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文學과 評論

시인―언어를 버려 시를 얻는 자

by 담채淡彩 2010. 7. 16.

시인―언어를 버려 시를 얻는 자
―시집 {비누}를 읽고

이 승 하


  이승훈 선생님께

  백담사에서 선생님을 뵌 것이 한창 추울 때였는데 4월 하순인 이즈음 한낮의 날씨가 어언 여름을 방불케 합니다. 그간 별고 없으셨습니까? 요즘도 하이트 맥주 두 병과 담배 에세와 박카스 두 병과 더불어 하루를 보내고 계십니까? 제 주변에도 담배를 끊은 분이 제법 되는데 같은 한양대 국문학과의 정민 선생이 시집 {비누}의 권말에 올리신 발문을 보니 선생님은 오전에는 에세를, 오후에는 금연초를 태우신다고요. 정년이 얼마 남지 않은 선생님의 건강을 생각하시어 담배를 일시에 끊는 시도를 해보시는 것은 어떨지요? 카페인 성분이 들어 있는 박카스도 매일 드시는 것은 안 좋을 텐데……. 선생님의 건강을 생각해서 드리는 말씀이니 너무 고깝게 여기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저는 선생님의 이번 시집을 읽고 가슴을 아리게 하는 것이 있어 딱딱한 문체의 정식 서평이 아니라 사신 형식의 독후감을 써볼까 합니다. 선생님은 지금까지 내신 그 어느 시집에서도 '시' 혹은 '시 쓰기'에 대한 명상을 지금처럼 집중적으로 하신 적이 없었습니다. 80편 수록 시 가운데 시를 쓰는 행위와 시 자체에 대한 생각을 전개한 시가 무려 서른 편에 달합니다. 저는 우선 그 시편을 읽은 소감을 말씀드릴까 합니다.
  세계 문학사를 수놓은 뒤 명멸해간 수많은 문학인 가운데 제가 인간적으로 애정을 갖고 있는 이는 볼프강 보르헤르트·도스토예프스키·이하·두보·딜런 토마스·애드가 앨런 포·다자이 오사무…… 많고 많지만 중국 당나라 때의 시인 이하(790∼816)만큼 깊은 애정을 갖고 있는 시인도 달리 없을 것입니다. 한문 실력은 없지만 이하 시 전집을 제가 번역하여 내보는 것이 오래 전부터의 소원일 정도입니다. 선생님은 아마도 정민 선생의 {한시미학산책}을 읽으셨을 것입니다. 그 책 178∼179쪽에 나오는 이야기를 거의 그대로 옮겨놓고 제목을 '李賀'라고 붙이셨습니다. 선생님이 창의적으로 쓰신 부분은 "그의 시는"으로부터 시작되는 마지막 한 문장인 듯합니다.

  당나라 시인 이하는 체구가 가냘프고 연약했고 시를 빨리 지었고 (…) 그의 시는 일반 규범에서 벗어나 흉내낼 수 없고 그는 길에서 쓴 많은 시들을 바로 버리고 스물 일곱 살에 죽었다
                                               ―[李賀] 부분

  이하의 생애는 처절했으나 그는 26년 몇 개월을 살면서 줄기차게 '자기 시'를 썼습니다. 시단을 주름잡던 대가들의 눈치를 보지 않았고, 산수전원시와 변새시(邊塞詩)가 주류를 이룬 문단의 유행과 굴원 이래 중국 시가를 지탱해온 문학적 규범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혹자는 그의 시를 낭만주의로 규정합니다만 서구의 문예사조를 구태여 들먹인다면 초현실주의에 가까울 것입니다. 아니면 퇴폐주의나 신비주의, 혹은 유미주의? 아니, 귀신의 세계를 넘나들었으니 판타지문학이라고 해야 할까요? 그는 줄기차게 자기 자신의 시 세계를 유지하였기에 1천 몇 백 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까지도 그의 이름은 조금도 퇴색되지 않고 있습니다. 아니, 오히려 후세인은 시귀(詩鬼)라는 별칭을 붙여 그를 기리고 있으며, 당시사걸(唐詩四傑:이백·두보·왕유·이하)의 한 사람으로 높이 받들고 있습니다. 선생님이 [이하]를 쓰신 이유를 조금 알 듯도 합니다. 시인 이하의 인상이 선생님과 참 많이 닮았고, 또 선생님은 "일반 규범에서 벗어나 흉내낼 수 없"는 시를 지난 40년 동안 써오신 것이 아닙니까. 앞으로도 그런 시를 쓰고자 애쓰실 것이고요. 물론 비대상에서 대상으로, 관념에서 일상으로, 추상성에서 구체성으로 전환해간 시적 역정은 이 글의 범주를 넘어서는 것이어서 언급을 피하겠습니다. 제 개인적인 소감으로는 근년에 선생님이 내신 시집들이 쉽게 이해가 되어 좋았습니다만 사물을(혹은 시적 대상을) 메모하듯이 가볍게 터치했다고 여겨지는 작품들이 더러 있어 아쉽기도 했었습니다. 제목에 '시'가 들어간 3편의 시와 '시'를 제목으로 삼은 3편의 시, 그리고 '시집'이 제목인 시를 먼저 보도록 하겠습니다.

  쓰는 건 모두 시다 원고지 뒷장에 갈기는 낙서 거리에 떨어지는 햇살 아스팔트에 뒹구는 낙엽 달리는 자동차 달리는 오토바이 해안에 부서지는 포말 새기고 사라지고 쓰고 다시 쓴다 낙서도 편지도 일기도 만화도 신문도 마침내 신문도 신문도 시다 (…) 간판도 거리에 시를 쓰고 마네킹도 유리창에 시를 쓰고 이 저녁도 시를 쓰네 시를 쓰며 한 세상 산다 시는 없으므로
                                               ―[모두가 시다] 부분

  시도 없다 시도 없다 다만 시라는 이름이 있을 뿐 이 이름 붙잡고 40년 허망한 언어 붙잡고 40년 이 허망한 바람 모아 오늘 책 한 권 내 무엇 하나? 마당에 내리는 햇살 보고 절이나 하자 저 마당이 시를 써야 하리라
                                               ―[시도 없다] 전문

  외로워서 쓰고 답답해서 쓰고 그리워서 쓰네 그러나 사람들 그리움 모르고 가까운 사람 가까워 모르고 먼 사람 멀어서 모르네 여름 저녁에 쓰는 시 가엾고 절반은 나도 모르는 소리 마음만 여위네 그러나 시름도 근심도 하늘의 일
                                               ―[여름 저녁 시] 부분

  [모두가 시다]를 읽고 제가 느낀 것은 이런 것들입니다. '이승훈 선생님은 요즈음 모든 자연현상과 사물들한테서도 시심을 느끼고 계시는구나. 한편으로는 시라는 것이 참 별 볼일 없게 된 현실에 대해서도 안타까움을 느끼고 계신 것 같다. 시라는 것의 허망함과 시 쓰기의 허무함에 대해서도 비감함을 느끼고 계시나보나.' 안타까움이나 비감함까지는 아닐지라도 오늘날에 이르러 시가 점점 더 사물의 본질에 대한 진지한 탐색도, 인정에 대한 따뜻한 감싸안음도, 혁명을 하겠다는 비장한 결심도, 진정한 문명비판도, 우주의 신비에 대한 성찰도, 뭇 독자를 위한 위안의 노래도 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어느 누구도 부인할 수 없을 것입니다. 햇살 내리는 저 마당이 시를 쓸 일이지 내가 왜 허구한 날 시 쓰기에 얽매이고 있나, 한탄이 절로 나오시나 봅니다. 그렇지만 시인이 된 것이 천형인 바, 선생님은 지난 40년 동안 시를 써오지 않을 수 없었고 오늘도 시를 쓰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선생님은 [여름 저녁 시]에서 시 쓰는 이유를 밝혔습니다. 외롭고 답답하고 그립기 때문이라고요. "절반은 나도 모르는 소리"인 시 자체가 가엾기만 합니다. 그래서 시를 쓰는 동안 선생님은 마음이 여위기만 한 것입니다. 애당초 시를 쓰지 않았더라면 시로 말미암은 시름도 근심도 하지 않았을 테지만 시를 씀으로써 잊어버린 시름이며 근심 또한 적지 않았겠지요. 선생님이 최근에 내신 시론집 {시적인 것도 없고 시도 없다}의 제목은 바로 이런 마음을 대변한 것이 아닐까요? 하지만 선생님은 지난 40년 동안 시인이었으며 아무리 연세를 드셔도 계속 시인으로 살아가실 것입니다. 앞에서도 말씀드렸지만 시인이 된 것이 천형이니까요. 그 운명을 거역할 수는 없습니다. 선생님은 시라는 것의 허망함과 시 쓰기의 허무함에 대해서도 자주 한숨을 내쉬듯 토로하고 계십니다. 특히 제목을 [시]로 정한 3편의 시를 통해서.

  시를 써서 무엇하나 횡설수설 시를 쓰고 잡지에 발표하고 발표해서 무엇하나 (…) 글 없는 글, 말 없는 말, 시 없는 시가 있다면 한줌에 들고 그대 찾아가리라
                                               ―[시](44쪽) 부분

  시 쓰기가 권력과 영광과 무관한 것임은 40년의 시력을 갖고 있는 선생님이 잘 알고 계실 것입니다. 차라리 그것은 외로운 작업이며 괴로운 노동이지요. 문예지가 매달 수십 종, 매 계절 수백 종이 쏟아지니 어느 누가 한 시인의 시를 꼼꼼히 읽어줍니까. 시집을 내본들 독자는 극히 한정되어 있어 재판 찍기도 쉽지 않게 된 세상입니다. 그래서 선생님께서는 글 없는 글, 말 없는 말, 시 없는 시라는 극단적인 생각까지 하게 된 것이 아닐까요. 불가에서 말하는 불립문자와는 다른 차원의 말씀을 하신 것일 겝니다. 그만큼 시라는 것에 대한 절망감이 가슴에 사무쳐 이 시를 쓰신 것이 아닐까요.

  이 시는 여우도 못 읽고
  지나가는 바람도 못 읽고
  우리 석준이 호준이는
  마루에서 논다네
  어떻게 가벼운 마음이
  되랴
  말 한마디 시 한 줄이
  두려울 뿐이다
                                               ―[시](90쪽) 부분

  손자의 이름이 석준이와 호준인가 봅니다. 두 손자는 물론 동화책 속 여우도 바람도 같이 읽으라고 시를 써보지만 쓸수록 추위만 더하고, 이 세상 그 어느 누구도 시를 읽어주지는 않습니다. 시인의 시작 행위에 관심을 갖지 않는 것이지요. 이제는 다만 "말 한 마디 시 한 줄이/두려울 뿐"입니다. 그래서 "이 시는 다른 사람이/쓰면 좋겠다/나말고 저 나무가 쓰면/좋겠다/아니 현관에 있는 구두/벽에 걸린 모자/나 대신 시를 써라"(94쪽의 [시])고 부르짖게 된 것이겠지요. 시 쓰기의 자의식이 뼈에 사무치지 않고서 어찌 시 쓰기에 대해 이렇게 괴로워할 수 있겠습니까. 선생님은 어느덧 시집을 내는 행위가 자랑도 정열도, 권력과 영광도 아닌 참회록 발간과 진배없는 것임을 설하고 계십니다.

  생각하고 따지고 3부로 나누고 다시 읽고 고치고 도대체 이게 무언가? 그 동안 나는 없다고 공부한 게 덧없고 부끄럽고 망측하고 갑자기 화가 나서 시집 원고를 던지네 머리를 숙여야 하리 그 동안 무슨 공부를 하고 어디서 놀다 왔는가? 시집 한 권은 무엇이고 두 권은 무엇인가?
                                               ―[시집을 내며] 부분

  시집 내는 것이 뭐 그리 대수로운 일이냐고 자신을 책하는 말이 한 편의 시가 되었군요. "머리를 숙여야 하리"라는 문장 앞에서 제 머리가 숙여집니다. 저는 이제껏 몇 권의 시집과 시론집을 내면서 스스로 주선해 출판기념회를 연 적이 한 번도 없었는데,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동문들과 더불어 동인활동을 했던 시절에도 민폐를 끼칠 출판기념회만은 한사코 거절했었습니다. 최근에 시론집을 한 권 냈더니 예술대학원 졸업생 10명 정도가 조촐한 저녁자리를 마련해놓았다고 하여 끌려나간 적이 있었습니다. 참 어색하고 쑥스러운 자리였습니다. 그날 받은 꽃다발은 세상에 나서 받은 제일 부끄러운 꽃다발이었습니다. [시집을 내며]의 끝 문장이 인상적입니다. "아직도 머언 바위 하나 앉아 있네". 그렇지요, 이백과 두보가, 왕유와 이하가 시로써 명리를 얻고 치부를 하려 들었다면 어찌 '당시사걸'이라는 불멸의 명예를 전할 수 있었겠습니까. 저는 선생님이 쓰신 시에 나오는 "머언 바위"라는 낱말을 통해 또 한번 확실히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저도 선생님처럼, 꿈꾸어야 할 것은 머언 바위입니다.
  세인 중에는 선생님이 그저 일기 쓰듯이, 메모 적듯이 시를 쓰고 있는 줄 아는 사람들이 더러 있습니다. 선생님 자신도 "그 동안 쓴 시는 모두 바람이 쓴 시"([낯선 도시에서]), "시 쓰기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능력이고 생략, 여백, 결핍의 웃음이고 사막의 웃음이다"([여백]), "생각나는 대로 나는/시를 쓴다"([매미]), "바람 속에 앉아 시를/쓰네/그러나 바람 속에 아무도/없고"([떠돌이]) 같은 시구를 통해 시 쓰기 행위를 퍽 자조적으로 표현하기도 했었지요. 하지만 저는 선생님의 그런 자조가 궁극적으로는 좋은 시를 쓰기 위한 몸부림임을 알고 있습니다. 선생님은 시의 가장 작은 단위인 낱말 혹은 언어에 대해 누구보다 투철하게 싸워오신 분임을 저는 또한 잘 알고 있습니다. 선생님이 출간하신 10권이 넘는 시론집이 그것을 증명하고 있으며, 특히 이번 시집이 그것을 웅변하고 있습니다.

  나도 버리자 나도 버리고 나도 버리고 남은 건 언어 이 황량한 언어 언어가 나이므로 언어도 버리자 언어도 버리고 시를 써야 한다 언어를 버리는 심정으로! 이런 심정도 없는 심정으로!
                                               ―[언어도 버리자] 마지막 부분

  돈 때문에 시를 쓰지 않았고 나이 든 어린애처럼 낱말들과 놀고 살았으니!
                                               ―[예술은 작은 놀이] 마지막 부분

  앞의 시에서 선생님은 나를 버리고 남은 것이 언어인데, 언어가 곧 나(I)라는 등식을 보여주었습니다. 나도 버리고 언어도 버리고 시를 쓰자는 말씀은, "나도 버리고 남은" 언어에 투철해야 함을 역설적으로 드러낸 것이 아닙니까. 뭇 시인들의 도저한 역사의식과 첨예한 사회의식과 늘 일정한 거리를 두어온 선생님은 나이 든 어린애처럼 낱말들과 놀고 살았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예술, 곧 시 쓰기는 작은 놀이에 지나지 않은데 시대적 소명감 때문에 너무 큰 의미를 부여해온 것이 아니냐는 비판적인 뜻도 들어 있는 듯합니다. 한편으로는 시가 뭐 그리 거창한 것이냐는 뜻도 들어 있는 듯합니다. 제목에 짐승이 나오는 시 2편이 그에 대한 해답을 제공합니다.
 
  그는 벽에 호랑이를 그리고
  벽 속으로 들어갔지
  나도 이 시를 쓰고 시 속으로
  들어가면 얼마나 좋을까
  가능한 적게 먹고
  적게 공부하자
  그는 웃고 나는 시를 쓰네   
                                               ―[호랑이] 전문

  물론 저 닭은 내가 시인인 걸 모르고 내가 교수인 걸 모르고 내가 감기로 고생인 걸 모른다 그러나 저 닭이 안다면? 그때도 나는 닭처럼 살아야 하리 닭처럼 처마 아래 앉아 있어야 하고 닭처럼 시를 써야 하고 닭처럼 알을 낳아야 하고 닭처럼 고백해야 한다 닭처럼 닭처럼 하늘을 보고 있어야 한다 저기는 저렇게 푸르고 여기는 이렇게 푸르다
                                               ―[닭처럼] 전문

  앞 시의 '그'가 누구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제가 알아들을 수 있는 것은 그가 호랑이를 그리고 벽 속으로 들어갔다는 것과 벽 속의 그가 웃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라는 자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가가 문제가 아니고 중요한 것은 내가 시를 쓰고 있다는 것입니다. 짐승도 다름 아닌 호랑이를 그렸으니 거대담론을 논하거나 큰 목소리를 내는 문학인을 연상하게 됩니다. 그러나 시인은 누가 뭐라고 하든 어느 자리에서나 시상을 떠올리거나 시를 쓰고 있어야만 하는 자입니다. 저는 다음과 같은 시에서 선생님 시의 진정성을 확인하게 됩니다.

  춘천교대 교수 시절 초여름 밤 석사동 논에서 울던 개구리 소리도 언어다 나는 이 언어들을 버리려고 이제까지 시를 썼다 아아 힘이 든다
                                               ―[언어를 버리려고] 마지막 부분

  힘이 든다고요. 이제 저도 알겠습니다. 시인은 언어를 버려 시를 얻는 자임을. 언어의 사슬에서 풀려나 언어를 갖고 노는 자, 그 언어마저도 버리려 하는 자, 그가 바로 시인임을. 아무리 시가 말놀음이라 하지만 말재주는 잔재주와 통하는 것이겠지요. 선생님은 이제껏 줄기차게 시를 쓰고 시론을 전개해오셨지만 시의 질료인 언어와 이렇게까지 싸우고 화해하고, 또 싸우고 화해해왔는지 저는 솔직히 몰랐습니다. 중국 당나라 때의 기인 한산자를 노래한 시 [寒山]을 읽고 저는 '옳거니! 이건 이승훈 시인의 자화상이로고'라고 생각했는데, 제가 오해를 한 것입니까?

  그는 나무 잎사귀에 시를 쓰고 마을 벽에 시를 쓰고 가난한 햇살 먹고 살았다 떨어진 옷 입고 바람 부는 저녁이면 절 부엌에서 밥을 짓고 그릇을 씻었다 밥을 지으며 중얼거리지만 무슨 말인지 알 수 없고 그는 허공을 향해 호통을 치고 사람들이 때리면 손뼉을 치고 깔깔 웃으며 달아났다 지금도 달아난다 지금도 달아나는 그의 모습이 보인다
                                               ―[寒山] 전문

  생몰년이 불확실한 한산자는 명확한 전기적 사실도 전하지 않습니다. 후세 여구윤이란 사람이 쓴 시집 서문([寒山子詩集序])을 읽어보면 그 인물이 더욱 신비로워질 따름입니다. 김달진 선생이 역주하신 {唐詩全書}(민음사, 1987)를 보니 한산자에 대해 설명이 비교적 잘 되어 있습니다. 그 일부를 여기에 적습니다.

  성명은 알 수 없고, 항상 天臺 始豊縣에 있는 寒岩의 깊은 굴 속에 있었으므로 '寒山'이라 한다. 몸은 바짝 마르고, 보기에 미친 사람 비슷한 짓을 하며, 늘 國淸寺에 와서 拾得과 함께, 대중이 먹고 남은 밥을 얻어 대통에 넣어 가지고 둘이 서로 어울려 寒山으로 들어가곤 하였다. 미친 짓을 부리면서도 하는 말은 佛道의 이치에 맞으며 또 詩를 잘하였다. 어느 날 臺州刺史 閭丘胤(여구윤)이 寒岩으로 찾아가 옷과 약 등을 주었더니, 그는 큰소리로 '도적놈아, 이 도적놈아, 물러가라' 하면서 굴 속으로 들어간 뒤에는 그 소식을 알 수 없었다 한다.

  한산자는 후세 사람이 붙인 이름이겠지요. 그는 세상을 등진 채 굴 속에 은거해 살면서 밥을 해결하기 위해 국청사에 내려오곤 했습니다. 절의 불목하니 습득을 도와 땔감도 갖다주고 물도 길어다주며 밥을 얻어먹지 않았을까요. 한산자는 나무와 바위에 시를 써두었고, 국청사의 중이 편집하여 300여 수가 지금까지 전해 내려오고 있다고 합니다. 역시 김달진 선생의 역주로 {寒山詩}(민음사, 1991, 제2판)가 나와 있습니다. 제 손때가 묻어 있는 책으로, 한산자의 시에 대해선 월간 {현대시학}의 '고전을 다시 읽는다' 시리즈에 글을 한 편 기고한 적도 있습니다. 선생님은 한산에 살았던 한산자를 '한산'이라는 이름으로 불렀고, 그의 기행을 한 편의 시에 담았습니다. 어떻게? "달아났다 지금도 달아난다 지금도 달아나는 그의 모습이 보인다"고. 동네사람들에게 미친놈 취급을 받으며 깊은 산 굴 속으로 달아나는 한산자의 모습이 선생님 눈앞에 자꾸만 어른거려 이 시를 썼다고 여겨집니다. 이것은 선생님뿐만이 아니라 21세기인 지금 시인이 처해 있는 모습이 아닐까요. 최첨단 과학문명, 혹은 초고속 인터넷 시대에 시인이 발붙일 영토가 너무 좁아 외롭고 괴롭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를 써야만 하는 천형을 선생님은 마다하지 않으시겠지요?
  제목을 '비누'로 삼은 시가 또한 3편인데 시집의 제목이니 만큼 이제부터 이 시편에 대한 느낌을 간단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제게는 비누라는 것이 몸이나 의복의 깨끗하게 하는 데 도움을 주는 물건, 거품을 내는 물건, 향기를 풍기는 물건 등으로 인식됩니다. 12쪽과 54쪽의 시는 선시(禪詩)로 다가와 어렵기만 합니다. "비누는 씨앗도 아니고 열매도 아니다 아마 추운 밤 깊은 산 속에 앉아 있으리라"(12쪽 [비누]), "비누는 배추가 아니다 그러나 가을 아침 햇살에 젖는 비누는 푸른 배추 배추밭에 바람 불고 배추가 피를 흘린다"(54쪽 [비누])는 등의 시구는 어렵기만 합니다. 하지만 비누를 물거품처럼 사라지는 것으로 인식하신 76쪽의 [비누]는 십분 공감이 갑니다. 시집 전체를 관통하는, 시 쓰기의 외로움과 괴로움이 이 시에도 나타나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 겨울 저녁 난 시를 쓰네 비누가 하는 말에 귀를 기울이며 앉아 있네 문득 비누가 다가와 나를 만지네 나는 비누 속에 사라지네 나도 물거품 비누도 물거품 벗어날 길은 없네 비누의 길이 삶의 길 비누와 함께 비누를 따라 비누 속에 살자! 비누는 매일 사라진다
                                               ―[비누] 부분

  선생님은 비누를, 매일 물거품을 일으키며 자신의 역할을 하면서 조금씩 사라지는 물건으로 인식하고 있습니다. 시인 또한 그런 것이지요. 시가 물거품에 지나지 않은 것이라 할지라도 시인은 시를 쓰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시인은 시를 쓰면서 늙어가는 존재이기에 "비누의 길이 삶의 길 비누와 함께 비누를 따라 비누 속에 살자"고 다짐해보는 것이 아닐까요. 저 역시도 선생님의 연세에 이르도록 열심히 쓰는 시인이고 싶습니다. 하지만 "가능한 적게 먹고/적게 공부하자"([호랑이])는 말씀에는 따르지 않겠습니다. 안 그래도 말라깽이인데 살이 더 빠지면 곤란하니까요. 적게 공부하자는 것은 농담이시겠죠? 우리 시단에 선생님만큼 성실한 학자는 많지 않으니까요.
  그럼 이것으로 시집 {비누}에 대한 독후감 쓰기를 마칠까 합니다. 늘 건강하시어 앞으로도 계속 시를 쓰는 현역시인, 시론을 전개하는 문학평론가로 계셔주시길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