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속/담채
물안개 자욱이 오르는 저수지
그 건너 산 뿌리 오두막에서
중년의 사내가 일곱 번째 자식을 받아내고 있다
아들이 없고 땅뙈기 하나 없는 가난한 부부
또 딸이면 거두지 않기로 서로 약속을 하고
아내는 토끼집 같은 방 안에서 해산解産에 들었다
또 딸이었다
사내는 말없이 핏덩이를 엎어놓고 나와
물안개 자욱한 저수지를 내려다보며 줄담배를 태웠다
산도라지 꽃향이 훅-훅 번져오는 흙마당에서
자신의 하얀 속을 하늘에 내보이며
천형天刑을 기다리는 수인囚人처럼 두 눈을 감은 채
우두커니 서 있었다
피눈물이 고인 방 안이 마당 한가운데로 자꾸만 솟구치는 이른 봄날
들녘에서 건너오는 바람은 쉴 새 없이 봄을 퍼나르고 있었다
비탈진 마당 한 가운데 말뚝이 되어있던 사내가
피눈물을 찍어내며 방 안으로 들자
두 눈이 충혈된 아내가
자세를 고쳐 잡고 핏덩이에게 젖꼭지를 물리고 있었다
기구하고 거룩한 탄생을 거두고 있었다
중천에 걸린 낮달이
흰 눈을 부릅뜨고 있을 때였다
* note
저수지에서 물고기를 잡아 생계를 꾸려가던 한 家長의 실화이다.
막걸리를 유독 즐겨하던 그가 주머니가 비어있을 것을 아는 나는 그가 시내에 나올 때마다 막걸리를 대접했다.
어느 대폿집 목로에서 눈시울을 적시며 내게 들려준 얘기다.
나는 깊은 연민으로 그 가족과 딸의 성장과정을 지켜보았다.
그 딸은 시골에서 중학교를 졸업하고 막바로 상경하여 혼기가 훨씬 지나도록 돈을 모았다.
가난한 부모님께 적지 않은 논밭을 사주고 오두막이 있던 자리에 넓은 새집을 지어주었다.
이제 그 밑으로 아들을 하나 더 얻어 의젓한 8남매의 가문이다.
십수 년이 지난 오늘,
기구한 출생을 극복한 일곱 번째 딸의 행운을 빌며 이 글을 쓴다.
2002. 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