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文學과 評論

한국 모더니즘 시의 전개와 발전 양상

by 담채淡彩 2011. 3. 31.

한국 모더니즘 시의 전개와 발전 양상




문 혜 원






1. 식민지 시대의 모더니즘


모더니즘 시는 주체와 세계간의 단절과 불화를 전제로 한다. 물론 이것은 모더니즘 시에 한정된 것만은 아니다. 근대시는 주체와 객체(세계) 사이의 통합과 유추가 깨어지면서 생겨난다. 근대적인 것을 특징짓는 것은 세계와의 조화와 동일성의 원리가 아니라 새로움이며 이질성이다. 근대적인 것이란 현재에 있어서 과거의 연속성이 아니며, 오늘은 어제의 소산이 아니다. 그것은 과거와의 단절이며 어제의 부정인 것이다.1) 따라서 자신이 속한 세계와의 불화와 단절은 모더니즘 시만이 아니라 근대시의 성립 요건이자 특징인 것이다.

모더니즘 시는 근대시의 이러한 특징을 기본 전제로 하고, 여기에 상응하는 문학의 존재방식에 대해 탐구한다. 달리 말하면, 시가 자연발생적으로 우러나오는 것이 아니라 의도적으로 만들어진다는 의식이 비로소 싹트는 것이다. 모더니즘 시는 이런 면에서 주관적인 감정의 순간적 표출에 충실한 근대의 서정시와 구별된다. 또한 제작이라는 개념이 생겨남에 따라 시를 만드는 방법 혹은 기교 등 형식적인 요소에 대한 관심 또한 자연스럽게 커진다. 모더니즘을 말할 때 기법의 측면을 강조하는 것은 따라서 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기법에 대한 인식이 자각적이며 방법적일 때, 모더니즘은 미학적 자율성의 한도 내에서 일정 정도 사회비판적인 성격을 가지게 된다. 이것이 아방가르드 문학을 대표적인 예로 하는 모더니즘의 비판적인 속성이다. 한국의 모더니즘 시에는 이러한 경향들이 순차적으로 혹은 혼재된 상태로 나타난다. 

한국에서 모더니즘 문학이 본격화되기 시작한 것은 1930년대이다. 구인회 결성, 카프 해체, 문학의 정치성에 반발하는 순문학적 경향의 득세 등 외부적인 상황은, 1930년대 모더니즘 문학이 활발하게 성장할 수 있는 바탕을 제공한다. 그러나 시에서 볼 때 모더니즘은 대략 1926년경부터 시작되었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1926년은 정지용의 「카페 프란스」, 「파충류동물」, 「슬픈 인상화」가 발표된 해로서, 이를 기점으로 해서 이미지즘적인 경향의 시들이 발표되기 시작하기 때문이다. 같은 해에 이미지즘 시인인 리처즈 올딩톤의 시 「지하철도에서」가 소개되고 있다는 점 역시 중요한 요소가 된다.2) 그러나 이미지즘적 경향은 이보다 두 해 앞서 발표된 이장희의 「봄은 고양이로다」(1924)에서 이미 나타나고 있다.


꽃가루와 같이 부드러운 고양이의 털에

고운 봄의 향기가 어리우도다


금방울과 같은 호동그란 고양이의 눈에

미친 봄의 불길이 흐르도다


고요히 다물은 고양이의 입술에

포근한 봄 졸음이 떠돌아라


날카롭게 쭉 뻗은 고양이의 수염에

푸른 봄의 생기가 뛰놀아라

― 「봄은 고양이로다」 전문


이 시에서 봄의 속성은 고양이의 털, 눈, 입술, 수염 등 구체적인 감각을 빌려 표현되고 있다. 우선 봄의 향기는 꽃가루처럼 부드러운 고양이의 털에 비유되어 있다. 봄의 내음은 후각적이지만, 그 내음의 느낌을 꽃가루를 만지는 것과 같다고 해서 촉각에 비유하고 있는 것이다. 정념을 일으키는 봄의 속성은 고양이의 눈에 비치는 불길에 비유되고, 봄의 나른함, 포근함은 졸고 있는 고양이의 입술에서 발견된다. 또한 봄의 생기는 고양이의 쭉 뻗은 수염에 비유되어 있다. 봄의 막연하고 추상적인 느낌들을 고양이라는 대상에 빗댐으로써 선명하게 이미지화하는 것이다. 특히 이장희는 후각과 촉각 등 다른 감각에 비해 사용되는 빈도가 낮은 감각들을 자유롭게 활용하고 있어서 더욱 주목된다.  

정지용은 시각적 이미지를 즐겨 사용하고 있다. 「카페 프란스」, 「파충류동물」, 「슬픈 인상화」 등은 도시문명을 소재로 하고 있다는 면 외에,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행과 연의 배치를 이용하여 시각적 효과를 노리고 있다.


머― ㄴ 海岸 쪽

포플아 늘어슨 큰 길로


  電        電

   I         I  

  燈.       燈.

   I         I

  電        電

   I         I

  燈.       燈.


헤염쳐 나온 것처럼

흐늑이며 깜박어리는구나

― 「슬픈 인상화」 부분


윗 시에서 電燈 電燈이라는 낱말을 세로로 길게 배치해놓은 것은, 큰 길에 가로등이 일정한 거리로 서있는 것을 시각적으로 표현하기 위한 것이다. 뒤에 찍힌 마침표는 마치 전등이 깜빡이고 있는 모양을 보여주는 것처럼 보인다. 「파충류동물」에서 기차가 움직이는 소리를 크덕…크덕…이라고 큰 활자로 강조하고 있는 것 역시 같은 이유이다. 이는 기차의 소리를 흉내낸 것이기도 하고, 동시에 기차의 속도를 시각적으로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연이 더해짐에 따라 ‘텰크덕이라는 소리가 한차례씩 더 반복되어 나타나기 때문이다. 이는 기차나 비행기 같은 근대 문명의 산물에 대한 식민지 지식인의 동경과 불안을 단적으로 표현한 것이기도 하다. 

언어를 통한 시각적 이미지 구사에 좀더 충실한 것은 김광균이다. 그는 활자의 크기나 인쇄술을 이용한 형태적인 파격을 시도하지는 않았지만, 대신 기존의 언어 문법을 그대로 사용하면서 회화적인 이미지를 만들어내고 있다. 「추일서정」은 시각적 이미지를 설명하는 대표적인 예이다.


길은 한줄기 구겨진 넥타이처럼 풀어져

日光의 폭포 속으로 사라지고

조그만 담배 연기를 내어 뿜으며

새로 두시의 급행차가 들을 달린다.


포플라나무의 筋骨 사이로

공장의 지붕은 흰 이빨을 드러낸 채

한가닥 꾸부러진 鐵柵이 바람에 나부기고

그 우에 세로판지로 만든 구름이 하나.

― 「추일서정」부분


이 시에서 가을 햇빛을 받고 있는 길은 한줄기 구겨진 넥타이처럼 풀어져 일광의 폭포 속으로 사라지고라는 표현으로 선명하게 시각화된다. 쭉 뻗은 신작로가 아니라 시골길이므로 굴곡이 있다는 것을 구겨진 넥타이에 비유했고, 그 길이 멀리 이어져 있으며 그것에 가을날의 햇빛이 눈부시게 쏟아져 내리고 있음을 표현한 것이다. 셀로판지로 만든 구름이 하나라는 부분 역시 독특한 표현이다. 구름의 반투명하고 가벼운 성질, 가을에 볼 수 있는 구름의 맑고 투명한 느낌을 셀로판지에 비유하고 있는 것이다.

이들의 공통적인 특징은 시각적인 이미지를 사용하는 한편으로 애상과 슬픔의 정조를 전체적인 토운으로 하고 있다는 점이다. 앞에서 예로 든 정지용의 「슬픈 인상화」의 이미지들은 떠나가는 愛施利․黃으로 인해 失心한 풍경으로 보이고, 築港의 기적소리 역시 침울하게 들린다. 상심한 화자의 마음이 눈에 보이는 객관적인 풍경들을 슬픔의 정조로 느끼게 하는 것이다. 김광균의 「추일서정」 역시 호올로 荒凉한 생각에 포인트가 맞추어져 있다. 가을의 풍경을 바라보는 화자의 마음은 고독과 허무에 차있다.

이미지즘적 경향을 보이는 시들이 대상을 시각적인 이미지로 정교하게 재생하는 한편 정서상으로는 객관적 거리를 유지하지 못하고 센티멘탈리즘에 함몰되어 있는 이유는, 식민지 백성으로서의 상실감이 기본적인 바탕을 이루기 때문으로 보인다. 이미지즘시들이 시적인 테크닉과 정서가 분리되는 기형적인 형태로 결국 기교주의로 흐를 수밖에 없었던 것은 이 때문이다.

1930년대 중반에 활발하게 전개된 주지주의 시론은 이미지즘을 체계적으로 이론화하고, 기교주의로 전락한 이미지즘의 한계를 극복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최재서와 김기림은 이미지즘시의 기법적인 새로움에 지적인 태도를 첨가하여 주지적인 시를 만들어내고자 했다. 그들이 주장하는 지적인 태도는 소재를 객관적으로 다룬다는 방법적인 것 외에 시대성과 사회성을 갖추는 것까지를 의미했다. 이는 당시 서구사회에 만연해있던 정신적 위기감과 불안 심리에서 비롯된 문학의 현실지향적인 성격을 반영한 것이기도 했다. 식민지 시대의 모더니즘시의 사회비판적인 특징은 이같은 외부적 요소로 설명될 수도 있다.

그 예로 김기림의 「기상도」는 자본주의 문명의 폐해를 기상도 형식으로 풍자해내고 있다. 세계의 아침, 시민행렬, 태풍의 기침시간, 자최, 병든 풍경, 올빼미의 주문, 쇠바퀴의 노래 등 7부로 이루어져 있는 이 시는 태풍이 내습하기 전의 상황(1~3부)과 태풍이 내습한 후의 상황(4~5부), 태풍이 지나간 후의 재생에 대한 의지(7부)의 세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1부의 희망차고 경쾌한 여행의 출발은 2부로 가면서 당시의 세계 정세를 풍자하는 내용으로 바뀐다.


넥타이를 한 흰 식인종은

니그로의 요리가 칠면조보다도 좋답니다

살갗을 희게 하는 검은 고기의 위력

의사 <콜베―르>씨의 처방입니다.

<헬메트>를 쓴 피서객들은

난잡한 전쟁경기에 열중했습니다

슬픈 독창가의 심판의 호각 소리

너무 흥분하였으므로

내복만 입은 파씨스트

그러나 이태리에서는

설사제는 일체 금물이랍니다

필경 양복 입는 법을 배워낸

송미령여사

― 「기상도」 2부 시민행렬 부분


넥타이를 맨 식인종과 니그로 요리는 흑백의 인종 차별을 의미하고, 전쟁경기에 열중한 헬멧 쓴 피서객, 파씨스트 등은 전쟁의 상황과 그 속에 놓인 각국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4부 자최에는 소크라테스로 대표되는 기성의 철학과 종교에 대한 부정과 야유가 동시에 드러난다. 김기림은 풍자와 몽타쥬 수법을 이용해서 당시의 사회상을 비판하고 동시대적인 주제를 시에 담으려 했다.

도시의 퇴폐적인 이면을 주된 소재로 삼았던 오장환의 시 역시 비슷한 맥락에 있다. 그는 「성씨보」, 「성벽」 등에서 전통을 부정하고 근대지향적인 일면을 보이는데, 이는 반근대적인 것에 대한 부정의 의미를 갖는다. 그러나 본격적인 창작활동에 나서면서 그는 기형적으로 왜곡되어 있는 식민지 자본주의의 현실을 깨닫게 된다.


首府의 화장터는 번성하였다.

산마루턱에 드높은 굴뚝을 세우고

자그르르 기름이 튀는 소리

시체가 타오르는 타오르는 끄름은 맑은 하늘을 어질러놓는다.

시민들은 기계와 무감각을 가장 즐기어 한다.

금빛 금빛 금빛 금빛 교차되는 영구차.

호화로운 울음소리에 영구차는 몰리어오고 쫓겨간다.

번잡을 尊崇하는 수부의 생명

화장장이 앉은 황천고개와 같은 언덕 밑으로 시가지는 나래를 펼쳤다.

― 「首府」 부분 


이 시는 거대화된 경성의 모습을 번성하는 화장터에 비유한 것으로서, 공장과 고층건물로 가득한 도시의 이면에 감추어진 부패와 향락의 실상과 이를 바탕으로 기형적으로 비대해가는 자본주의 현실을 비판하고 있다. 

김기림과 오장환의 현실비판적인 지향은 해방기에 정치와 결합하면서 모더니즘 자체를 부정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그러나 넓은 의미에서 본다면, 이들의 해방기 활동은 모더니즘 문학이 가지고 있는 사회비판적인 성격이 시대적인 환경과 결합되어 나타난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모더니즘시의 현실지향성은 전후의 김규동, 김수영 등의 시에 나타나는 참여적인 경향으로 연결된다.

이미지즘에서 사회 비판으로 변화하는 경향과는 구별되는 또 다른 형태의 모더니즘시로 다다와 초현실주의시를 들 수 있다. 이미지즘이 영미 계열의 온건형 모더니즘이라면, 다다와 초현실주의는 대륙 쪽에서 형성된 과격형 모더니즘에 속한다. 후자는 대상에 객관적인 거리를 두고 그것을 묘사하는 이미지즘과는 달리, 주체의 주관성을 극대화하고 극단적인 경우 현실 세계 자체를 부정하는 데까지 나아간다. 한국에서 과격한 모더니즘이 처음 나타나는 것은 김여수의 「윤전기와 사층집」, 임화의 「지구와 빡테리아」 등 다다적인 경향의 시들에서이다. 이 시들은 알 수 없는 기호와 부호 등을 시에 끼워넣거나 활자의 크기를 조절하기도 하고, 고의적으로 문장을 파괴함으로써 전통적인 문법을 파괴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경향은 다다이즘을 표방했던 김화산이 아나키즘으로 선회하고, 임화 역시 카프를 중심으로 한 사회주의 리얼리즘에 가담하면서 자연스럽게 소멸된다. 다다이즘이 초현실주의로 연결되었던 서구의 경우와 달리, 한국의 경우 다다이즘은 정치적인 성격을 강하게 띠면서 아나키즘과 사회주의 리얼리즘으로 연결되는 것이 특징이다.

이상은 외부 현실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혹은 관련이 단절된 주체의 내면 심리를 소재로 하고 있다. 그의 시에 나타난 현실은 실재하는 현실이 아니라 주체의 심리에 그려진 내면적인 세계이고, 행위 또한 그 안에서 벌어지는 의식의 유희에 가깝다.


그사기컵은내骸骨과흡사하다. 내가그컵을손으로꼭쥐었을때내팔에서는난데없는팔하나가接木처럼돋히더니그팔에달린손은그사기컵을번쩍들어마룻바닥에메어부딪는다. 내팔은그사기컵을死守하고있으니散散이깨어진것은그럼그사기컵과흡사한내骸이다. 가지났던팔은배암과같이내팔로기어들기前에내팔이움직였던들洪水를막은白紙는찢어졌으리라. 그러나내팔은如前히그사기컵을死守한다.

― 「오감도 시 제11호」 전문


이 시에는 사기컵을 들고 있는 에게서 돋아나는 팔을 가진 또다른 가 있다. 현실의 는 사기컵을 들고 있고, 사기컵은 끝까지 깨어지지 않은 채 의 손에 들려있다. 그러나 가 사기컵을 흡사 내 해골과 비슷하다고 생각하면서 환상이 시작된다. 의 팔에서 나온 다른 팔이 사기컵을 깨뜨리고, 깨진 사기컵은 마치 내 해골이 깨어진 것처럼 보인다. 현실과 환상이 겹치면서 하나의 시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초현실주의적 경향은 전후 조향의 시에서 다시 찾아볼 수 있다. 


2. 전쟁과 모더니즘


한국시에서 식민지 모더니즘과 구별되는 새로운 모더니즘적 경향이 나타나는 것은, 1948년에 발간된 동인지 ?신시론?에서부터이다. 1949년 앤솔로지 ?새로운 도시와 시민들의 합창?을 발간한 이들은, 식민지 모더니즘과는 다른 자신들만의 새로운 문학적 지향점을 드러내고자 했다. 그 예로 김경린은 모더니티는 전진하는 사고라는 점을 강조하면서 리얼리즘시와 전통적인 서정시 모두를 비판한다. 이들이 부정하는 전통성은 비단 전통적 서정시의 특징만이 아니라 문학적 전통을 포함한 과거의 유산 전부를 의미한다. 새로운 시대와 문명 앞에 놓여있는 이들의 입장은 김수영의 다음 시에 잘 표현되어 있다.


古色이 蒼然한 우리집에도

어느덧 물결과 바람이

新鮮한 氣運을 가지고 쏟아져들어왔다.


(중략)


그렇지만

구차한 나의 머리에

聖스러운 鄕愁와 宇宙의 偉大感을

담아주는 삽시간의 刺戟을

나의 家族들의 기미많은 얼굴에

比하여 보아서는 아니될 것이다.

― 「나의 家族」 부분


는 무분별하게 밀려들어오는 서양 문명과 고색창연한 가족들 사이에 놓여있다. 물결과 바람으로 표현되는 서양의 문물은 의 정신과 마음을 사로잡지만, 그런 한편으로 는 낡고 보잘것없는 의 뿌리를 부정하지 못한다. 남의 것과 나의 것, 새로운 것과 낡은 것 사이에서 겪는 갈등은 그의 시의 중요한 주제를 이룬다.

이러한 갈등은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실존의 문제로 구체화된다. 전쟁 후의 상황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죽음의 간접 체험과 그로 인한 존재의 위기감이었다. 이 시기에 쓰여진 모더니즘시의 공통적인 특징은 전쟁의 경험을 원 경험으로 하고 그로 인한 정신적인 상처와 실존의 위기를 주제로 하고 있다는 점이다. 전봉건은 고유성을 박탈당하고 도구화되어버린 현존재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山 허리에 反射하는 日光. BAR의 連射.

비둘기의 똥냄새. 中部戰線.

나는 有效 射距離 圈內에 있다. ······ 나는 0157584다.

― 전봉건, 「0157584」 부분


전쟁터에 있는 는 인간으로서의 고유성을 완전히 상실한 채, 임의로 주어진 군번에 의해서만 존재 가치가 부여된다. 개개인은 자신의 고유한 죽음과 존재 의미를 가진 현존재가 아니라, 실용적 목적에 의해 사용되는 도구이다. 도구가 그 유용성을 상실했을 때 폐기되듯이 전쟁에서 개인은 싸움의 도구로 사용되다가 생명을 다하면 폐기되는 것이다. 개인의 고유한 죽음은 처음부터 부정된다.

김종삼 시에 나타나는 소외된 어린아이는 살아남은 자의 정신적인 황폐감과 상실감을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어린 아이들은 대부분 부모가 없거나 소외되어 있는, 혹은 금방 죽을 아이로 묘사된다. 전쟁으로 인한 죽음의 그림자가 생활의 모든 부분을 지배하고 있는 것이다.


저기 

어두워 오는

북문은 놀러 갔던

아이들을 잡아먹고도

남아 있습니다.

빠알개 가는

자근 무덤만이

돋아나고 나는

울고만 있습니다.

― 「개똥이」 부분


새끼줄을 치고 소독약을 뿌린 집을 나와 작은 무덤가에서 울고 있는 아이는, 혼자 남겨져 있다. 구체적인 상황은 나와 있지 않지만, 혼자 남겨진 아이들은 무차별한 죽음 뒤에 남겨진 전쟁의 희생물이다. 부모가 사라짐으로 해서 아이는 다른 아이들과 단절된 공간에 놓이게 되는 것이다. 이는 전쟁으로 황폐해진 시인의 내면을 표현하는 것이기도 하다.

박인환은 전쟁으로 인한 불안과 절망을, 신조차 믿을 수 없는 극단적인 상황으로 표현한다. 모든 것이 파괴된 자리에서 미래에 대한 희망은 깨어지고 종말과 죽음만이 가득차 있다.


날개 없는 여신이 죽어버린 아침

나는 폭풍에 싸여

주검의 일요일을 올라간다.


파란 의상을 감은 목사와

죽어가는 놈의

숨가쁜 울음을 따라

비탈에서 절름거리며 오는 나의 형제들.

― 「영원한 일요일」 부분


일반적으로 평화와 인식의 상징으로 받아들여지는 주일은 주검의 일요일로 환치되고, 교회로 가는 길은 죽어가는 자의 숨가쁜 울음을 따라가는 길로 변질되어 있다. 과거와 현재 뿐만 아니라 미래 역시 어둡고 불길할 뿐이다. 박인환의 시에 짙게 깔려있는 허무주의는 이러한 상황 인식에서 비롯된 것이다.

김춘수의 시는 하늘과 땅, 영원과 순간 사이에 한계지워져 있는 인간 조건의 유한성을 표현하고 있다. 인간 조건의 유한성은 끝없이 하늘을 향해 있긴 하지만 결국은 대지에 못박힐 수밖에 없는 갈대의 운명에 비유된다. 그는 유한성의 깨달음을 통해 존재의 본질에 대한 질문으로 나아간다.


나는 시방 위험한 짐승이다.

나의 손이 닿으면 너는

미지의 까마득한 어둠이 된다.


존재의 흔들리는 가지 끝에서

너는 이름도 없이 피었다 진다.

눈시울에 젖어드는 이 무명의 어둠에

추억의 한 접시 불을 밝히고

나는 한밤내 운다.

― 「꽃을 위한 서시」 부분


이 시에서 가 위험한 짐승인 이유는 대상에 나의 관념을 덮어씌우기 때문이다. 는 나의 앎이 대상에 대한 이해의 전부라고 생각하고 그로 의해 대상을 왜곡한다. 미지의 까마득한 어둠으로 변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그럼으로써 존재의 본질은 더욱 더 멀어진다. 한밤내 우는 행위는 의 기존의 앎을 폐기하고, 존재의 본질을 탐구하려는 노력을 상징한다. 이후 김춘수의 시는 존재 탐구에서 존재를 벗어나는 방향으로 진행된다.

조향은 현대에 어울리는 새로운 언어질서를 구현하는데 남다른 관심을 보인다. 이질적인 사물들의 병치, 이성적인 질서를 넘어선 단어와 이미지들의 연결로 대표되는 초현실주의적인 실험은 이러한 생각을 반영한 것이다.


낡은 아코오뎡은 대화를 관뒀습니다.


― 여보세요?


폰폰따리아

마주르카

디이젤-엔진에 피는 들국화,


― 왜 그러십니까?


       모래밭에서

受話器

  女人의 허벅지

        낙지 까아만 그림자


비둘기와 소녀들의 랑데-부우

그 위에

손을 흔드는 파아란 깃폭들


나비는

起重機의 

허리에 붙어서

푸른 바다의 층계를 헤아린다.

― 「바다의 층계」 전문


디젤 엔진에 피는 들국화기중기의 허리에 붙은 나비는 폭력과 평화, 무생물과 생물, 기계적인 것과 인간적인 것을 선명하게 대조시킴으로써 전쟁의 폭력성을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표면상 아무 연관관계가 없는 사물들을 나란히 병치함으로써 이미지의 충돌 효과를 노리고 있는 것이다. 조향의 초현실주의적인 실험은 그 후에도 일관되게 계속된다.


3. 내면화된 의식과 미학적 자율성


전쟁체험과 실존을 모티프로 하는 전후 모더니즘은 4.19를 계기로 해서 전환점을 맞게 된다. 이를 계기로 문학은 전쟁이라는 소재에서 벗어나 새로운 역사적, 사회적인 주제들을 받아들이게 된다. 이 시기에는 4.19의 실패, 군사정권에 의한 정부의 탄생으로 정치적인 억압이 심화되고, 급속도로 추진된 자본주의화로 인해 물질만능주의가 싹트고 빈부 격차가 심화되면서 사회구조적인 모순이 배태되기 시작한다. 이러한 문제점들은 197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표출되기 시작한다. 이러한 상황적 요인 속에서 출발한 1960년대 이후의 모더니즘은 현실 참여라는 사회적인 요구에 어떻게 대응하는가의 문제로 특징지워진다.

순수와 참여라는 이분법에 따르면, 이 시기의 모더니즘 시는 참여시에 대립되는 순수시로 분류된다. 김수영을 제외한다면, 이 시기 모더니즘시들은 사회적인 비판 대신 개인의 내면을 탐색의 주제로 한다는 것이 특징이다. 이때 모더니즘은 예술이 모든 정치적 요구에 맞서 그 자체가 자기목적적인 합리성을 갖는다는 미학적 자율성이라는 개념과 등가로 파악된다.

그 예로 ?현대시? 동인들은 언어에 대한 탐구를 바탕으로 하며, 내면적인 리얼리티를 포착하는 것을 목표로 내걸었다. 이승훈은 개념적인 언어들을 거부하고 철저히 직관에 의한 언어를 선택한다. 그의 시에서 언어는 대상을 설명하거나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언어 자체의 구조에 의해서 연결된다.


사나이의 팔이 달아나고 한 마리 흰 닭이 구 구 구 잃어버린 목을 좇아 달린다. 오 나를 부르는 깊은 명령의 겨울 지하실에선 더욱 진지하기 위하여 등불을 켜고 우린 생각의 따스한 닭들을 키운다. 닭들을 키운다. 새벽마다 쓰라리게 정신의 땅을 판다. 완강한 시간의 사슬이 끊어진 새벽 문지방에서 소리들은 피를 흘린다. 그리고 그것은 하이얀 액체로 변하더니 이윽고 목이 없는 한마리 흰 닭이 되어 저렇게 많은 아침 햇빛 속을 뒤뚱거리며 뛰기 시작한다.

― 「사물 A」 전문

여기서 드러나는 것은 단지 시인의 직관을 통해 파악된, 비대상의 영역에 놓여있는 이미지들이다. 언어는 개념을 설명하지 않고 비대상을 지시하는 근원적인 모순 속에 놓여 있다. 이승훈의 시는 언어의 한계를 드러내면서 그것을 넘어서려는 실험의 의지를 보여준다.   

이같은 주지성은 1970년대의 정현종과 오규원의 사물시에서 심화된 양상을 보이게 된다. 정현종의 시는 사물의 사물성을 드러내는 방식을 넘어서 사물과의 친화성을 보여주는 데까지 이르고 있다. 


사물은 각각 그들 자신의 거울을 가지고 있다. 내가 나의 거울을 가지고 있듯이. 나와 사물은 서로 비밀이 없이 지내는 듯하여 각자의 가장 작은 소리까지도 각자의 거울에 비추인다. 비밀이 없음은 그러나 서로의 비밀을, 비밀의 많고 끝없음을 알고 사랑함이다. 우리의 거울이 흔히 바뀌어 있는 것을 발견한다. 거울 속으로 파고든다. 내 모든 감각 속에 숨어있는 거울이 어디서 왔는지 나는 모른다. 사물을 빨아들이는 거울. 사물의 피와 숨소리를 끓게 하는 입술式 거울. 사랑할 줄 아는 거울. 빌어먹을, 나는 아마 시인이 될 모양이다.

― 「거울」 전문


사물과 의 관계는 서로의 비밀을 속속들이 알고 있는 투명한 관계이다. 는 사물을 비추는 거울을 몸 안에 가지고 있고, 사물의 피와 숨소리를 느낄 수 있다. 사물과의 친화력은 시인의 기본적인 자질이다. 이러한 정현종의 입장은 사물의 사물적 존재성을 밝히고자 했던 김춘수, 신동집의 시와 같은 출발점에 있다. 그러나 김춘수와 신동엽이 사물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데서 멈춰있음에 대해, 정현종은 사물의 존재성과 더불어 교감한다.

오규원 역시 사물에 주목하는 것은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그에게서 사물은 사물적 존재성으로서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현상으로 파악된다. 그가 관심을 두는 것은 사물의 있음이라기보다 어떻게 있음이다.


나의 

고장난 수도꼭지에서도

뚜욱 뚜욱

언어들이 죽는다.

건강한 언어의

아이들은 

어미의 둥지에서

알을 까고,

고요한 환상의

출장소

뜰에 새가 되어

내려와 쉰다.

의식의 

고장난 수도꼭지에서

쉰다. 

― 「몇 개의 현상」 부분


그의 시에서 언어는 실재를 지칭하는 지시적인 기호가 아니라 추상의 나뭇가지에 살고 있는, 비지시적 언어이다. 그의 시에서 사물은 현상으로 나타나고 이것을 감지하는 것은 언어이다. 이처럼 오규원은 처음부터 언어를 중요한 시적인 대상으로 한다. 정현종과 오규원의 시를 통해 현대시는 시의 언어에 대한 새로운 자의식을 가지게 된다.


4. 해체를 통한 사회비판


1980년대는 경제개발계획의 결과로 경제적인 부가 증대하고 그에 따른 빈부 격차와 인간 소외, 노동 문제가 한꺼번에 불거지는 시기이다. 도시는 근대 문명의 상징이 아니라 삶의 구체적인 현장으로 변모한다. 이 시기의 모더니즘시는 내면으로의 회귀 성향이 강했던 1960,70년대의 모더니즘과 달리 사회적인 현실에 바탕을 두고 있다는 점이 특징이다. 시적인 형식을 파괴하거나 변화시킴으로써 현실 비판을 수행하는 시들은 정치 사회적인 상황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또한 적극적인 현실 비판의 의지를 드러내지 않고 개인의 내면을 주제로 하고 있는 시들 역시 사회적인 원인에 뿌리를 두고 있다.

이성복은 억압된 현실 속에서 왜곡되는 주체의 내면을 혼잣말이나 중얼거림을 통해 표현한다. 그의 시에서 는 현실의 부조리를 인식하고 그것 때문에 병들어있는 개인이다. 는 현실을 개혁하거나 교정하려 하지 않고 아무 것도 하지 않음으로써 세계의 억압을 드러내는 소극적인 방식을 택한다.


그날 아버지는 일곱시 기차를 타고 금촌으로 떠났고

여동생은 아홉시에 학교로 갔다 그날 어머니의 낡은

다리는 퉁퉁 부어올랐고 나는 신문사로 가서 하루 종일

노닥거렸다 前方은 무사했고 세상은 완벽했다 없는 것이

없었다 그날 驛前에는 대낮부터 창녀들이 서성거렸고

몇 년 후에 창녀가 될 애들은 집일을 도우거나 어린

동생을 돌보았다 그날 아버지는 未收金 회수 관계로

사장과 다투었고 여동생은 愛人과 함께 음악회에 갔다

                (중략)

아무도 그날의 신음 소리를 듣지 못했다

모두 병들었는데 아무도 아프지 않았다

― 「그 날」 부분


표면상 그날의 상황은 다른 날과 별반 다를 것이 없다. 아버지는 일곱시에 기차를 타고 금촌으로 갔고, 여동생은 아홉시에 학교로 갔으며, 나는 신문사로 가서 하루 종일 노닥거렸다. 그러나 이같은 일상성의 한편에는 대낮부터 역전을 서성거리는 창녀들과 자기 삶을 솎아내는 잡초 뽑는 여인들, 집을 허물 듯 자신의 희망을 허물어뜨리는 사내들이 있다. 실제 삶은 병들고 썩어있는 것이다. 병들었다는 것보다 더 무서운 것은 아무도 아프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는 그러한 부패와 병듦을 관찰하는 유일한 개인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최승자는 현실과 동떨어진 자아의 존재 자체를 전면 부정함으로써 폭력적인 세계에 항의한다.


일찍이 나는 아무 것도 아니었다.

마른 빵에 핀 곰팡이

벽에다 누고 또 눈 지린 오줌 자국

아직도 구더기에 뒤덮인 천년 전에 죽은 시체.


아무 부모도 나를 키워 주지 않았다

쥐구멍에서 잠들고 벼룩의 간을 내먹고

아무데서나 하염없이 죽어 가면서

일찍이 나는 아무 것도 아니었다


떨어지는 유성처럼 우리가

잠시 스쳐갈 때 그러므로,

나를 안다고 말하지 말라.

나는너를모른다 나는너를모른다.

너당신그대, 행복

너, 당신, 그대, 사랑


내가 살아있다는 것,

그것은 영원한 루머에 지나지 않는다.

― 「일찌기 나는」 전문


이 시에서 최승자는 자신의 살아있음 자체를 부정함으로써 폭력적인 세상에 폭력적인 방식으로 대응한다. 그것은 세상에 대한 폭력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가해지는 폭력이라는 점에서 마조히즘적인 양상을 띤다. 스스로를 철저하게 파괴해버림으로써, 나를 파괴하는 세상의 폭력 자체를 비웃고 조롱하는 것이다.

  김혜순은 자신의 존재와 정체성에 의문을 던진다는 면에서 이성복, 최승자의 시와 유사하지만, 그보다 더 도착적이고 그로테스크한 상상력의 전개를 보인다.


그는 넣었다 토마토 케첩을

끓어오르고 있는 나의 뇌수에.

그는 논리정연한 태도로 발라내었다 끓어오르는 뇌수에서

실핏줄과 튀는 힘줄을.

그는 맛있게 먹고 있었다

입맛마저 다시며.

그의 앞엔 나의 촉수가 불을 밝히고 있었다.

그는 다시 이성적으로 휘저었다 예리하고

작은 나이프로

아직 익지도 않은 마지막 뇌수마저.

― 「프레베르의 아침 식사에 대한 나의 저녁 식사」 부분


의 관계는 먹고 먹히우는 가장 원초적인 관계에 놓여있다. 로 지칭되는 존재는 의 머리와 살과 피와 머리칼까지를 먹어치우는 폭력적인 타자이다. 이 폭력적인 타자는 대부분 남성 혹은 남성이 지배하는 사회의 제도적인 억압을 의미한다. 이런 면에서 그녀의 시는 페미니즘적 요소를 다분히 가지고 있다. 

이성복, 최승자, 김혜순의 시가 억압당한 개인의 내면적인 상처와 무의식을 드러낸다면, 황지우, 박남철, 장정일의 시는 정치적인 억압에 대항하는 형식의 실천적 가능성을 탐색하고 있다. 황지우는 정치적인 폭압에 대한 저항의 방법으로 시 형식을 파괴하고, 풍자와 조롱, 야유를 섞어서 어두운 현실을 고발한다.


김종수 80년 5월 이후 가출

소식 두절 11월 3일 입대 영장 나왔음

귀가 요 아는 분 연락 바람 누나

829-1551


이광필 광필아 모든 것을 묻지 않겠다

돌아와서 이야기하자

어머니가 위독하시다


조순혜 21세 아버지가

기다리니 집으로 속히 돌아오라

내가 잘못했다


나는 쭈그리고 앉아

똥을 눈다

― 「심인」 전문


정황으로 볼 때, 아마도 김종수는 80년 광주항쟁 당시 행방불명된 대학생이라고 추정된다. 짧은 1연에 담겨있는 상황은 행방불명된 대학생의 사연을 암시함으로써 만연해있는 억압과 폭력을 드러낸다. 황지우는 이를 신문의 심인란 형태를 빌려 전달하고 있는 것이다. 신문광고란을 끌어들인 이 시의 형태는 일상성에 길들여진 독자의 의식에 충격을 주고 그들로 하여금 현실의 억압에 대해 질문을 던지도록 유도하는 역할을 한다.

해체시라는 명칭으로 불리우는 형태 파괴 시도는 박남철의 시에서 좀더 극단화된다. 황지우가 형태 파괴를 시도하면서도 시라는 관념을 끊임없이 의식하고 있는 반면, 박남철은 패러디와 풍자, 펀(pun) 등의 테크닉을 구사하여 기존의 시라는 관념 자체를 전복시킨다.


내 詩에 대하여 의아해하는 구시대의 독자 놈들에게 → 차렷, 열중쉬엇, 차렷,


이 좆만한 놈들이……

차렷, 열중쉬엇, 차렷, 열중쉬엇, 정신차렷, 차렷, ○○, 차렷, 헤쳐모엿!


이 좆만한 놈들이……

헤쳐모엿,


(야 이 좆만한 놈들아, 느네들 정말 그 따위로들밖에 정신 못 차리겠어, 엉?)


차렷, 열중쉬엇, 차렷, 열중쉬엇, 차렷……

― 「독자놈들 길들이기」 전문


이 시에서 박남철은 고의적으로 독자들을 향해 욕설을 퍼붓고 조롱함으로써 시는 특별하고 아름다운 것, 위안을 주는 것이라는 독자들의 기대를 무너뜨린다. 독자들은 마치 군대에서 훈련을 받는 것처럼 단순한 동작들을 반복하도록 강요받으며 인격을 모독당한다. 그럼으로써 시에 대한 기성관념을 전복시키고, 군대의 훈련 장면을 묘사함으로써 군사독재가 판을 치고 있는 현실에 대해 비판을 가하고 있는 것이다. 라는 문학 형식에 대한 비판은 이렇게 해서 사회현실에 대한 비판까지 연결된다. 

기존의 형식을 파괴하는 것에서 한 단계 더 나아가 시라는 관념까지를 부정하는 이러한 경향은 1990년대의 포스트모더니즘적인 경향으로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1990년대는 80년대적인 저항의 열기가 사그라들면서 사회 전반적으로 개인주의가 팽배한 시기이다. 모더니즘시 역시 정치적인 저항보다는 자본주의 문화와 기술문명에 대한 비판으로 주제를 옮겨간다. 이 시기 문학의 또 다른 특징으로 문학 내외적인 장르 파괴를 들 수 있다. 시에 영화나 광고, 무협지같은 대중문화가 결합되는가 하면, 문학과 다른 장르들을 혼합한 퓨전 장르가 등장하기도 한다. 이러한 현상은 기술적인 테크닉을 넘어서 문학에 대한 정의 자체에 대해 질문을 던지고 있다. 모더니즘시는 이제 시만의 영역이 아닌 전 예술 장르와의 관계 속에서 논의되어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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