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文學과 評論

사랑, 그 황홀한 毒

by 담채淡彩 2011. 5. 20.

 

사랑, 그 황홀한 毒

  -패자의 승리 법                                          

                                    /손현숙





  우리 춤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것은 극기에 가까운 유연성을 요구한다. 상식적으로 유연성이라 하면 힘을 빼는 일인데, 우리 춤은 오히려 몸에 힘을 빼는 것에 굉장한 힘이 실려야 한다. 힘 빼는 일을 자유롭게 할 수 있어야 동작을 아름답게 연결시킬 수 있는 것인데, 거기에는 또 숨을 다스려야 하는 일이 남아있다. 호흡을 자유자재로 조절할 수 있어야 비로소 춤은 나비처럼 새처럼 혹은 공기처럼 하늘을 떠돌다 사뿐, 바닥에 닿을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은 행위라고 보기에는 너무도 황홀한 고통인지라 거의 무위에 가깝다 할 수 있겠다.


  이런 춤을 자기 것으로 소화 할 때까지는 세월 또한 만만치 않을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일은 그것 자체를 즐기는 것이라 했다. 문인수가 자서에서 밝혔듯이 ‘재미, 라는 말 안에 인생 전부, 전반을 우겨넣고 말 할 수 있다면, 나는 아직 시 쓰려는 궁리, 쓰는 노력보다 더 그럴 듯한 일이 없는 것 같다’처럼 세상에는 아는 것보다 좋아하는 것이, 좋아하는 것 보다는 즐기는 것이 훨씬 더 높은 경지라 하지 않던가. 시 창작이 어깨에 힘을 빼고 즐기는 데 이르려면 얼마나 많은 시간 고독을 감내 해야 하는 것일까.



  문인수의 시집 ?쉬?를 읽는 동안 나는 모든 것을 포기한 듯, 그러나 누구도 결코 함께 할 수 없는 패자의 승리법을 읽었다. 그가 어느 벌판에서 부채 하나에 몸을 맡긴 채 바람을 가르는 듯, 시간을 조롱 하듯, 스스로의 춤에 빠져 즐기면서 천천히 하나의 동작을 오래 유지하는 모습. 그의 얼굴에는 사색 없는 사색이 왔다 갔을 것이고, 수평선처럼 꽉 다문 입술은 침묵의 영역처럼 위리안치 된 감옥 같은 고독이 다녀갔을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궁금한 것은 아무것도 움켜쥐고 싶어 하지 않는 저, 눈 빛. 나는 저, 눈빛이 두렵다. 그가 맘껏 즐기고 있는 저, 진저리나는 고독의 순간들을 그는 어떻게 유희하며 견디며 건너왔는지 문득, 그의 말초적인 감각들에 마음이 쓰였다.



나 아무래도 그대를 떠날 수 없겠네

그런 마음이

먼 산모퉁이 돌아 구불구불 길 구부리며 올라오는 거, 구

부려 늑골 아래로 파고드는 거

고갯마루에 주저앉아 내려다보네



사랑아



산새 한 마리 또 한 마리.

저희들 말로 희롱하며 노는 거 보네

                         -?황조가? 전문



  사랑의 원천은 상실이다. 그의 시에 기초하여 그의 사랑을 추론하여보면 그것은 다만 유희여야 마땅하다.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으므로 아무것도 원치 않는 것. 사랑은 모든 것을 거니까 외로운 것이라고 누구는 핏대를 세우며 노래했었다. 그러나 문인수, 그가 쓴 문장대로 그의 사랑을 따라가면 그것은 적어도 주고받는 관계는 아니어야 옳다. 저 스스로 일어섰다 무너지는 파도 같은 것. 낮달이 밤을 향해 하염없이 걸어가 듯, 그저 하늘의 시간표대로 몸의 길을 따라가는 일상. 배고프면 밥을 먹듯 그에게 있어 허기는 늘 그리움이고, 포만은 곧 이별이어야 하는데. 그렇다면 그는 그리움과 이별이 커브를 틀 때마다 하나의 절창을 탄생시키는 것일까? 예이츠가 모드 곤에게 거절  당할 때 마다 가슴 저 밑바닥을 긁어 태웠던 열정처럼, 그렇게 그의 사랑은 언제나 이별을 전제해야 하는 것인데.

  뭘까, 그의 사랑이 위태롭게만 느껴지는 것은. 아니 저 눈 빛, 꽉 다문 저 입술, 어쩌면 금세 불처럼 분노가 일어 그를 모두 태워버릴 것 같은 불안함. 그러나 걱정하지 마시라, 모든 행위 이전에 그는 반드시 당신을 한참, 오래도록 들여다 볼 것이다.



고양이 한 마리가 멀찌감치 나타났다.

나는 고민중이었으므로 이 사막 같은 마음에

저 무슨 말인가, 통째로 들어오는 고양이. 내 앉은 쪽으로

야금야금

다가오는 고양이. 희고 누런 얼룩무늬가 계속 섞이면서

갈라지면서 저도 뭔가 골똘한 고양이. 앙다문 입이

나사로 꼭꼭 조인 듯 야무진 고양이. 고양이는

날 거들떠보지도 않고 그냥 지나간다.

내게 무슨 터널이라도 뚫려있는 것인지

털끝 하나 건들리지 않고 통과하는 고양이.

고양이가 가로지른 산책로 중간이 한 번 툭, 끊긴다.

널 주시하던 시간이 그렇게 한 번 툭, 끊긴다. 숲의 언덕

너머로 곧장

사라지는 고양이. 제 구멍 메운 것 같다.

                             -?고양이? 전문



  고양이를 모두 사랑으로 바꾸어 읽어보시라. 아니면 모두 당신으로 치환하여도 좋다. 누구에게나 한번 쯤, 혹은 언젠가는 다가오거나 지나가는 설렘 같은 것. 그러나 시인은 온 몸으로 그녀 혹은 고양이를 느끼면서 바람의 촉수를 건드린다. 그러나 전혀 요동하지 않는다. 다만 들여다본다. 집요하게 그리고 지속적으로. 한 자리에 앉아 고양이의 흐름을 예의주시한다. 고양이는 파과기의 아이처럼 그를 거들 떠 보지도 않는다. 그러나 그는 고양이에게서 눈을 떼지 못한다. 그는 이미 에로스의 화살에 반 쯤 가슴이 찔린 것이다. 언제나 그렇듯이 에로스의 화살은 드라마의 갈등구조처럼 복잡하다. 한 사람은 좇고 한 사람은 달아나게 되어있다. 고양이는 그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그를 지나간다. 밤새 다녀간 비문의 문장처럼 그는 금세 온 몸이 텅 비는 공황상태에 놓인다. 그와 고양이 사이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저 그녀를 혹은 고양이를 주시하던 황홀했던 시간이 무연히 흘러간 것이다. 그러나 그가 자리에서 일어난 흔적은 없다. 처음부터 사랑을 붙잡고 싶은 열정은 없다. 그저 무심히 그를 지나 숲의 언덕 너머로 사라지는 순간의 안타까움을 바라본다. 여기까지가 서로의 인연이었음을 담담하게 받아들인다. 그러나 그는 지금 저 스스로 힘을 빼며 힘을 싣는 마음의 고통을 감내한다. 어쨌거나 누군가 그를 다녀갔다. 그러던 그가,



채석강의 장서는 읽지 않아도 되겠다.

긴 해안을 이룬 바위벼랑에

<..........>

바다책, 바다책,

각다귀들의 분분한 흘레질에도

저 일망무제의 필치가 번듯한 배경으로 있다.

이 푸른 내용의 깊이를 잴 수 있겠느냐

미친 듯 몸부림치며 헐뜯으며 울부짖는

사랑아, 옆으로 널어 오래 말리는

채석강엔 강이 없어서 이별 또한 없다.

                  -?바다책, 채석강? 부분



  어느새 이별을 예감한다. 이번에는 누군가 짧지 않은 시간을 지나갔다. 아니, 지나가려한다. 격랑과 고요를 오르내리며 하늘과 바다가 몸 섞는 일. 그 바닥모를 기쁨은 아직도 진행 중이다. 채석강, 아직도 계속 저술되고 있는 그의 장서. 그는 긴 해안을 이룬 바위벼랑을 파도가 쓴 책이라고 말한다. 채석강은 그녀가 자신의 몸에 각인 시켰던 많은 말들이다. 그녀와 함께 했던 시간의 편린들이다. 그는 지금 그것들을 돌아보고 있다. 어느 시간은 서로가 서로를 뜯어먹었던 각다귀들 같았지만 그것 또한 추억으로 남았다. 좋았던 것들과 나빴던 것들, 그 모든 것들이 쌓여서 지금, 채석강은 일망무제의 사랑을 받아 적어 두꺼운 책을 엮었다.

  그러나 열정과 의혹과 미혹이었던 사랑아, 이브의 그림자는 뱀인 것처럼 그녀는 책의 귀가 낡으면 낡을수록 그를 미친 듯 몸부림치며 헐뜯으며 울부짖는다. 밤마다 사라지는 에로스의 정체에 애달았던 푸쉬케처럼, 그녀는 사랑을 의심한다. 이미 푸른 내용의 깊이를 다 담고 있는 바다를 손에 쥐고도 사랑에 확신이 없다.

  인간이면서 신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았던 푸쉬케, 그러나 에로스는 푸쉬케를 떠나야 했다. ‘채석강엔 강이 없어서 이별 또한 없겠다’ 그녀 역시 의혹이 없었다면 이별 또한 없었을 것이다.




민박집 바람벽에 기대앉아 잠 오지 않는다.

밤바다 파도소리가 자꾸 등 떠밀기 때문이다.

무너진 힘으로 이는 파도소리는

넘겨도 넘겨도 다음 페이지가 나오지 않는다.



아 너라는 冊.



깜깜한 갈기의 이 무진장한 그리움.

                      -?바다책, 다시 채석강? 전문



  사랑은 참, 가차 없는 거다. 격렬한 상실 안에서 사랑은 더 강렬하다. 그렇게 에로스는 푸쉬케를 떠났다. 아니 푸쉬케가 에로스를 떠난 거다. 이별은 누구도 알아들을 수 없는 무의미의 시처럼 떠난 자와 남은 자 모두에게 상처다. 그리하여 그는 지금 그녀에 대한 그리움에 잠 못 이룬다. 깜깜했지만 바다만큼 무진장했던 열정. 그녀에 대한 상실에 그는 삶의 의미를 잃었다. 왜 모든 사랑은 떠난 후에야 진실을 알게 되는 것일까? 민박집 바람벽에 기대앉아 그는 여기 홀로다. 끊임없이 이는 파도 소리는 그녀의 환영이다. 그러니까 그녀는 아직도 그를 떠나지 않았다. 아니지, 그는 그녀를 영원히 떠나보내지 못할 것이다. 파도 소리 잠잠해 지면 그는 다시 그녀를 궁금해 한다. 그렇게 무너졌다, 일어서기를 반복하면서 그는 내일의 태양을 의심한다. ‘넘겨도 넘겨도 다음 페이지가 나오지 않는다’. 그의 몸속에 깨알 같이 박힌 ‘아 너라는 冊 ’ 미움도 사랑의 또 다른 이름이었음을 그는 그녀가 떠난 지금 ‘깜깜한 갈기의 이 무진장한 그리움’으로 때늦은 후회를 한다. 이별, 그 쓸쓸한 여운 아니, 힘. 그러나 진정 늦었을까?



지금, 저 환장할 저녁노을 좀 보라고

휴대전화 문자메세지가 떴다. 얼른

현관문을 열고 내다봤다. 지척간에도 시차 때문인지,

없다. 15층짜리

만촌 보성아파트 107동

기역자 건물이 온통 가로막아 본연의 시뻘건 서쪽이 없다.



시뻘겋게 녹슬었을 것이다.

그 죄 사르지 않는 누구 뒷모습이 있겠느냐.

눈물 훔쳐 물든 눈자위, 퉁퉁 부어오른 흉터 같은 것으로 기억하노니

아름다운 여분, 서쪽이 없다.



말하자면 나는 이미 그대 사는 곳의 서쪽

이 집에 이사 온 지도 벌써 십 년 넘었다. 인생은 자꾸

한 전망 묻혀버린 줄 모른다. 몰랐다. 다만

금세 어두워져, 저문 뒤엔 저물지도 않는다. 어여쁜 친구여

무엇이냐, 분노냐 슬픔이냐 그 속 뒤집어

널어놓고 바라볼 만한 서쪽이 없다.

                            -?서쪽이 없다? 전문     



사랑을 잃은 후에푸쉬케는 인간에서 神이 되기로 결심한다. 그 길은 사람이 감당할 수 있는 길은 아니다. 그러나 神이 되는 길만이 그를 다시 만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푸쉬케는 주저 없이 목숨을 사랑과 맞바꾼다. 그러니까 누구나 사랑을 하면 그 사랑이 곧 神이다. 그러나 하나를 얻으면 하나를 잃어야 하는 게임의 법칙처럼 그것들은 반드시 대가를 담보한다.

  시인은 지금 비탄에 젖어있다. 그는 이미 그녀의 서쪽이라고, ‘말하자면 나는 이미 그대 사는 곳의 서쪽’ 이라고, 그녀가 떠난 그 자리에 그는 금세 밤이 다가오고 있음을 슬퍼한다. 그러나 그가 놓친 행간이 있다. 푸쉬케가 에로스를 다시 만나기 위해 몸을 벗었던 것처럼 그녀는 그에게 종종 소식을 전한다. 원혼처럼 그의 주위를 떠돈다. ‘휴대전화 문자 메시지가 떴다’. 그러나 그는 그녀를 잘 알고 있다. 그것은 떠나온 자리에 대한 연민이고 미련이고 어쩌면 유희라는 것을 이 늙은 시인의 촉수는 감지한다. 그녀 가슴 한 쪽에 헐렁하게 남겨둔 여분 같은 것. 그는 그것도 괜찮다는 생각이다. 그러나 왠지 그녀가 떠난 자리가 흉터처럼 부어오른다. 시뻘건 분노나 슬픔이 되어 저물고 있는 것을 느낀다. 에로스는 푸쉬케가 神의 길을 닦는 동안 그녀 쪽으로 몸의 기운을 불어넣었다. 그렇게 그녀가 그에게 돌아올 수 있고 없고는 전적으로 그에게 달렸다. 돌아올 수 있을까?


  어쨌거나 모드 곤은 평생 예이츠의 사랑을 거절했다. 모드 곤이라는 고통이 사라지면 예이츠는 더 이상 시를 쓸 이유를 상실하기 때문이다. 모드 곤의 생각에 기초한다면 결국 시인은 결핍으로 시를 쓴다는 말이 설득력을 얻을 수도 있겠다.

  그는 이제 고요하다. 모든 예술가는 생명을 잃어버리는 것에 동의해야 한다. 그러나 잠을 자는 동안 어둠으로부터 도망칠 수 있듯, 그는 늙음을 고백함으로써 늙음에서 해방된다.



쟁기 대듯 잔뜩 등 구부리게 된다.



이랴, 이랴, 저를 몰게 된다.



가파를수록 잘 보이는 너덜거리는 몸, 헌 몸엔 연어의 길

이 구절양장 나있다. 시절, 시절이여 자꾸 발을 거는, 마음에

결리는 돌부리가 많다. 그 온갖 거짓과 칼을 문 말들이 그렇

구나 온통 그대 상처, 세상의 이 거친 너덜이 되었구나,

이제 혀 내밀어 밭을 갈게 된다.

                             ?산길에서 늙다? 전문




  나는 문인수 시인의 ?쉬?를 읽는 내내 인디언 사냥꾼의 이야기가 생각났다. 사냥꾼이 되려면 자기 삶의 틀을 완전히 깨야한다. 그리고 훌륭한 사냥꾼은 자유롭고 늘 유동적이며 전혀 예측 할 수 없는 경지까지 가야한다. 그렇게 사냥꾼은 자기 자신의 죽음을 예측하기 때문에 순간순간 자신을 다스리고 동시에 버리고, 내맡길 줄 알아야한다. 신비를 향해 가는 삶은 사냥꾼이나 시인이나 같은 존재들이다. 죽음을 빤히 들여다보면서 황홀을 향해 화염 속으로 뛰어드는 불나방 같은 존재. 나는 시인을 그렇게 부른다.

  공기의 미세한 흔들림을 잡아채야 우리 춤이 가능하듯, 그는 어깨에 힘을 빼며 한 동작을 오래 유지한다. 그러므로 그의 시적 상상력은 징그럽게 유려하다, 그러면서도 격과 품위를 충분히 갖추었다. 아니 말을 바꿔보자, 그의 시는 겸손하다. 겸손은 이미 노력으로 성취되는 덕행이 아니라, 인간이 그 안에서 성숙되어지는 체험인 것을, 그는 그런 것을 생것으로 굴렀던 과거에서 오늘까지 몸으로 익혀 이미 알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그의 시다. 신이다. 사랑이다. 그래서 그의 시에는 ‘通入’, 처음부터 끝까지 물고 물리는 형태가 자연스럽게 녹아있다.



  사랑은 그에게 무엇일까? 자연스럽게 숨 한번 다스리는 일? 그는 어쩜 위반을 하는데도 거침이 없을지도 모른다. 그것이 또한 그의 최대 매력일지도 모르겠다. 어쨌거나 좋은 춤의 기본은 움직임이다. 그가 춤을 추는 한 그는 어디에도 오래 머물지는 못할 것이다.

  문인수의 시집 ?쉬?에는 여러 편의 방대한 서사가 들어있다. 과감하고 절실하고 솔직한 그의 시 속에는 외로움, 그리움, 상처, 슬픔, 화해, 죽음, 사랑, 여행, 심지어 똥, 이야기까지. 그는 어떻게 한 권의 시집에 이렇게 많은 이야기를 담아낼 수 있었을까, 나는 다만 누구나 연민하는 사랑이라는 테마를 잡아, 어쩌면 나름대로의 소설을 새로 한 편 각색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독자우선이라는 말이 있다. 여러 편의 단편영화를 보듯, 문인수의 시집 ?쉬?에 등장하는 사람과 사람사이의 관계를 만지면서, 함께 아파하며 질투하며 분노하며 벌써 두 계절을 넘겼다. 그러면서 나는 누구를 향해 춤을 췄더라, 아련하게 스치는 얼굴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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