종처럼 허리를 구부리시고
무릎을 땅에 꿇으신 당신께서
죄에 찌든 발을 정성껏 씻어주십니다.
당신의 따뜻한 손길
당신의 부드러운 촉감으로
제 영혼 뜨거운 눈물이 솟구칩니다.
-<세족洗足> 전문
영혼을 울리는 감동은 내면을 파고드는 실체를 접하면서 변화된다. 타자에 대한 존중에서 출발한 감정의 전이는 행동으로 실천할 때 극대화된다. 그런 진정성 있는 행동을 보면서 의심보다 신뢰를 확신한다. 흔히 말하는 ‘사랑’은 엄마의 수유를 통해 아기에게 전달된다. 예쁘고 사랑스러운 발가락을 씻겨주는 엄마의 손길을 통해 일체감을 확인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그와 달리 하인이 떠받드는 상전을 위해 겉옷을 벗고 수건을 허리에 두른 채 의례적으로 행해야 하는 ‘종’의 ‘세족洗足’ 행위는 고통스러운 노역이다. 그런 것에 개의치 않고 가장 낮은 자세로 제자들의 발을 씻어준 행동을 몸소 실천한 예수 그리스도의 성경 속 ‘사랑’은 신앙 안에서 실천한 것이고 신앙적인 연대감을 확신시켜준다. 예수가 세상에서 보낸 마지막 날 밤에 행한 장면을 인용한 시의 진술은 다른 의미를 내포한다. 타자를 주체로서 예우하는 신분 이동 과정을 몸소 보여주는 예수 그리스도를 상기하며 시인은 그렇지 못했던 자신을 되돌아본 것이다. 자신을 성찰하며 인간애에 대한 실천적 ‘사랑’을 위한 회개 의지를 강렬한 신앙심으로 표출한 셈이다.
해바라기꽃인 줄 알았더니
뚱딴지꽃이었지
뿌리는 감자를 닮았으나
맛이 없어 돼지감자라지.
어쩌다 뉴스를 보기 위해
채널을 돌리면
뉴스마다 뚱딴지같은 사람
뚱딴지같은 소리만 요란하지.
어쩌다 세상이 이렇게
뚱딴지같은 세상이 되었는지
감동할 뉴스가 없으니
나는 아예 뉴스란 걸 안 보지.
-<뚱딴지> 전문
‘뚱딴지’란 말의 사전적 의미를 굳이 들여다보지 않아도 ‘돼지감자’라는 토종 식물을 가리킨다. 시대가 변하면서 성인병에 유용한 약효성 식물로 알려지면서 각광받고 식탁까지 오르는 먹거리 식물로 친근해졌다. 사실 예전에는 ‘뚱딴지’를 먹거리로 생각지도 않았을 뿐더러 쳐다보지도 않던 잡초였다. 줄기의 형상마저 거칠지만, 생명력이 강해 한번 뿌리내리면 순식간에 밭을 점령해버리기 때문이다. 뚱딴지는 뿌리나 씨앗 번식성이 워낙 강해 제거하기도 매우 어렵다. 천덕꾸러기 ‘돼지감자’가 언젠가부터 ‘뚱딴지’란 이름을 달고 밥상머리에 올라오기 시작하며 인식이 달라졌다. 척박한 땅에서도 잘 자라고 건강에 좋은 데다 농가 수익성 작물이 되었으니 말이다. 그야말로 ‘뚱딴지’ 같은 말이 되어버린 현실이다. 그래서 그런가? 언제부턴가 엉뚱한 의미를 말할 때 ‘뚱딴지’ 같다는 말을 사용한 것이다. 시인도 몹쓸 이해할 수 없는 사건들을 보며 ‘뚱딴지’란 말로 한탄하고 있다. 상식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다반사로 발생하니 시인도 혼란스러운 것이다. ‘뚱딴지’가 상징하는 의미가 건강한 언어로 탈바꿈할지는 두고 볼 일이다. 마음이 답답할 때는 시선을 자연으로 돌리는 것이 낫다. 자연은 모든 것을 드러내며 숨기는 법이 없다.
물수리 한 마리
순식간에 강물 속으로 투신한다
그야말로 비조직하飛鳥直下다
잠시 후
허공으로 다시 솟구친다
단단한 부리에는
팔뚝만한 숭어가 물려있다
때는 바야흐로 가을임을 알겠다
물수리에게는
이 땅을 떠나기 전
마지막 사냥일지도 모르겠다
-<사냥> 전문
배가 고프면 배를 채워야 한다. 그것은 불변의 본능이다. 마침 ‘물수리’가 강물에서 먹이를 낚아채는 순간을 목격한다. 물수리가 날카로운 부리로 물어 올린 물고기는 강에서 쉽게 볼 수 없는 ‘숭어’란 바다 물고기다. 귀한 숭어를 사냥한 ‘물수리’는 큰 횡재를 한 것이다. 그런 사냥법은 특별한 것이 아닌 오랜 세월을 거쳐 유전된 본능에 충실한 결과다. 이미 ‘물수리’는 숭어가 바다에서 강 하구를 치고 올라오는 시기를 정확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배고픔을 채우기 위한 물수리의 생존을 위한 사냥이 성공한 것은 운이 좋아 이뤄진 것이 아니다. 배고픔을 극복하며 오랜 집중과 혼신을 다한 기다림과 긴장 속에서 실패에 좌절하지 않고 매번 죽느냐 사느냐의 절박한 심정으로 “강물 속으로 투신”한 결과였다. 자신의 몸을 거침없이 강물 속에 내리꽂는 ‘비조직하飛鳥直下’의 비장한 행위로 얻은 최소한 먹거리를 얻은 것이다. 물수리가 물어 올린 “단단한 부리에는/ 팔뚝만한 숭어”가 매달려있다. 사냥에 성공한 후에도 긴장을 놓을 수 없다. 물수리가 수면 위로 끌어올린 ‘숭어’를 ‘부리’뿐만이 아니라 혹여 떨어질까 날카로운 발톱으로 감싼 모습을 상상해 보시라. 물수리에게 한 끼의 식사를 위한 사냥 행위는 죽음을 극복하는 최후의 기회이기 때문이다. 시인은 대상으로 포착된 풍경 속에서 물수리처럼 절박한 하루를 영위해가는 현대인의 치열한 모습들을 만난다. 결국 허형만 시인이 추구하는 시적인 문장도 부분적이지만, 삶의 다른 모습이란 것을 보여준다. 시라는 창작 행위도 삶의 반경을 맴돌고 있는 일상이 바탕이란 것을 말해준다. 시의 전경이 되는 서정적 지향은 인간이 추구하는 방향성으로 지속된다는 방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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