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文學과 評論

정밀하게 관찰하고 건조하게 묘사하기

by 담채淡彩 2022. 8. 8.

정밀하게 관찰하고 건조하게 묘사하기김남호 (시인. 평론가)

눈에 보이는 대상의 재현을 본질로 삼는 그림은 대상에 집중해야 한다. 대상의 관찰에 소홀하면 그 자리에는 관념이 고인다. 관념은 실감을 떨어뜨릴 뿐만 아니라 무수한 변화를 놓친다. 변화에 민감한 것은 감각이고 그 감각으로 작품을 살려내기 위해서는 대상을 세심하게 관찰해야만 한다. 그래서 옛 사람들은 “대상에서 피가 나도록 보라”고 하지 않았겠는가. 그리고 이어서 “대상을 철저하게 관찰하되 그것에 얽매이지는 말라”고 당부하는 것을 잊지 않는다. 제대로 살펴보라는 건 무엇이고 거기서 벗어나라는 건 또 무엇인가? 좋은 그림은 대상을 재현하지만 그것의 모방에 그치지 않는다. 거기서 또 다른 세계를 읽어내고 그것을 해석하고 자기만의 새로운 세계를 창조한다.

그림 그리기에 대한 이 경구는 시 쓰기에서도 그대로 적용된다. “공부해서도 안 되고 안 해서도 안 된다”는 아포리즘과도 일맥상통하는 이 경구는 마치 선문답을 방불하게 하지만 시의 본질이나 핵심을 간파한 촌철살인이다. 좋은 시와 덜 좋은 시를 구분할 때의 준거는 다양하지만, 그 다양한 준거들 사이의 교집합을 찾으려 한다면 아마도 이 경구에 닿지 않을까 싶다. 즉, 얼마나 제대로 보고 자유롭게 사유하는가?

그래서 이 글에서는 날카로운 통찰이나 사유도 예리한 관찰에서 출발하고, 초현실주의적인 표현이나 전위적인 시조차도 역시 남다른 관찰에서 출발한다는 걸 좋은 시를 통해서 확인해보려 한다.

한 무리의 개들이
지하 주차장으로 들이닥쳐
하얀 자동차를 에워싼다

타이어부터 발라 먹으려는지
발톱을 세워 찍어댄다
하얀 페인트가 찢어진다

털이 꼬질꼬질한 개들이
짖지 않고
빙 빙
돌며 점점 조여진다

자동차 아래로 뛰어든
고양이 울음소리가 쪼그라든다

너덜너덜한 목줄을 찬
늙은 개가
차 앞에 버티고 앉는다

어둠 속에서 희번덕거리는 눈알들
비명을 삼킨 블랙박스

개들이 달려들어
길고양이 대신
매끈한 차 한 대를 해치우는 동안

CCTV도 짖지 않는

- 김수정, 「공범들」 전문, 《시와경계》(2021년 가을호)

 

공상과학 영화의 한 장면 같기도 하고, 스릴러물의 한 장면 같기도 하다. 내용도 매우 단순하다. 극적상황이라고 할 것도 없다. 다만 정황만 드러나 있을 뿐이다. 그런데도 묘한 분위기를 풍긴다. 지금 지하 주차장에 한 무리의 개들이 들이닥친다. 개들은 하얀 자동차를 에워싸고 공격하기 시작한다. 타이어부터 발라 먹으려는지 그곳을 발톱으로 찍어대기 시작한다.

털이 꼬질꼬질한 개들이 으르렁거리거나 컹컹 짖지도 않고, 빙 빙 돌면서 단속적으로 공격할 뿐이다. 무슨 영문인지 자동차 아래로 뛰어든 길고양이는 개들의 서슬에 울음소리가 쪼그라든다. 아무런 부연 설명도 없이 극한의 공포와 전율로 시를 몰아간다.

마침내 차는 공격받아 해체되고 주위는 정리가 된다. 인간으로부터 탈출한 듯 보이는 늙은 개가 너덜너덜한 목줄을 찬 채로 차 앞에 버티고 앉는다. 희번덕거리는 눈알들이 그 개를 둘러앉는다. 비명을 삼켜버린 차의 블랙박스는 이 공포의 순간을 고발하지도 폭로하지도 못할 것이다. 길고양이 대신 매끈한 차 한 대를 해치우는 동안 CCTV는 아무런 기능도 하지를 못했다. 분노와 공포, 리더와 추종자의 모습에서 마치 영화 <혹성탈출>의 한 장면을 보는 듯하다.

이 시는 오로지 분위기를 묘사하는 데 집중할 뿐 다른 데는 관심이 없어 보인다. 일체의 진술이나 해설을 생략한 채 차분하고 치밀하게 묘사할 뿐이다. 현대시의 큰 특징이 이미지로 전달하는 것이지만, 이미지의 조각들을 편집해서 어떤 의미망을 형성하는 것은 시인의 의도이다. 그리고 그 의도는 해설과 사족으로 얼룩진 진술이 아니라 무미건조한 묘사에서 성공할 때가 많다.

좋은 시들의 공통점은 이처럼 세심한 관찰을 거친 묘사이지만, 이때의 묘사는 관찰한 실재가 아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이 시에서 “매끈한 차” 대신 ‘정장한 여성’을 보기도 하고, “털이 꼬질꼬질한 개들”이 아니라 ‘뒷골목의 불량배들’을 연상하기도 하는 것이다. 아무런 단서도 흘린 적이 없지만 독자는 이 시에서 어떤 이야기를 읽는다. 서정시든 해체시든, 고전적이든 전위적이든 독자를 움직이는 건 그 시 속에 감춰진 이야기이다. 좋은 시인이란 가장 효과적인 방법으로 독자들의 상상력에 불을 붙이는 방화범의 다른 이름이 아니던가.

 

*

 

관찰은 눈앞의 대상에게만 한정되는 것도 아니고, 그 대상이란 게 꼭 어떤 사물일 필요도 없다. 관찰의 대상은 일차적으로는 눈앞의 사물이겠으나 상대의 마음도 관찰의 대상일 수 있고, 심지어 내 마음도 관찰의 대상일 수 있다. 어쩌면 외부보다 내부를 관찰하는 게 더 종요로울 것이다. 시란 장르는 기본적으로 일인칭의 자기고백적인 형식을 취하기 때문이다. 자기고백이 제대로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자기관찰이 선행되어야 할 게 아닌가.

 

주름 많은 여자가

주름치마를 입고 거울 앞에 서 있어요

 

얼굴을 마주하면 불편한 거울과

솔직해서 속상한 여자의 사이에 주름이 있습니다

 

(……)

 

접혀서 아름다운 건

커튼과 꽃잎, 프릴과 아코디언, 사막의 모래물결, 샤페이, 기다림을 꼽는 손가락

 

거울이 겉주름을 보여줄 때 속주름은 더 깊어집니다

여자와 거울

둘의 관계는 쉽게 펴지지 않아요

 

양미간을 찡그리는 습관보다

거짓말을 못하는 거울의 습관이 더 무섭습니다

- 마경덕, 「거울의 시간」 부분, 《문학과의식》(2021년 가을호)

 

이 시는 화자의 내면풍경에 집중하고 있다. 지금 거울 앞에 주름 많은 여자가 주름치마를 입고 거울 앞에 서 있다. 같은 주름이지만 얼굴의 주름과 치마의 주름은 다르다. 전자는 늙음을 가리키고 후자는 젊음을 가리키기 때문이다. 그래서 “치마는 주름 이전만 기억하고” “얼굴은 주름 이후만 기억하는” 것이다. 얼굴의 주름이란 늙음을 고지하는 바로미터이다. 늙음을 은폐하고 싶지만 “솔직한” 거울 때문에 숨길 수가 없다. 아니, 타인의 눈은 화장이나 마사지로 속일 수 있을지라도, “한사코 나이를 고백”하는 거울 때문에 접힌 내 기분의 주름은 속일 수가 없다.

접혀서 아름다운 건 커튼이나 꽃잎, 프릴이나 아코디언, 사막의 모래물결, 샤페이라는 쭈글쭈글한 애완견, 그리고 “기다림을 꼽는 손가락” 정도가 고작이다. 이 예외들로 인해서 주름의 긍정적인 입지는 더욱 좁아진다. 이 시에서는 화자의 내면 묘사가 전반적으로 빼어나지만 특히 이 구절은 압권이다. “거울이 겉주름을 보여줄 때 속주름은 더 깊어집니다”. ‘거울만 보면 속상합니다’라는 일상적 고백의 시적 버전이기 때문이다.

상황이 이런 탓에 “여자와 거울/둘의 관계는 쉽게 펴지지 않”겠지만 나빠지지도 않을 것이다. 거울 때문에 상처받지만 거울 때문에 위로받기도 할 테니까. 왜냐하면 상처와 위로는 둘 다 ‘거울의 습관’이기 때문이다. 지금 나를 괴롭히는 거울의 솔직함은 오래전 내 몸이 내 마음에 들었을 때는 자신감의 근거였으리라. 이 시의 힘은 인식의 새로움이라기보다 변덕스럽고 속물스런 내면의 욕망을 아무런 미화 없이 그대로 그려낸 관찰과 묘사의 힘이 아니겠는가.

 

*

관찰의 묘미는 기념사진 촬영하듯이 하는 게 아니라 스냅사진 촬영하듯이 할 때에 맛볼 수 있다. 스튜디오에서 잘 설정된 포즈로 찍은 사진처럼 애초의 의도가 잘 담겨진 시가 좋을 때도 있지만, 따분하고 지루한 일상을 롱테이크로 촬영한 영상처럼 그대로 묘사한 시가 좋을 때도 있다. 왜냐하면 반복과 권태가 ‘일상’의 본질적 속성이지만 그 ‘일상’을 그대로 재현하면 낯설어지기 때문이다.

롤랑 바르트의 『글쓰기의 영도』에서 ‘중립적인 글쓰기’가 지시하는 바도 이런 글쓰기의 근방일 것이다. 그리고 ‘시도 없고 시적인 것도 없다’고 갈파했던 이승훈 시인의 『영도의 시쓰기』 역시 이 어름일 것이다. 아무런 긴장감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느슨한 시는 그 느슨함으로 시의 고삐를 당긴다. 다음 시가 그렇다.

 

늦은 귀가를 하는 길이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집에 들어가려는데

문 앞에 쌀자루 하나가 놓여 있었다

시골 방앗간에서나 볼 법한 나일론 쌀자루,

시골집 노모가 보내셨나? 쌀자루를 끙끙 들어

현관 앞 거실에 옮겨놓고 가만 살펴보니

105동으로 가야 할 쌀이 106동인 우리 집으로 왔다

보낸 이의 주소도 처음 보는 전북 부안 계화 소재였다

나일론 쌀자루에 쓰인 원래의 손글씨를 보니

5인지 6인지 애매하게 적히긴 했다

부안 계화도 쌀이라면 밥맛은 어지간하겠군,

시간은 벌써 밤 열시를 넘기고 있었고

더 늦기 전에 나는 곧장 움직이지 않을 수 없었다

쌀자루를 둘러메자 허리가 휘청했고

후들후들 옆 동으로 옮겨가 11충에서 내렸다

동만 다르고 호수가 같은 집 앞에

쌀자루를 부려놓고 초인종을 눌렀다

(……)

- 박성우, 「부안 계화도 쌀」 부분, 《문학과의식》(2021년 가을호)

 

인용한 부분은 이 시의 전반부이다. 전반부만 봐도 후반부가 어떻게 이어질지 짐작하는 게 어렵지 않을 것이다. 그만큼 시의 극적상황이 단순하고 특별한 반전도 없다. 내용은 별 게 아니다. 화자가 밤늦게 퇴근해보니 아파트 문 앞에 쌀자루가 하나 배달돼 있었다는 것이고, 끌고 들어가 자세히 보니 “동만 다르고 호수가 같은 집”으로 갈 쌀이 잘못 배달되었다는 것이고, 다시 그 쌀을 메고 본래 주인을 찾아가서 돌려주었다는 것이다. 이 시의 끝부분은 이렇다.

 

중년 내외는 뭔가 의아한 눈빛으로 바라봤지만

딱히 나는 개의치 않고 공손한 인사를 드리고 나왔다

그것 좀 들었다고 땀이 다 나나,

넥타이를 풀어 들고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나는

양복에 묻은 먼지를 툭툭 털어보면서 집으로 향했다

 

간이 맞지 않은 음식처럼 심심하다. 시를 읽고 나면 뭔가 개운한 맛이 있어야 하지 않느냐고 하는 사람들에게 이런 시는 밍밍한 맛으로 느껴지겠지만, 개운한 맛을 살리기 위해 우리 시가 치러야 했던 대가는 가볍지 않다. 무슨 말인지 잘 이해가 안 가면, 노벨문학상 받은 시들을 한번 읽어보면 이해가 갈 것이다. 대부분의 노벨문학상 수상작들은 개운하기는커녕 지루할 정도로 밍밍하다. 무슨 기준으로 이런 시를 쓰는 시인에게 노벨상을 주는지 의심해보지 않은 사람이 드물 것이다.

이를 테면 이 시도 노벨문학상 수상작 스타일이다. 홍상수 감독의 영화처럼 일상의 모습을 그대로 가져옴으로써 낯설어지게 하는 것. 시는 멀리 있는 무엇이 아니라 일상의 한토막이라는 시인의 시론이 그대로 투영된 게 아닐까 한다. 이런 시의 성패도 핍진한 관찰과 묘사의 성공 여부에 달려있다. 이를테면 조고각하(照顧脚下), 멀리 볼 게 아니라 ‘발밑을 잘 살펴보라는 것’, 부처의 가르침뿐만 아니라 시도 바로 거기에 있다는 거다. 다시 말해 가장 위대한 시는 일상 속에 있고, 가장 훌륭한 시론은 일상의 날렵한 재현에 있다는 것.

 

*

 

시가 오는 길은 다양하다. 어떤 대상에서 촉발되어 오기도 하고, 특별한 체험에서 오기도 하고, 공상이나 명상에서 오기도 한다. 뿐만 아니라 어떤 낱말이나 지명에서 올 때도 한다. 국내외의 지명에서 촉발되어 낭만적인 시를 쓰는 시인으로 우리는 박정대를 기억하고 있다. 하지만 다음 시도 그의 시에 못지않다.

 

당신은 어디서 왔나요

샤이나에서

 

옆에 있는 두 명의 저 소녀들은 누구인가요

시간을 이삭 줍는 아이들

 

소녀들은 말없이 옆에서 웃기만 하고

웃는 모습이 멀리서 날아온 꽃씨 같다 생각하다

 

여기엔 언제 왔나요

일주일이 지났고 일주일이 남았네요

(……)

- 이서영, 「샤이나에서 온 남자」 부분, 《문학과의식》(2021년 가을호)

 

이 시에서 주인공은 화자나 ‘당신’이 아니다. ‘샤이나’라는 지명이다. 화자는 당신에게 묻는다. 어디서 왔냐고? 당신은 “샤이나”에서 왔다고 답한다. 이어서 묻는다. “옆에 있는 두 명의 저 소녀들은 누구”냐고? 당신은 답한다. “시간을 이삭 줍는 아이들”이라고. 소녀들은 말없이 옆에서 웃기만 하고, 화자는 그 모습이 멀리서 날아온 꽃씨 같다고 여긴다. 그러다 또 묻는다. 언제 왔느냐고? 당신은 답한다. “일주일이 지났고 일주일이 남았”다고.

꼬치꼬치 심문하듯 어디서 왔느냐, 같이 온 사람은 누구냐, 언제 왔느냐 묻지만 당신은 불쾌해하는 기색 없이 선선히 답한다. 그리고 ‘화자’에게 반하기라도 한 듯이 “당신 따라 당신 손을 잡고 시간을 다 써버리고 내가 떠나온 곳 검은빛의 땅 샤이나로 돌아갈 거”라고도 한다. 이 시도 앞의 시와 마찬가지로 밍밍하고 심심하다. 그런데 그 심심함과 밍밍함의 기원에서 차이가 있다. 전자는 일상에서 비롯되었다면 후자는 환상에서 비롯되었다. 이 시의 독특함은 시의 본문보다 주(註)에 있다.

 

“샤이나는 아프리카 어디 열대우림 속에 있지 싶어 구글 지도를 찾아보았으나 샤이나를 찾지 못했다. 그렇다면 그는 어디에서 온 걸까? 화이자에서 개발한 샤이나 피임주사가 있고 필리핀에서는 배우겸 가수겸 모델 샤이나 마그다야오가 현재 활동 중이다. 부산의 샤이나 오피스텔에서는 작년에 코로나 확진자가 27명 발생했다. 그 외 샤이나 뷰티, 샤이나 모텔, 샤이나 스타킹이 샤이나와 어떤 관련이 있는 것 같은데” (「샤이나에서 온 남자」 주(註) 전문)

 

물론 시에서 주(註)는 단순히 특정한 낱말이나 구절의 주석(註釋)에 그치지 않는다. 주까지도 시여야 한다. 보시다시피 이 시의 디테일은 주에 있다. 주에서도 ‘샤이나’가 어딘지 혹은 무엇인지 결코 확정하지 않는다. 그것을 확정하는 순간 시는 확장성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끝없이 유예한다. 그냥 유예하는 것이 아니라 디테일을 살리면서 유예한다. 심지어 ‘샤이나’와 연관된 어느 곳의 코로나 확진자 수까지 제시하면서도 유예한다. 이런 시적 전략과 디테일로 인해서 ‘샤이나에서 온 남자’는 충분히 신비하고 매력적이다.

 

*

 

감각은 논리나 이성의 영역이 아니다. 그래서 가볍고 부질없고 변화무쌍하다. 불교에서 무상(無常)하다는 게 바로 감각의 세계 아닌가. 하지만 현대시는 감각에서 온다. 사유조차도 감각으로 길어 올리면 좋은 시가 된다. 시 쓰기에 한해서라면 우리 육신의 목 위쪽은 별 쓸모가 없다. 괜히 잔머리 굴러봐야 새로움은 고사하고 거기가 거기다. 시를 쓸 때 믿는 구석은 감각밖에 없다. 감각만이 새롭다. 이 감각이 시가 되려면 언어는 그 구체성으로 무장해야 한다.

무더운 여름날이다. 모든 것은 녹아내릴 듯이 덥고, 자연은 저마다의 색깔이나 무늬를 버리고 모노크롬(monochrome)을 띤다. 모든 사물은 멀찍이 떨어져 있고 모든 관계는 지루하고 권태롭고 모든 애인은 우울하다. 자, 이런 계절에 시를 쓴다면 어떻게 쓸 것인가? 감각이 어떻게 언어로 바뀌면서 시가 되는지 살펴보는 일은 흥미롭다.

 

무지(無地)는 여름용 화두다

꽃치자 흰 내음도 무지의 일족이다

여름이면 채도 낮은 침묵을 설파하는 일몰을 기다린다

민무늬 감각을 어떻게든 얻어 보려고 조바심 한다

기억 안에 깊숙이 버려진 나쁜 장면을 벗겨 낸다면

흉터는 무지로 둘 것이다

애인이라는 지위가 우울한 애인들에게

선호도 낮은 이 절기를 권한다

초록 물갈퀴 우거진 중국단풍나무는 마른 잎을 매달고

색깔 빠지는 기분을 내년 봄까지 고수한다

식탁에 둘러앉은 일가족의 여름이 훤히 열려 있다

툭하면 밀려오는 낭떠러지를 수선해서 무언가를 지켜야만 산다

끝나지 않는 사랑을 발명한다 해도

몰(沒) 혹은 졸(卒)의 발목에 차이는 설계도는 오차가 없다

입술이 즐겁게 침묵할 오늘의 방향은 민무늬 감정

이별도 꽤 쏠쏠한 감정이 꽃치자에 붐빈다

기다리던 일몰이 겹치고 나는 조금, 무지를 얻었다

더운 바람에 뭉개진 얼굴에 무지가 들러붙는다

- 박은형, 「무지」 전문, 《서정과현실》(2021년 하반기호)

 

한글로 표시된 ‘무지’는 크게 두 가지 뜻으로 풀이된다. 하나는 ‘아는 게 없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무늬가 없이 전체가 한 빛깔로 된 모습이나 그런 물건’을 일컫는 것이다. 물론 이 밖에도 ‘아주 대단히’ ‘엄지손가락’ ‘쌓여 있는 더미’ ‘한 섬이 못 되는 곡식’ 등이 있지만 이 시와는 무관해 보인다. 내용상 이 시에서는 ‘무지(無地)’의 의미이다. ‘무지(無地)’라는 말은 요즘은 잘 쓰지 않지만 일반적으로 천의 종류를 가리킬 때 쓴다. 식탁보처럼 무늬 없이 한 색깔로 된 천을 ‘무지 천’이라고 한다.

“무지(無地)는 여름용 화두다”라고 시작하는 첫줄부터 감각적이다. 여름은 봄이나 가을처럼 색깔이 다양한 계절이 아니다. 녹색이거나 푸른색으로 단순하다. 말 그대로 ‘무지’이고, 무지는 그래서 여름용이다. 둘째 줄 “꽃치자 흰 내음도 무지의 일족이다”도 매력적인 구절이다. 단순하면서도 오묘한 치자꽃 향기를 떠올린다면 ‘무지’가 가지는 무쌍한 의미의 변화를 감지할 수 있을 것이다. “채도 낮은 침묵”이나 “민무늬 감각”도 ‘무지’의 다른 풀이쯤 된다.

“기억 안에 깊숙이 버려진 나쁜 장면을 벗겨 낸다면/흉터는” 상처의 흔적이 아니라 그저 ‘무지’가 될 것이다. 그런가 하면 이 구절은 매우 익살스럽다. “애인이라는 지위가 우울한 애인들에게/선호도 낮은 이 절기를 권한다” 당연히 여름은 애인마저도 귀찮고 성가신 계절, 사랑마저 시들한 이 계절을 표현하는 빛깔로 ‘무지’만 한 게 있을까?

삶이란, “툭하면 밀려오는 낭떠러지를 수선해서 무언가를” 지키는 일이다. 영원한 사랑을 발명한다고 해도 “몰(沒) 혹은 졸(卒)”에 이른다는 점에서 구원은 바랄 수가 없다. 그러니 “입술이 즐겁게 침묵할” 오늘의 기분은 “민무늬 감정”이고, “더운 바람에 뭉개진 얼굴에” 들러붙는 건 무지다. 여름날의 헤어나기 힘든 권태와 무기력을 ‘무지’라는 낱말 하나로 낚아채서 익살스럽게 풀어내는 시인의 감각과 역량은 놀랍다. 이때의 감각적 표현도 역시 일상에 대한 철저한 관찰에게 빚졌음은 물론이다.

반성이나 성찰 없이 오랫동안 시를 써온 사람들은 대체로 감각을 배반하고 사유에 투항하려고 한다. 사유의 묵직함이 곧 시인의 중후함을 증거하는 것이라 여기는 듯하다. 그래서 나이가 들어서도 감각적인 시를 쓰면 어른답지 못하다고 비웃거나 배척하는 일이 발생한다. 이런 일부 중년/중견 시인들의 편견과 나태에 대한 반항과 거부는 젊은 시인들의 시에서 요설과 장광설로 표출된다. 시도 그 시대를 반영할진대 유행을 피해갈 수는 없으므로 변화 자체를 문제 삼을 수는 없다. 하지만 그 유행의 영향으로 시가 독자를 외면하고 자폐적인 구조 속에서 시인들끼리만 소통한다면, 그래서 마침내 시가 고사될 위기에 처할 수도 있다면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시란 무엇인가’하는 화두를 붙들고 내 시를 끊임없이 의심할 때 시는 살아날 것이다. 그리고 철저한 관찰과 묘사가 이루어질 때 시는 관념의 진부함을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무지’는 여름용 화두로만 쓰이지는 않는다. 눈 덮인 겨울의 화두로도 잘 어울린다. 계절은 다시 겨울로 가고 있다. 하지만 우리 시는 생기발랄한 봄이기를 바란다. 몸이 추울수록 시는 더 뜨거워질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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