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년일기老年日記 - 황혼의 사랑
여름 지나고 가을 지나고
계절만의 속력으로 겨울이 오고 있다
무성했던 풀과 잎들이 단풍 들고 마르고 떨어지며 이제는 온 곳으로 다시 돌아가는 모습들이다.
떠나온 곳을 향하여 다시 돌아가는 그 족적들이 어떤 모양으로 남게 될지에
우리는 궁금해한다.
발도 다리도 없는 그 족적은 지나간 후에만 보이는 그리움처럼 우리가 떠난 후에만 보이게 된다.
때로 인생이 사막 같게 느껴질 때 한 자루 삽처럼 열심히 생을 퍼올렸던
그 자국들이 어떤 모습으로 나타날지는 안타깝게도 우리는 모른다.
우이천변 산책길.
오늘도 나는 습관적으로 그 길을 걷다가 맑은 천변川邊에 조용히 내려앉은
백로 한 마리를 본다.
새끼를 받을 때와
죽을 때
일생에 단 두 번 무릎을 꿇는다는 저 백로 한 마리,
백로는 어느 한 곳에 머물 때 짝을 이뤄 앉는 것이 평심일진대 오늘 따라
홀로 외로워 보인다.
여기 우이천은 주변의 많은 사람들이 찾아 걷기 운동을 하거나
외로운 노인들이 다리 밑 그늘 아래 오물오물 모여 무료를 달래는 공간이기도 하다.
오늘 따라 부부가 아닐(?) 것 같은 어느 늙은 남녀가 시린 손을 맞잡고 다정히 걷는 모습이 눈에 밟힌다.
그 모습이 각별히 유정한 것은
나 또한 한낱 외로움을 지고 가는 쓸쓸한 노년이기 때문이리라.
어깨를 맞대고 느릿느릿 걸어가는 두 노인에게서 아름다운 생의 향기가 잔잔히 전해진다.
오래 살아 여러 번 얇아진 저 황혼의 빛깔,
한 번뿐인 생이 마지막으로 타오르는 저 빛깔은 누가 보아도 죄 없이 아름답다.
나는 천천히 그 뒤를 따라 걸으며 두 영혼의 사랑이 만삭 같이
무르익어가기를 빌었다.
한 무리의 비둘기 떼가 난해한 표정을 지으며 날아가고
그들의 뒤를 천천히 따라가며 솔베이지의 노래를 되뇌어본다.
“그 겨울이 지나 또 봄은 가고
그 여름날이 가면 더 세월이 간다
아! 그러나 그대는 내 님일세
내 정성을 다하여 늘 고대하노라”
노르웨이 산간 마을 아름다운 소녀인 솔베이지와 결혼을 약속하고 돈을 벌기 위해 이국으로 건너갔던 페르퀸트는
빈털털이가 되어 늙고 병든 몸으로 고향의 솔베이지를 찾아가게 된다.
페르퀸트는 백발이 될 때까지 연인을 기다리던 솔베이지의 무릎 위에서 조용히 눈을 감았다.
꿈에도 그리던 연인을 품에 안고 노래를 부르는 솔베이지와 바로 페르퀸트의 뒤를 따라간 이들의 사랑 또한
세계인의 가슴을 울린 황혼의 사랑이다.
가을비 지나가자 세월의 속도로 겨울이 오고 있다.
아직도 손을 잡고 다정히 걷고 있는 두 노인의 뒤모습에 많은 말들이 놓여있다.
나는 천천히 그 뒤를 따라가고
걸음은 더욱 느려졌다.
***
이 내용을 모티브로 졸시 한 편을 지은 날이다.
황혼의 사랑/담채
황혼의 두 獨身 남녀가
목이 휜 강변을 다정히 걷고 있다
수 만 개의 외로움을
던지고 던지면서
사랑을 쥐고는 다음 生으로도 갈 수 없다는데
두 손 꼭 잡은
저 두 사람
지금 어느 세상의 문을 두드리고 있나
강물도 바다가 그리우면
쉼 없이 물을 흘려 한 곳으로 닿는데
당신도 강물 한 잔
나도 강물 한 잔
사랑으로 가는 모든 소리는 아프다
석양의 길 위에서 인연을 만나는 일은
얼마나 먼 前生에서
나를 찾아온 운명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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