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文學과 評論

관찰시에서 생활시로

by 담채淡彩 2011. 4. 23.

관찰시에서 생활시로

― 최승호의 『아무것도 아니면서 모든 것인 나?를 읽고

서 준 섭

 

1. 시의 변화 ― 화자, 시선, 담론

시집『그로테스크?와 ?모래인간?을 냈던 최승호가 최근 열 한번째 시집 ?아무것도 아니면서 모든 것인 나?(열림원)을 냈다. 앞서 나온?그로테스크?,?모래인간?이 삶의 온전함을 잃어버린 뒤틀리고 오염되고 죽고 부패해가고 해체, 소멸되어가는 삶의 세계에 대한 사유와 명상을 밀고 나가 그 극한을 탐구한, 다분히 사변적인 세계를 다루고 있다면, 이번 시집은 시인 자신의 생활 자체 ― 일상적인 세계와 상념을 다루고 있다. 생활 속으로의 진입을 보여주고 있는 시집이다.

?그로테스크?, ?모래 인간?과 이번 시집을 비교해보면 몇 가지 중요한 변화가 발견된다. 그 변화는 시쓰기의 태도의 변화라 할 수 있는데, 시집에서는 우선 화자의 위치 변화로 나타난다. 시의 화자는 종전의 명상과 사유의 세계를 따라가는 사변적인 위치 ― 일상적 삶의 역동성으로부터 이탈하는 집요한 사변의 공간 ― 에서 벗어나, 이제 일상적 삶의 공간에 자리하고 있다. 명상적 화자에서 생활인으로서의 화자로 전환이다. 이런 화자의 위상학적 변화는 곧 시선의 변화이기도 하다. 사변적 세계에서부터 삶의 세계로 이행하면서 삶의 실감을 따라가며 응시하고 표현한다. 그 결과 시적 담론 내용의 변화가 나타나는데, 우리는 그 내용의 특성을1) 사변적인 세계와의 거리두기2) 생활의 발견3) 자연의 발견 3) 잃어버린 기억의 회복 등으로 요약해볼 수 있다. 시인은 어두운 명상에서 벗어나 있는 그대로의 삶을 노래하기 시작한 것이다.

다른 시인이라면 이런 변화는 변화라 하기 어렵지만, 최승호의 시쓰기에 있어서 이번 시집에 나타나는 이런 시적 화자의 위치 전환은 그 자체가 그의 시의 중요한 변화라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는 지금까지 자신의 일상적인 삶의 세계를 그대로 표현하는 시쓰기를 기피해왔기 때문이다. 그의 시는 대체로 나날의 삶과 시쓰기가 일체를 이루는 것이라기 보다는, 현실과 거리를 두는 관찰의 시, 명상의 시였고, 특히 명상 ― 그 명상은 주로 禪佛敎의 가르침에 의거한다 ― 은 그의 시의 방법이자 내용이며 그의 시세계의 중요한 특성이었다. 세속 도시의 욕망의 세계에 대한 사유, 회저의 밤壞疽발효의 이미지, 얼었다가 녹아내리는눈사람에 대한 명상,퀴퀴한 광장이나크고 검은 향나무,초현실적인 유원지,모래인간,소금창고,거품들의 러시아워등의 세계는 일상적 체험에 바탕을 둔 세계이기는 하지만, 체험 자체보다는 거기서 유추된 명상의 세계였다. 그 세계는 그의 시적 사유의 근간이 되는 생성과 소멸, 변이와 반복, 긍정과 부정이 교차되는, 모든 것은 소멸과 생성의 순환 속에 있다는 그의 불교적 세계관과 밀접히 관련되어 있지만, 그것은 밝다기보다는 다분히 어두운 세계였다. 물론 이 어두움이 도시적 생존, 삶의 무거움과 관련된 현실적인 것이고, 그의 시세계에도 달맞이 꽃에 대하 명상으로 대변되는 밝고 환한 생명의 세계, 회색빛 관념이 아닌,초록의 생명의 세계가 공존하고 있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렇기는 하나 그의 시들에는 어떤 불안과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는 사실을 부정하가는 어렵다.그로테스크모래인간의 세계는 밝고 환한, 생명이 약동하는 세계는 아니다. 생명은 생명이 아닌 것으로, 인간은 인간이 아닌 것으로 구성되고, 부처는 부처가 아닌 것으로는 구성되어 있으며, 모든 것은 부단한 변화와 생성의 순환 속에 존재한다는 불교적 세계관이 부정할 수 없는 진리라 해도, 사유는 실감이 아니고 명상은 삶의 흐름에의 동참이 아니며, 어두움은 빛이 아니다.

최승호의 이번 시집에서 주목되는 점은 지금까지의 시세계에서 벗어나 다른 세계를 실험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삶의 실감, 약동하는 생명의 세계를 노래하고 있는데, 이는 그로서는 중대한 변화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반복과 변이, 변이와 생성을 거듭해온 그의 시들은, 이 시집에 이르러 종전의 관찰과 명상의 사변적인 세계에서 벗어나 나날의 생성적인 삶 자체에 적극적인 관심을 드러내보이고 있다. 자연과의 적극적 교감에 의한 자연 이미지의 적극적 수용,  일상생활 속에서의 시쓰기와 기억의 탐구, 있는 그대로의 삶의 긍정은 이번 시집의 중요한 특성을 이룬다. 관찰과 명상의 지속과 긴장으로부터 시적 자아를 풀어놓고 있는 것이다. 이런 변화는 주목할만하다. 생명의 활기를 잃어버린, 뒤틀리고 모든 것이 소멸되고 사물화되어가는 세계(?그로테스크?, ?모래인간?)는, 그렇게 생각할 수 있는 세계가 있어서 시인의 사유를 그쪽으로 이끌어 갔다는 점에서, 그로서는 사유할 수 밖에 없는 불가피하고도 절실한 과제였다는 점에서, 그 나름의 의의가 있겠으나, 그 세계는 생명의 온전함과 삶의 훈기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비인간적 세계―무기적인 세계이며 다분히 작위적인 세계라 할 수 있다. 사유의 극한을 탐구하는 것이었기에 독자로서는 숨막히는 세계였고, 시인도 그렇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삶과 너무 밀착한 곳에서 시적인 것을 발견하기 어려운 것처럼, 실생활에서 떨어져 나온 명상적 사유의 극단적인 것을 탐구하게 되면 시가 현실적 삶의 세계로부터 유리되어 너무 먼 곳에 놓이게 된다. 일상생활에서 너무 가깝지도 멀지도 않은 곳에 독자들이 공감할 수 있는 시적인 것이 존재할 것이다. 사회 속에서 생산되어 사회 속에서 수용되는 것이 시이며, 우리의 일상적 삶들은 언제나 실감에 기초하고 있다. 시란 그 본래의 의미에 있어서 그 삶의 실감의 소박한 되풀이가 아니라, 실생활로부터의 미적 거리두기에 의한 심미적 감각의 적극적 생산이다.

 

2. 흘러가는 강물 앞에서 ― 자연의 재현과 감각적 표현으로서의 시

우리는  앞에서 이 시집이 여러 면에서 최승호의 시적 전환을 보여주는 것이라는 사실을 지적하였는데, 시집 앞부분에 수록된 「뭉게구름」은 이 시집 전체의 분위기를 잘 대변해준다. 뭉쳐졌다 흩어지는 업의 덩치와 무게를 알지 못한채/나는 뭉게구름을 보며 걸어간다. 이 뭉게구름은 사념의 구름이자 자연의 구름이지만, 이 구절은 화자의 시선이 자연쪽으로 향하고 있음을 시사하고 있다. 또한 시 「낙조」의 다음과 같은 구절은 그의 시쓰기의 한 방향을 암시하는 것이다. 재현도/자기 표현도 아닌 곳에서 꿈틀거리는 畵論처럼//하늘은 거대한 미역인양 점점 미끄러져 바다밑으로 들어가는 것 같고― 바다를 배경으로 한 낙조의 장엄함을 노래하고 있는 이 시에서, 화자는 자연 현상인 낙조는 재현도 자기 표현도 아닌 것라고 말한다. 재현도 표현도 낙조 풍경은 말하자면 언어로 표현하기에 미흡한 如如한 자연 자체의 모습이다. 여여한 세계는 언어로 표현하는데 한계가 있으며, 대상으로서의 자연과 시인의 언어 사이에는 차이와 간격이 존재한다. 그러나 시인은 언어를 사용하여 그 모습을 생생하게 재현―표현하고자한다(재현도 자기 표현도 아닌 곳에서 꿈틀거리는 화론처럼). 재현이란 대상을 충실하게 그리는 것이고, 자기 표현이란 내면의 감정을 솔직하게 밖으로 드러내는 것이다. 시는 대상을 생생하게 포착할 수 있는 언어의 한계를 인정하면서 동시에 그것을 초월하고자 하는 형식이다. 인용한 시적 표현은 그런 시도의 산물이다. 재현과 표현에 머물 수 밖에 없으면서도 그것을 넘어서 대상 자체의 꿈틀대는 움직임을 붙잡고자하는 이 구절은 이 시집의 시쓰기의 방법론으로서 그의 시론에 해당되는 것이라고 할만하다. 여여한 자연을 앞에 놓고 그 실감을 표현하기가 시쓰기의 방향이 된다.

「여울에서」는 이런 시적 방법론과, 이 시집에 나타나있는 시인의 관심의 변화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시이다.

 

물 아래 꾸물거리는

물여우는 늙어서

물위의 물여우나비가 되지만

나의 시는 허물이나 되는 것일까

 

물까마귀가 개울가에서 푸드덕 날아오르고

피라미들이 물살을 거슬러

여울을 오를 때에도

과거로 가는 지느러미란 없는 법

 

발바닥에 미끌미끌한 자갈들

다리가죽을 휘감으며 후려치는 물살

출렁거리는 거울 속으로 걸어가는 것처럼

눈부신 여울을 건너가는 대낮에

 

흘러가는 것은 나

나를 건너가는 것은 여울물인가

 

이 시는 종전의 사변적인 명상시가 아니다. 「뭉게구름」이나 「낙조」처럼 자연의 느낌, 흘러가는 강물의 여여한 감각의 세계를 노래한 시이다. 살아 있는 생명이 살아 움직이는 충만한 강물, 여울져 흐르는 강물의 흐름은 기운생동하는 대자연의 모습을 대변한다. 시의 화자는 물여우가 물여우나비가 되고, 물까마귀가 날고, 파라미들이 물살을 거슬러오르는 자연의 세계, 생명감으로 가득찬 그 역동적 세계에 매혹되고 있다. 화자는 눈으로 그 풍경을 보고, 발바닥으로 자갈의 미끄러움 느끼고, 다리가죽을 후려치는 물살을 온몸으로 느끼고 있다. 생기넘치는 감각의 세계이다. 이 여여한 감각의 세계에 대해 나의 시란 것이 오히려 허물이 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하는 화자의 상념은 일리가 있다. 마지막 행도 화자의 자연에 대한 사유의 한자락을 표현하고 있다 하겠으나, 그것은 사유라기 보다는 감각과 여여한 자연의 일체의 순간에서 마음 속으로부터 돌발적으로 솟아오르는 일체감의 느낌과 대응되는 언어 표현이라고 하는 것이 적절하다.

최승호의 시를 읽어온 독자라면 이런 세계가 종전의 시세계와 뚜렷이 차이나는 것이라는 사실을 잘 이해할 수 있다. 그에게 ?반딧불 보호구역?과 같은 자연을 노래한 시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 시편에 나타나는 자연은 대개 잠자리나 달맞이꽃이나 바람처럼 어느정도 한정된 것이었다. 게다가 그 시집의 화자는 이 시처럼 대자연의 품 속에 들어 온몸으로 자연과의 일체감을 노래하기보다는, 禪的 명상의 눈으로 그 자연물들을 관찰하는데 머물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점에서 보면 이 시는 반딧불 계열, 자연 시편에 속하면서도 그 이후를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지금까지의 언어에 대한 일반적인 논의(의미론)를 언어기호가 일정한 대상을 개별적으로 지시하는 것으로 보는 지시작용, 언어는 주체와 의식이 나타나는 공간으로서 주체는 언어에 의해 구성되는 것이라 보는 현시작용, 의미는 기호들 사이의 차이들에 의해 형성된다고 보는 기호작용 등 세 가지로 나누면서, 질 들뢰즈는 여기에 의미란 사건의 순간 존재에서 솟아 오르는 것이라는 견해를 덧붙이고 있다. 이에 따르면, 시적 언어와 의미는 지시작용(재현), 현시작용(표현), 기호작용에 의해 이해될 수 있으나, 시적 언어(의미)는 시적 사건의 순간 시인의 내부로부터 솟아오르는 것으로 보는 것이 더 설득력이 있다. 시적 사건의 순간 존재의 내부에서 오르는 것이 시이고 시의 의미이다. 이 시는 강물과의 교감이라는 시적 사건의 산물이며, 존재의 내부에서 솟아오르는 자발적인 언어의 표현이다. 마지막 두 구절이 특히 그렇다고 생각된다(흘러가는 것은 나/나를 건너가는 것은 여울물인가) 만든 언어가 아니라  존재의 내부에서 자연스럽게 솟아오른 표현이라 할 수 있다.진정한 의미의 시는 시인의 만들어내는 것이라기보다는 시적 사건의 순간 돌발적으로 존재의 내부에서부터 솟아오르는 것이다. 이 시는 명상과 관념을 내려놓고 자연의 감각적 느낌의 순간 떠오르는 언어를 그대로 표현한 시이다.

천 개의 손가락들이 쉬지 않고/줄없는 거문고줄을 뜯듯이 들려오는 여울물 소리를 노래한 「여울이 歌王」도 그렇게 읽을 수 있다.

 

왜가리는 

반가사유상도 아니면서

고개를 숙이고 물가에 서 있다

천개의 손가락들이 쉬지 않고

줄없는 거문고줄을 뜯듯이

여울물소리 들려오고 있었다

나는 물의 관객이었다

뜨거운 청중이었다

눈은 눈부신 여울을 보고 잇엇고귀는 여울의 노래를 듣고 있었다

여울가에는 큼직한 음표같은 돌들이 많다

조약돌 자갈들

하늘밖에서 굴러온 무슨 은하계의 돌조각이든

늘 귀머거리 늙은 돌들에게

들을테면 들으라고 나는 말한다

여울이 가왕이다 그침이 없다

그렇지 않다면 온몸을 게우듯 왝왝거리는

왜가리가 가왕이랴

 

대자연의 소리가 진짜 노래이다. 노래의 왕은 왜가라가 아나라 여울이다. 물론 여기서 시인의 왕도 제외된다. 자연의 소리가 노래의 왕이라고 말하는 시인을 만날 수 있는 시이다. 화자는 자연의 소리에 귀기울이는 물의 청중이고 관객이다. 여울물 소리가 음악이라면 물가의그 음표이고 청중인 화자는 그 음악의 번역가이다. 천개의 손가락들이 쉬지 않고/줄없는 거문고를 뜯듯이 ― 이 표현은 아주 시적이다. 앞에서 언급한 시적 표현이다.

이 시들에 비하면 종전의 그로테스크 ― 모래인간은, 이미 그 제목에 나타나있는 것처럼 자연과 초록 생명 세계의 결여에 대한 시이며, 자연의 감각과 자연 이미지의 배제에 의해 얻어진 시세계였다. 도시를 배경으로 한 상상적 이미지의 시이며, 그래서 다소 작위적인 분위기를 풍긴다. 그것은 현실의 재현도 아니며 자기 표현도 아닌 상상이 만들어낸 사변적 세계이다. 그러나 상상의 극한으로 나아갔던 시쓰기는 다시 현실 돌아오게 마련이다. 명상의 극한과 나날의 일상을 오가는 시쓰기는 최승호의 시쓰기의 리듬이기도 하다. 그의 많은 시들은 생성과 소멸, 삶과 죽음, 밝음과 어두움, 도시와 자연, 죽음과 재생, 해체와 변이를 오가는 거대한 순환 운동 속에 위치한다. 개별적인 시세계도 그렇고 시작의 전개과정도 그렇다. 그는 의도적으로 그 양극단을 동시에 사유하면서 인간과 생명들의 부단한 생성과 변이를 집요하게 응시하는 시쓰기의 리듬을 지속해왔다. 그런 의미에서 모래인간의 비인간적인 무기물의 세계는 그안에 초록생명의 세계를 간직하고 있었고, 초록생명의 세계는 그 안에 해체를 간직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이 시집은 그 생명의 세계 쪽으로의 움직임을 구체화한 것으로 이해된다. 말하자면 종전의 상상의 극한에서 다시 생활 속으로, 잃어버린 자연 속으로 귀환하고 있는 시집이다.

물론 이 시집에도 종전의 명상적인 시들의 반복과 변이, 변주로 볼 수 있는 시들이 적지 않다. 예를들면 「물방을 무늬 넥타이를 맨 익사체」는 죽음을 다룬 시들의 한 변주이고, 「공터의 소」는 「공터」, 「공터의 테이프」, 「공터의 공」의 한 변주이고, 「중생대의 뼈」는 「모래인간」과 비슷한 모든 것을 무화시키는 우주적 시간에 대한 명상의 지속이며, 「물뱀」은 자기 내부에 꿈틀대는 욕망에 대한 성찰이고(물뱀의 이미지는 그의 여러 시에서 지속적이다), 「비둘기의 벽화」는 「구토물을 먹는 아침」과 비슷한, 그로테스크한 도시 생명에 대한 명상의 시이다. 우리는 이 시집에 나오는 시제목이나 시어들이 등장했던 이전의 시들의 목록을 작성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 시집은 전체적으로 보아 종전의 시가 잠시 외면해 왔던 대자연의 활기찬 세계를 적극적으로 끌어들이면서 그것을 노래하고 있다는 점이다.

 

3. 생활과 창조적 기억의 세계

 

누가 익사하지 않나? 구조대원들이 높은 데 앉아

무시무시한 바다를 감시하고 있을 때

낮술에 크게 취한 한 남자가

바다의 익사체처럼 드러누워 뻗어 있을 때에도

나는 놀면 큰일 나는 가장으로서

여덟살 난 아이의 늙은 비서로서 해변에 남아

좀 엉뚱한 상상에 빠지기도 했다네

― 「피서지에서」

 

가족과의 피서지에서의 경험을 다룬 시이다. 인용시의 뒷부분에 화자의 상상이 덧붙여져 있으나(이 부분은 인용하지 않고 생략하였다), 생활과 관련된 시라 할 수 있다. 가족과의 여행은 오늘날 생활의 일부분이라 할 수 있는데, 이 시집에는 동해안 여행과 제주도 여행 시편이 상당수 있다. 이 방면의 시들이 문명 속의 인간에 대한 집요한 명상과의 거리두기에 의해 쓰여지고 있다는 점은 특기할만하다. 상상―명상과의 거리두기가 생활의 시적 수용(생활의 발견)을 가능하게 한 것이다. 시에서의 자연의 발견, 기억의 회복도 마찬가지이다.

기억이란 대뇌 속에 축적된 체험, 학습이지만 그것은 시간 속에 살아온 삶 자체이다.이 기억은 모든 문학의 중요한 토대이다. 프루스트의 소설에서 언급되고 있는바와 같이, 기억은 사건의 계기에 따라 무의지적 회상으로 이어지며, 이와 관련된 창조적 기억 즉 기억이 바탕을 둔 창조야말로 문학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기억의 반대는 망각이고 이는 생의 고갈, 죽음과 통한다). 이 기억은 공동체가 공유하고 있는 기억과 개인에게 고유한 개인적 기억으로 구분할 수 있으나, 개개인의 차이나는 기억은 여러 작가들의 글쓰기의 중요한 원동력이 되어왔다. 최승호의 시에서도 그의 개인적 기억이 시쓰기의 중요한 계기로 작용하고 있다. 다음과 같은 예가 그렇다.

 

광부의 도시락과

술집에서 늙은 여자의 노래와

쌍굴다리를 내려오던 코흘리개 아이들을 나는 기억한다

 

들장미는 재 흘러내리는

철로변에 있었다

그것은 피사체가 아니었다

마음은 사진기계가 아니었다

나는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

들장미라는 말이 떠오르기 전에

들장미가 있었다

 

그것은 분석의 대상이 아니었다

나는 향기로운 한송이 인간이 아니었다

우울하게 나는 다시 길을 갔다

그 뒤로도 이십년을 무겁게 나는 걸어왔다

 

들장미는 어떻게 되었을까

아직도 잿가루 흩날리는 철로변에

기우뚱하니 피어 있을까

― 「재 위에 들장미」

 

기억의 묵은 창고 속에서 화자가 꺼내보이고 있는 것은 재위의 장미 한송이이다. 이 장미는 기억의 저편에 숨어 있던 도시 생활 속에서 잊고 있었던 장미이다. 그가 전에 에 대한 시를 쓴 적이 있지만 재위의 장미의 기억을 노래한 적이 없었다는 점에서, 시집 속에 수록된 일련의 자연 시편들과 관련지워 이해할 수 있는 시라는 점에서, 온전한 생명을 향한 시인의 마음의 움직임을 드러내보이고 있는 시라는 점에서, 이 시는 그의 시쓰기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시로 생각된다. 그 자체가 감동적인 좋은 시라는 점도 특기할만하다. 들장미라는 말이 떠오르기 전에 그것은 거기 있었다. 그것은 분석의 대상이 아니었다는 진술은 그로부터 걸어온 20년의 생애를 돌아보는 것으로 귀결된다. 시인이 추억을 말하고 있다는 것은 곧 희망을 말하는 것과 통한다. 죽음을 의미하는 재 위에서 피어난 장미의 기억이란 그 자체가 새로운 생성이고, 생성이란 현재와 다른 다른 것으로 되기를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의 시에서 기억이 개입되고 있는데 그 기억은 과거와 현재를 연결시키면서, 자기의 실존을 돌아보는 성찰의 매개적 기능을 수행하고 있다. 그 점에서 그것은 그의 시에 자주 나타나는 거울 이미지와 비슷한 기능을  담당하고 있다고 이해된다.

 

쑥내 풍기는 햇살 속에서

오래 전에 他界한 우리 할머니 같은

꼬부랑 할머니가 냉이를 캐고 있었다

어른거리는 아지랑이

이미, 많은 내 숨결은

나 아닌 숨결이 되어버렸다

 

정오 무렵 섬을 가로지르다

평지처럼 밋밋해짐 무덤을 밟고서 있는

수염긴 염소와 눈이 마주쳤다

내가 나를 들여다보는 듯한 기묘한 느낌!

길 위에서의 우연들

엉성한 거미줄처럼 찢어질 인연들

악연이든 우연이든 필연이든

내가 그 무슨 緣에도 속하지 않는 날이 있을 것이다

 

밋밋한 무덤 위에 우뚝 선 염소는

경계를 늦추지 않고

뱃속에서 꺼낸 풀을 다시 우물우물 씹으면서

당신은 뭐요? 라고 묻는 듯 나를 쳐다본다

그 뿔난 머리 너머에서

어른거리는 아지랑이

드넓은

숨결의 飛天像

― 「아지랑이」

쑥내 풍기는 햇살, 나물캐는 꼬부랑 할머니라는 기호가 어릴 적의 타계한 화자의 할머니의 추억을 불러온다. 쑥내는 나물과 관련된 감각적 이미지, 어릴적 행복의 이미지이다. 이 시에도 화자의 사념이 작동하지만, 그 시선은 눈앞의 염소 뿔너머에 어른거리는 아지랑이이다. 아지랑이가 드넓은 숨결의 비천상으로 표현되고 있는데 이 시의 묘미가 있다. 그런가 하면 기억이 고단한 도시적 삶의 힘겨움을 눅여주는 휴식의 의미로 구현되기도 한다. 다음 시에 나타나는 두엄 냄새의 기억도 시골에서의 이 봄아지랑이의 기억과 관련되어 있다. 그것은 도시의 고단한 문명과 사람을 지치게 하는 메마른 일상이 없는 과거의 시골 생활에 대한 그리움을 상징하는 것이자, 피로한 도시적 일상 생활을 넘어설 수 있는 어떤 초월적이고 형상학적인 세계의 표상으로 읽을 수도 있다. 시간과 죽음에 대한 사유가 끼어들고 있기는 하지만 그 기억은 일어버린 자연의 세계로 이어져 있어, 시의 우울한 분위기를 크게 완화시키고 있다. 그는 시간 속에 늙어가는 생명의 원리와  사라지게 마련인 삶을 긍정한다.

 

자동차, 컴퓨터, 휴대폰, 그 광고들의 난리 속에서

내 피난처는 무심

그래도 피로와 적의 속에서 늙는다

 

어제는 턱에 흰수염이 부쩍 늘어난 걸 발견했다

이건 자연의 묘용이고 日月이 흘러간다는 증거이며

내가 언젠가는 사라진다는 소식이다

나는 강원도에서 죽고 싶다

북춘천 우두벌에서

우두커니 바라보던 아지랑이

향기치고는 좀

역겨웠던 두엄 냄새

산하대지의 두엄으로 육신이 두루 나누어질 때

그때는 지렁이처럼 축축한 생각들도

봄하늘 아지랑이로 나른하게 발효가 될까

 

태양이 공병부대 긴 담장과 논두렁 위로 굴러가던

북춘천

우두벌의 아지랑이.

이웃집 바보처녀애도

두엄냄새 속에서 괜히 침을 흘리며

한적한 마을을 낮도깨비처럼 실실 웃고 돌아다니던

― 「두엄」

 

4. 대자연이 펼쳐보이는 우주적 드라마 앞에서

시적 화자의 명상―상상과의 거리 두기가 자연과 생활의 시적 수용으로, 기억의 회복으로 나타나고 있다는 점은 이 시집의 중요한 특성이다. 풍부한 자연 이미지들이 등장하고 있는 시들은 대개 시의 배경이 도시라는 생활 공간을 떠남으로서 얻어진 것이다. 여행은 그 중요한 계기로 작용한다(「피서지에서」, 「부두의 오후」, 「물허벅」, 「검은 돌」, 「아지랑이」 등), 시집에는 도시공간을 배경으로 한 시와 자연을 배경으로 한 여행시가 섞여있지만, 시인의 여행은 도시적 일상으로부터의 탈주를 의미한다. 도시는 그의 시에서 대개 삶의 생기와 생명의 에너지를 억압하는 장소로 나타난다. 이 도시 탈주를 통해 대면하는 것이 자연인데, 이 자연은 자연뿐 아니라 내면의 자연(억압되지 않은 순수하고 자유로운 마음)도 포함한다. 「텔레비전」은 자연과의 대면이 낳은, 무한 자연과 자유로운 정신의 무한을 노래한 가장 아름다운 시중의 하나이다.

 

하늘이라는 無限 화면에는

구름의 드라마,

늘 실시간으로 생방송으로 진행되네

연출자가 누구인지 모르겠으나

그는 수줍은지

모습 드러내지 않네

 

지난 여름의 주인공은

태풍 루사가 아니었을까

루사는 비석과 무덤들을 무너뜨렸고

오랜만에 뼈들은 진흙더미에서 해방되어

강물로 뛰어들었네

 

기를 쓰며 울어대던 말매미들이

모두 入寂한 가을

붉은 단풍이 고산 지대로부터 내려오고

나무들은 벌거벗을 준비를 하네

 

그들은 어느 산등성이를 걷고 있을까

툭 트인 암자 툇마루에서 쉬고 있을까

나는 천성이 게으르고 누구와도 잘 어울리지 못하는 사람인지

산좋아하는 이들을 마지못해 따라나서도

계곡에서 그냥 혼자 어슬렁거리고 싶네

 

누가 참 염치도 없이 내다버렸네

껍데기만 남은 텔레비전이

무슨 면목없는 삐딱한 영정처럼

바위투성이 개울 한 구석에 처박혀 있네

텅 빈 텔레비전에서는

쉬임없이

서늘한 가을물이 흘러가네

 

이 시는 시시각각 다른 풍경을 비추는 자연이라는 거대한  영상기계 ― 그 안에서 생성되는 다양한 사물을 품에 안고 부단한 생성을 거듭하는 우주적 자연를 펼쳐보인다. 화자는 친구들과 등산 중이며, 하늘이 펼쳐보이는 구름의 드라마를 보며 지난해 루사가 보여준 드라마의 의미를 생각한다. 태풍으로 무덤 속의 뼈들이 진흙더미를 뚫고 강물에 뛰어들었던 일, 눈앞의 계절의 순환과 말매미의 입적, 잎을 떨구는 나뭇잎들, 개울가 가을물 속에 잠긴 껍데기만 남은 고물 텔레비전(인공적이고 유한한 영상기계) 등은 모두 변화와 생성을 거듭하는 대자연이 연출하는 드라마의 풍경들이다. 이 시는 확트인 자연 속에서 쉴 사이 없이 변화 하는 생명들과, 그 품안에 어슬렁거리는 인간과, 문명의 잔해인 고물 텔레비전의 병치시킴으로서 자연의 무한함을 일깨운다. 특히 무한한 자연의 드라마와 수명을 다해 개울가에 처박혀 있는 껍데기뿐인 텔레비전의 병치는 이시에서 특히 눈여겨보아야 할 부분이다. 화자는 자신의 눈을 빌어 다만 자연 속에서 펼쳐지는 풍경을 보여줄 뿐, 마음에 어떤 안쓰럼이나 자의식의 그림자같은 것을 찾아볼 수 없다. 하늘과 땅을 아우르는 탁트인 넓은 시야에서 대자연의 드라마를 포착하고, 변화와 생성을 거듭하는 자연의 기억과 풍경과 사물의 배치를 서술하고 있을 뿐이다. 대자연의 순환 앞에서는 죽음(뼈)도 해방의 의미를 부여받을 수 있다.

 

5. 삶의 긍정과 실존의 修養으로서의 시쓰기

이 시집에는 종전의 시에서 볼 수 있었던 시인의 불안이 여전히 남아 있다(나는 늘 불길해지는 미래의 오늘로 끌려온 것 같다/뭔가 좋아질 것 같았던/그러나 불안의 아가라만 벌어진/오늘 ― 「끈」, 내가 휘발해버린 그때에/더 이상 불안으로 덜덜거리는 中古의 혼이 나에게는 없을 것이며 ― 「휘발」). 이 불안은 도시적 삶의 힘겨움에서 비롯되는 시인의 실존적 불안이다. 아울러 실존의 성찰과 관련된 거울의 이미지도 시에서 지속적으로 나타난다. 화자는 정지된 세계에 머물러 있지 않다. 그 반대이다. 화자가 대상에 고착되거나 도시적 공간, 실내의 명상적 공간에 머물지 않고 부단히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은 특히 기억할만하다. 명상적, 사변적 세계에서 벗어나 생활 속으로 자연과 기억 속으로 움직이는 시이다. 사변적인 시도 없지 않다(「죽뻘」, 「비분류법」, 「아무일 없었던 나 」). 그의 시쓰기에서 명상의 비중은 여전히 크지만, 이 시집이 ?모래인간?의 명상의 세계에서 벗어나 생활 속으로 적극적으로 움직이고 있는 시라는 사실은 분명히 말할 수 있다.

그의 시에는 욕망을 주제로 한 시가 적지 않다. 이 욕망이 프로이드적인 의미의 욕망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욕망은 생의 중요한 징후이다. 다르게 말하면 인간의 본질적 부분이다. 부모미생전의 알과 같은 상태, 기관없는 신체(들뢰즈)가 욕망(욕망하는 기계로서의 인간은 곧 욕망이다)의 기원이라 할 때, 그 욕망은 인간을 인간이게 하는 원초적 에너지, 生氣라 할 수 있으며, 문제가 되는 것은 욕망 자체가 아니라 그 욕망의 자유로운 흐름을 억압하는 사회적인 힘이다. 그 욕망을 긍정하고 그 흐름을 따라가면서 그것을 누르는 제도와 사회적 힘을 탐구하는 것이 시에서는 무엇보다 중요하다. 도시적 문명만이 욕망의 흐름을 억압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다음과 같은 시는 자신의 욕망에 대한 긍정을 보여주는 시로 읽을 수 있다. 욕망의 긍정은 곧 주어진 삶에 대한 긍정이기도 하다.

 

흰대머리 바위들을 적시며

한차례 소나기가 지나가더니

인왕산 위에

무지개 떴다

 

동물원 우리에서 보았던

앞뒤가 영 딴판인 공작새

부채같은 꼬리 깃털들 떠오른다

 

굳이 새삼스럽게 말을 하자면

내 몸안에도 무지개가 있는데

다름 아닌 五慾七情이 나의 무지개

 

찬연할 때 있다

음울할때도 있다

― 「무지개」

 

문학 행위란 가장 넓은 의미에서의 자신의 실존을 앞에둔 修養이다. 시쓰기는 새로운 언어 표현, 새로운 사유의 발견, 새로운 의미와의 마주침인 동시에 자신의 실존을 들여다보며 그것을 정화해가는 행위와 무관하지 않다. 최승호 시집 ?아무것도 아니면서 모든 것인 나?가 우리에게 제기하는 문학적 질문의 하나도 그와 관련된 것이다.

시집의 제목은 시인 자신의 실존에 대한 인식을 표현한 것이다. 그것이 불교적인 어법이되 삶에 대한 부정과 긍정의 이중적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는 것은 인상적이다. 이 이중적 의미의 제목은 자신의 실존에 대한 긍정과 삶에 대한 사랑을 지향하고 있다. 그의 시들은 이 긍정을 향한 시도, 주어진 삶에 대한 긍정과 긍정에 이르기 위한 정신의 변증법이라 할 수 있다. 그의 시쓰기가 보여주고 있는 이 자기 부정/긍정을 통한 긍정에 이르기 위한 노력은 그 자체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어떤 시가 지닌 가치를 판단할 수 있는 기준의 하나가 무엇보다 시인 자신이 자신의 시를 통해 실존의 수양에 도달하고 있는가, 자기 구원에 도달하고 있는가 하는 시인자신의 시적 실존의 문제에 대한 지속적인 질문과 해답 모색의 강렬도의 정도에 의해 좌우될 수 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시인 자신에 있어서도 그렇고 시를 읽는 독자의 입장에서도 그렇다.

최승호의 이번 시집은, 명상과 상상에서 생활 속으로, 억압적 도시 문명의 공간에서 대자연 속으로, 사변에서 사물에 대한 감각의 생산으로, 어두운 상념에서 지금 이곳에서의 생의 감각의 세계를 향하여 부단히 움직이면서, 나아가 마침내 자기 긍정에 이르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시인의 실존에 대한 부단한 질문과 해답 모색의 과정을 통해 온전의 생의 감각을 회복하고 도시 속에서 잃어버린 생의 활기와 에너지를 되찾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의 시적 자의식은 자연이 펼치는 거대한 드라마와 적극적으로 교감하면서 스스로 해방되고 있다. 이번 시집에 나타나는 시적 관심의 전환은 새로운 서정시의 지평을 활짝 열어놓고 있다.

나로서는 이 시집이 여러 가지 의미에서 최승호문학의 새로운 진전을 보여주는 있는 시집으로서, 최근 시단의 가장 중요한 문학적 성취의 하나라고 평가하고 싶다. 최승호시는 이제 새로운 전환기를 맞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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