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와 보리/담채
남향집 울타리 안 작은 안마당
꽃과 나무들 사이로 군데군데 조금씩
비어있는 땅
이 손바닥만 한 땅 조각에 구순九旬의 노모가
겉보리 씨앗 한 줌을 뿌리고 있다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이 한 뼘 공간은
그리움이 길을 낸 당신의 섬이다
젊어 홀로된 어머니
아직도 강을 건너지 못한
고독과 설움이 거름 되어 보리가 자랐다
연푸른 들녘에 안개 걷히고
울타리 밖 호박꽃이 연등처럼 켜지던 초여름
어머니는 엿기름용 보리
반 바가지를 수확하셨다
긴 가뭄 뒤
늦장마로 연일 비가 내리며
여름이 지나갔다
흑백의 영정 하나가 삶을 꿇어앉힌
겨울 초입 늦은 밤
어머니는 젊어 돌아가신 아버지 제상祭床 위에
마알간 식혜 한 그릇을 올리셨다
그 안에 간절한 다음 생을 들여놓고
그 고요 속을 들어오신 아버지께
앙금처럼 가라앉은 무언가를 오래 건네는 밤
무엇이 저토록
산 자와 죽은 자를 하나로 이어
끝없이 데려가는 걸까
볼모로 잡힌 어머니
살아서는 못 가는 길, 눈물이 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