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文學과 評論

한국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새로운 접근

by 담채淡彩 2011. 5. 24.

한국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새로운 접근




한 태 호





I. 포스트모더니즘의 배경과 성격

1) 서구의 포스트모더니즘 사상 배경

시 사상은 역사의 퇴적층 위에 쌓여간다. 만물과 언어, 존재와 표상, 중심과 주변의 관계에 대한 사유는 중심을 세우려는 시도와 그 중심을 해체하려는 접근이 가능하다. 어느 방향이든지 간에 포스트모더니즘의 지각(地殼) 바로 아래 표층에는 모더니즘이 있고, 그 아래층에는 19C의 낭만주의, 낭만주의 밑에는 계몽주의와 합리주의 층이 존재한다. 계몽주의는 중세시대의 문예부흥과 종교적 회의주의를 최하단층으로 구성된다. 서구 정신과 철학은 합리성과 외부확장성을 바탕으로 하기에 생태적으로 포스트모던 사유를 잉태하게 된다.

1980년대 서구에서 새로운 문학적 유토피아가 시작된다. 60년대의 반전(反戰) 및 반문화 운동과 70년대의 기존 문화 탈피 운동에 의해 기존의 의미 질서가 무한히 해체되고, 새로운 문화 의미와 형식이 실천되기를 욕망한다. 모든 언어 의미와 전통성마저 자유로운 사유와 놀이의 대상이 되어버린다. 계몽주의와 Kant의 이성 비판론의 전통적 사유에 따른 이항대립적인 사유를 벗어나려 한다. 이러한 새로운 역사적 문화 상황에서, 기존 문학텍스트는 탈전통성을 향해 사치스러울 정도로 화려해진다. 이 화려함은 곧 난해성과 비논리성, 파편성 등으로 발전된다. 급변하는 사회적 문화 현상이 문학도 지배하면서, 현실 인생이 곧 문학과 직결된다. 이러한 시대적 변화에 따른 지적 해방과 무한한 자유성, 행복한 성(性)적 쾌락성 추구, 전대미문의 소비성 현상 등이 새로운 인생과 문학의 유토피아를 제공하게 된다.

20세기 초에 러시아 형식주의(Formalism)가 대두되면서, 문학적 의미에 대한 형식의 중요성이 새로 조명된다. 자연히 전통적 의미와 형식의 관계가 변화된다. 형식과 의미에 대한 새로운 인식론에서 외형적이고 가시적인 형식의 변화에 대한 기록과 표현이 중시된다. 여기서부터 구조주의적 가치관이 등장한다. 구조주의란 불가지적인 의미를 가시적으로 드러나게 하는 언어 형식과 구조를 중시하는 작업이다. 언어학 이론과 인류학적 분류도를 바탕으로 한 구조주의는 새로운 정신적 관측법이 된다. 1, 2차 대전과 공산주의의 출범에 따라서, 새로운 세계 질서와 진리의 구조가 도래한다. 마르크스주의와 정치비평, 식민지 이론 등이 새로운 사회비평 도구로 부각된다. 20C 후반의 사회현상 구조를 동시에 조망하려는 문화이론이 접목되고, 문학은 다양화된 사회 문화현상의 일부분으로 위축된다. 정신분석 이론, 문명 문화이론, 소비적 쾌락주의 이론, 이미지 이론, 해체주의 이론, 정치권력이론 등의 다양한 사조가 분할되는 사회현상을 나름대로 통합적으로 조명하려 한다. 전통 철학이나 문학은 다변화된 사회현상을 해석할 수 있는 권위를 상실한다.

이러한 세계적 추세는 대륙적 역사주의와 지성주의(知性主義) 대표주자인 불란서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의 사조로 태어난다. 텔 켈(Tel Quel) 誌를 중심으로 한 지식인들은 당시의 부르조아적 생활양식과 물질화된 사유를 주로 비판하였다. 이들의 분석적 사유와 행동적 참여성은 마르크스주의적 문명비판에서 기호학적 구조주의를 거쳐, 문화 문명 해체론, 지적 쾌락주의, 多媒體主義 등으로 진보한다. 이들의 기본 이론은 인식론적 주체론과 이념적 정치성에 있다. 즉 인식론적으로는 자아가 객관적 진리보다 우선하고, 이념적으로는 억압받는 피지배자, 여성, 다양한 약소 인종, 제3 세계 국민들에 대한 정치론을 강조하였다.

이러한 대륙적 지성주의가 미국의 세속주의로 전이된다. 미국은 세계대전을 통해 신흥 강대국으로서 부상되면서 망명한 유럽 지식인들을 수용하게 되고, 새로운 지적 풍토의 산실이 된다. 미국은 탈산업사회, 소비사회, 매체사회, 다국적 자본주의 사회의 대표자로 군림하면서, 시대적 인식론의 변화를 대표하게 된다. 자연히 미국사회는 이질적, 모순적, 대립적 공존성을 요구하는 복잡한 메카니즘의 사회가 된다. 이들은 다원주의 세계관, 중층적 사회 문화구조, 세속화, 도시주의, 일상주의, 형이상학적 또는 심리학적 천박성, 복잡한 아이러니의 공존성, 희극적/유희적/즉흥적 인생 태도, 불확실성의 원리, 대중주의 예술성, 예술의 상품화, 현실의 허구성, 문화의 혼성적 모방성(pastiche), 탈이념적 양상, 미시적 시점의 강조, 찰라주의, 분열증적 인식의 파편화, 현실의 문학적 재현의 무의미성, 내용에 대한 형식의 우위성, 문명비판적 시 의식 등의 정신구조를 대변한다.   

이러한 변화 양식 중에서 가장 극단적인 현상은 자아 해체성이다. 주체가 해체되면서, 주체를 대신하는 대리적 지배자(이미지, 허상, 명목성 등)가 등장하게 된다. 상실된 자아성을 채우려는 노력이 다양한 모스트모던 현상으로 들어선다. 이러한 현상에서는 진상보다는 가상이 전면화된다. 독자나 작가가 가상공간에 같이 참여하는 순간에 진상과 허상의 구분은 필요 없게 된다. 역설적으로 위상(僞像) 속에서 더욱더 큰 만족을 얻게 된다. 이러한 대리만족이 모든 문화현상에 깊이 침투한다. 실상에 귀찮게 참여하기보다는 거리를 둔 간접적 참여를 선호하게 된다. 이러한 문화현상의 주도자는 이미지 산업, 영화산업, 비디오 산업, 디지털 산업이 되며, 이러한 관찰과 시선의 변화성은 문학을 포함한 모든 문화현상에 깊이 자리잡게 된다.

문학에서는 전통 문학의 삼위일체인 저자, 독자, 작품의 내용 및 의미에도 상당한 변화를 초래한다. 주체 해체된 마당에, 삼위성의 구분이 의미 없어진다. 이들은 동시적으로 상호 공존하는 병치적 존재로 인식된다. 독자가 곧 저자와 비평가가 될 수 있고, 작품은 저자의 것이 아니라 독자의 소유물이 될 수 있다. 비평가는 저자의 작품에서 저자만 찾는 것이 아니라, 저자를 제거한 객관적 또는 상대적 존재를 발견하려고 한다. 객관적 상관물(Objective Correlativity)의 울타리를 벗어난 개방적 형식을 추구한다. 작품은 이제 더 이상 저자의 소유물이 아니라 독자와 사회현상의 욕구에 의해 탄생된다. 이러한 이탈 현상은 초현실주의, 자아고백적 감성주의, 언어중심주의 표현론, 비시적 대상의 시화(詩化), 탈감성적 이성주의, 비언어적 기호주의, 언어외적 매체의 다용화, 등의 현상으로 발전된다.

이러한 상태에서 문학적 진리는 본질적 가치보다는 인간 사회에 대한 유용성으로 평가된다. 이때부터 텍스트는 저자의 권력을 거부하고, 독자 반응을 중시한다. 독자는 지워진 저자의 자아 위에서 자기대로 읽기를 즐긴다. 이런 문화 현상에서는 쾌락이 중시되며, 성적 오르가즘에 버금가는 환상, 오락성이 중시된다. 집중보다는 산재(散在), 중심보다는 변방, 의미보다는 무의미성, 영원보다는 순간, 정통보다는 자유, 목표보다는 과정 등을 중시하게 된다. 여기서부터 독자, 저자, 텍스트의 삼위일체성은 무한을 향해 와해된다. 모든 문학 및 문학외적 양식은 상호 혼재된 완성을 목표로 한다. 이때부터 기표와 기의는 무한하게 분해되면서 새로운 변주와 잡다한 텍스트, 즉 텍스트의 상호성(intertextuality)이 중시된다. 이 때 기표는 고정되어도, 기의는 무한히 쾌락대로 따라 움직인다. 절대 가치는 사라지고 실용적 의미의 감동과 재미만이 필요해진다. 문학은 더 이상 진리의 안내자를 자처하기보다는 단순히 정신적으로 사정(射精)된  언어의 오르가즘에 안주하는 경향들 갖는다.

 근본적으로 포스트모더니즘의 특성은 불특정 다수의 비예측성, 변화성에 존재한다. 무한한 변화성에 스스로 맹종하는 정신적 신도주의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의 싹이 배태된다. 해체라는 편리한 수단에 스스로 위치를 상실하는 얼음배 타는 가련한 실종자 같은 처지가 현대인의 존재성이다.


2) 포스트모던 시 특성

서구 낭만주의는 이성 및 종교 제도, 철학적 합리성보다는 개인의 직관과 특별한 경험과 우연성을 중시한다. 낭만주의자들은 인간의 인지 능력, 개인적 상상력, 초월적 감성 등의 인간능력을 중시한다. 그 기본 인식론은 주체, 객관, 표현수단이 상호작용하는 미학성과 예시적(豫示的) 통찰력 위에서 형성된다. 이들은 자연을 통한 순간적 영적 경험, 상상력을 통한 주객관의 통일성을 강조하게 되는데, 그 인식론이 자연히 자연과 인간을 재구성, 해체시키는 경향을 갖는다. 이러한 자연주의적 신비주의가 낭만주의의 데카당스(decadence)로 구축된다. 20C가 시작되면서, 서구 지성과 문명 몰락의 제반 징후 속에서 낭만주의가 확신하던 자아와 객체의 연속적 재구성력과 인간 창조성에 대한 확신이 회의된다. 낭만주의의 형이상학적 이상론(理想論)과 초월적 자아론이 설득력을 상실하면서, 자연과 통합되는 인간성이 상실되고, 자아와 경험의 파편화가 가속화된다. 신의 경지를 대신하려는 인간 의지와 정신력은 분열되고, 신비주의가 가속화된다. 이러한 연속성 상실, 영웅성 소멸, 시간관 변화, 자연과 인간 인식의 불안정성, 인간역사의 비극성 등의 변화에 의해 새로운 문학 조류가 등장하게 된다. 이것이 상실과 소멸 속에서 그나마 새로운 연속성을 추구하려는 지적 문학성을 가진 모더니즘이 된다.

모더니즘은 낭만주의가 확신하던 긍정적 아이러니를 전복시키면서, 새로운 미학이론과 시학을 추구하게 된다. 모더니즘의 미학은 미결정의 시학, 꼴라쥬와 같은 실험적 표현기법, 이탈성, 추상성, 등을 바탕으로 한다. 인간의 추상적 창조성을 강조하고, 실존주의를 통해 언어를 재발견하고, 파편화된 인간존재 의미를 새로 해석한다. 모더니스트들은 자신들의 미학성, 지적 영웅성, 숭고함을 통해 불확실성의 사회를 재건할 수 있다고 믿었다.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은 이러한 자신감을 상실한 듯하다.) 그들은 사회 현상을 재구성하고 연계성을 찾으려 하는 점에서 아직 낭만주의 성향을 갖는다. 상상력을 통한 통합 시도가 실험적이고 불완전하여도, 그 시도를 멈추지 않는 점이 모더니스트의 특징이었다. 객관적 상관물이나 목적실체론적인 예술활동이 고통스럽고 확연한 결과를 포착하지 못하여도, 인간 실존의 비극성을 초월할 수 있는 수단을 강구하였다. 모더니스트의 시학은 시, 종교, 범신론, 신비주의, 동양적 도(道) 정신, 지성주의 면에서 포스트모더니스트의 전위 역할을 해주었다.

포스트모더니스트는 모더니스트들이 달성한 지도 위에서 역사와 사회의 단절성을 나름대로 극복하려 한다. 그 노력이 모더니스트의 연장선인지 완전 반대인지 확실하지 않아도, 분명히 새로운 양상을 보여준다. 더욱 심해진 종교의 상실, 이성의 몰락, 퇴폐적 사회 현상 속에서 모더니스트의 시성과는 다른 새로운 미학성을 추구한다. 모더니즘의 보편성, 보수성, 지식인주의, 엘리뜨주의, 추상주의, 탈대중주의, 전체주의 성향에 반대되는 음성으로 다원화된 대중과 친근해지려는 다양한 실험을 한다. 그들은 꼴라쥬 기법으로 부분을 통합하려는 모더니스트들의 노력이 패러독스라고 믿는다. 이들은 후기자본주의 사회의 정신성을 반영하며, 소비자 사회의 지배적 가치를 상품화하는 탈가치적인 예술과 문학에 대한 새로운 조명을 원하게 되었다. 그 조명 수단의 하나로서 언어가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 언어는 결국 정치경제사회도덕에서 코드화된 구조를 가지므로, 시인에게 주어지는 대로의 벗겨진 의미를 그대로 표현하려 한다. 시는 더 이상 모더니즘처럼 의미를 창출하는 것이 아니라, 주어진 의미를 수동적으로 드러내는 것이다.

현대언어학에서 강조하듯이, 현대시는 언어의 미결정성과 자의적 기호체계를 바탕으로 언어 구성시킨다. 언어란 자기 지시적이며 스스로 복잡해질 수 있는 인위적 기초체계에 불과하다. 지시어와 지시되는 대상간에 항상 존재하는 간격에 의해, 시 의미와 형식간에는 차이가 존재한다. 시어가 지시하는 의미는 제대로 포착되지 않고 미끄러져만 간다. 상징화된 시어에는 실재가 존재하지 않는다. 이러한 상황에서 언어는 대상을 지시하기보다는 그 대상의 사라짐을 대체하는 것에 불과하다. 즉 언어는 지시나 현존을 신호하는 것이 아니라 부재나 분열을 지시하는 것이 된다. 이미 시는 더 이상 통일된 기호체계를 갖지 못한다. 아무 것도 지시하지 않는 시가 가능해진다. 시 형식이나 의미도 사라지고 단순히 언어의 무정부상태만 존재한다. 이때는 시적 파열과 새로운 표현, 비의도적 비유와 합성수지적인 시어조합만 존재한다. 기호학과 해체성에 의해 시적 기념비는 무너지고, 상호의존성만이 존재한다. 시 의미가 스스로 갇혀서 울림소리만 공허하게 퍼져가는 천장 높은 시어의 감옥이 된다. 이때에 시 세계는 대중적 실용성과 현실성, 참여성만이 중요시되기 쉽다. 시 쓰기는 순간적 창조성, 상황적 행위성, 반응적 글쓰기에 불과해진다. 중심이 없는 개인적 경험과 이상한 성향만이 강하게 전면에 나타난다. 시가 언어의 조작성에 지배당한다. 시적 화자는 단순한 언어적 해프닝이나 이벤트로 존재한다. 시적 고상함이나 의미는 뒷전으로 미루어진다. 이러한 포스트모던 시에서는 언어가 이미 장난성을 갖기에 의미보다는 기괴한 재미를 추구한다.

이러한 언어 장난적인 시 쓰기는 표층의 시학(poetics of surface)이 된다. 단순 어휘 반복성을 이용하여 시작과 끝이 없는 동의어 반복성, 환유적 표현 성향을 보인다. 이는 의도적으로 언어의 심층 의미를 끌어내기 위해 해체하는 고된 작업이 될 수도 있다. 어떤 결과나 발전을 의도하지 않고, 중간과 끝도 없이 단순히 텍스트를 이끌어 가기 위한 시 쓰기가 된다. 이러한 시 표현 현상은 현대 사회의 무의미성과 인생의 반복적 무의미성을 반영하는 듯하다. 인생의 가치를 발견할 수 없기에 사소한 것, 소박한 것, 평범한 것이 보다 의미 있는 시적 표현 대상이 되기 쉽다. 자연히 시어는 고상한 것, 거대한 것보다는 일상적 언어가 선호된다. 낭만주의 시관(詩觀)처럼 대중언어가 기존 시어(decorum)를 대체한다. 가벼운 것, 재미있는 것, 쉬운 것이 시어의 전방에 나선다. 가장 사실적인 것이 가장 환상적인 것으로 인식된다. 실재가 허구처럼 인식되는 상황에서는 객관적 실체나 인간 존재 자체에 회의를 느끼는 시 성향이 표출된다. 신비적 대상이 소멸되면서 일상적 대중문화, 주변적인 것이 역설적으로 중심이 되어버린다.

따라서 포스트모더니즘의 시적 표현의 특징은 탈전통성에 근거한다. 이 시대에는 (일반개념에서) 시 아닌 시가 존재한다. 전통적 시 표현 능력이 부족한 시인들이 시적 욕구를 표현한 시가 많다. 이러한 시의 스타일은 대개 단순 간략 평이하다. 이들은 상징주의와 의식의 흐름 전통을 이용하면서도, 천박한 도시에 바탕을 둔 현대적 이미지를 선호한다. 시형식은 리듬과 투사시의 호흡처럼 일상어로 표현하기를 선호한다. 특이한 효과를 내기 위해 의도적으로 시행을 변형시키기도 한다. 구체시나 실험시로 대중성과 독특한 예술적 끼를 소통한다. 전체적인 표현 기법은 확실히 소비자나 대중 계급의 세계관이나 삶을 대변한다. 이들의 시적 주제는 시각예술의 영향 하에서, 전통타파적인 실험성을 보이고, 특별한 근거가 없고, 형식이 없고, 대중이 원하면 그대로 따르는 성향이 있다.

이러한 포스트모던 시에서는 대체적으로 다음과 같은 특징이 나타난다.

포스트모던 시는 대체적으로 파편적이고 혼자 뇌깔이는 듯하고, 완성미보다는 중간에 멈춘 듯하고, 거대한 예술성이나 주제를 겨냥하기보다는 그냥 보이는 것이나 느끼는 것을 아무렇게 얘기하려는 성향이 있다. 대개 시각적 효과를 중시하고, 계시적 신비성을 표출하고, 여성적 부드러움에 싸이고, 낭만적 멋스러움을 겉으로 드러내고, 자기 고백적 성향이 많고, 그냥 좋은 것을 마음 내키는 대로 써대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경향은 동서를 막론하고 한국 시에서도 발견되는 현상이다.

정신면에서 서구 정신구조의 근본인 이분법과 일반성/객관성을 거부한다. 모든 일에는 예외가 존재하며, 예외적인 것을 더 중시한다. 자연히 쇼킹하고 재미있는 소재/주제면 모두 시로 표현한다. 이런 해체적, 탈중심적 시 성향은 거부와 수용 면에서 명확한 입장을 밝히지 않고 애매모호한 시적 견해를 표명할 때가 많다. 해체란 본래 자기 의견이 없는 표현법이다. 비평가의 공격에 대한 방어 기재는 애매함이 최선이다. 따라서 해석 여지가 많은 미완 상태로 시를 남겨둔다. 시어에는 괴상한 신제 용어가 많이 차용된다. 비유나 표현 방법은 너무 친숙하지도 않고, 너무 낯설게도 하지 않는 중도론, 양비론적인 표현론을 이용한다. 너무 지적/학적 내용을 차용하지 않은 듯이 적당히 은폐하는 표현법이 다용된다. 그러면서도 순수 창조적인 개발보다는 패러디나 모사(模寫) 능력으로 시를 쓴다. 반사적으로 자기 시어에 대한 긍지와 고집이 대단하다. 마치 비전(vision), 꿈, 신비한 경험과 같은 시 내용이 많다. 또는 인터넷 정보 검색에서 얻은 새로운 내용으로 표현하는 듯하다. 이러한 시성은 마치 모든 해석은 거짓이다라는 반실증주의적 입장을 대변하는 듯하다. 좋게 말해서 다양성의 시이지만, 부정적으로 말하면 내용이나 시적 진실을 증명할 수 없고, 증명할 수 없기에 맞는 듯한 시가 많다.

이들의 시성은 모더니즘의 대안 발견 노력이기도 하다. 그 현상이 너무 다양해서 일정하게 정의하기 어렵지만, 나름대로 대안처를 찾고 있다. 그 중의 하나가 동양사상이나 선사상에 대한 표현이다. 신신비주의(Neo-mysticism), 초탈무외(超脫無畏)의 경지에 대한 선망, 뉴에이지 운동, 동방종교에 대한 귀의성, 교차적 문화의 수용도 같은 현상이다. 이러한 경지는 낭만주의에서 항상 추구하던 종교적 열반(涅槃) 경지와 유사하다. 현대사회에서 추구하는 수많은 이즘(주의)도 결국 새로운 낭만주의 성향과 유사하다. 신비화와 탈신비화, 소외/억압된 자와 지배자 상호관계, 인생의 극지점 추구와 회의성, 생의 모순점에 대한 태도 등에서 새로운 낭만주의의 퀘스트(quest) 정신을 발견하게 된다. 수많은 형이상학적 문제에 대한 신플라톤주의적인 관념과 질문이 새로운 율리시즈의 탐험을 출항하게 한다. 이러한 시대성과 의식구조가 신낭만주의자의 로망스 탐사를 연상시킨다. 이러한 시대적 불안감과 새로운 인식력이 현대인간을 로맨스 문학의 파생 형식인 공상과학 영화, 환타지 문학, 탐정소설, 액션 괴담 영화 등에 몰리게 한다. 이러한 문학 양식이나 사조는 우주시대에 어울리는 신낭만주의자의 탐험, 여정의 문학성을 대변한다. 이러한 성향에서 포스트모더니즘 초기 비평가인 맥널티(J. Bard McNulty)는 현대의 아이러니 문학 이후에 다시 중세의 로맨스 문학이 도래하리라고 예견하고 있다. 이러한 로맨스 문학의 후신이 낭만주의인데, 현대의 포스트모더니즘 이후의 문학 양식은 우주시대의 로망스적 기질과 여행성, 불확실성, 미확정성, 운명성 등의 기질을 반복적으로 반영하고 있다.


II. 한국시의 포스트모던 성향에 대한 진단

포스트모더니즘은 본래 미학, 건축, 철학에 바탕을 두고 있는 선별적 정신 사조라고 할 수 있으므로, 시 분야에서 이론적 체계성으로 수용, 창작되고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다만 시 형식의 다양성, 표현 내용의 다원성, 개인적 경험의 전면화, 자기 독백적 서사, 시적 표현의 일탈성 등의 포스트모던적 성향은 분명히 상존한다. 

한국시단의 포스트모던 성향에 대해서는 문예비평적인 시학 비평으로 접근해야 할 것이다. 그러자면 해당 시작품의 구성요소, 작가의 세계관, 창작기법, 미적 가치 등을 비평해야 하나, 여기서는 한국시에 나타난 전반적인 포스트모던 성향과 그 현실태만 파악해본다. 해당 시인과 그 시에 대한 포스트모던 특성과 내용은 차후 비평 칼럼에서 접근하기로 한다.

1) 한국 포스트모던 시 배경과 성격 

일제 문화기를 통해 서구 모더니즘을 수입한 한국의 모더니즘 정착에는 태생적 한계성이 존재한다. 서구적 언어성과 모더니즘의 시적 특성을 어느 정도 접목할 수 있어도, 지적 수난 시대에 민족적 감성 반응이 더욱 중요시되었다. 다만 1930년대의 난해시 운동에서 김기림의 난해시에 대한 시론(?시의 난해성?1935)과 이상(李箱)의 난해시 등에서 모더니즘의 기본 사상이 긍정적으로 수용 피력되고 있다. 해방 후 60년대에 동인지 <현대시>를 중심으로 활동한 시인들의 시에서 인간 내면성에 대한 딜레마를 극복하려는 모더니즘의 내적 심리주의를 공감할 수 있었다. 그후 김수영, 김춘수, 이승훈 등의 실험시적 모더니스트 시에서 높은 모더니즘 시성을 발견할 수 있다.

 그 후 산업화된 1980년대 이후에 마르크스주의 쇠퇴, 문민정부 출범 등의 사회현상과 더불어 탈이념, 광고와 패션이 주도하는 소비문화, 기타 문화 정치 운동에 의해 포스모던 시대의 도래를 감지할 수 있다. 그러나 풍요해진 물질주의에 걸맞는 대중의 정치 문화의식이 미비한 상황에서의 문학은 인문학적 위기를 맞기도 한다. 이에 탈피 수단으로 추구하던 문학의 포스트모던 성향은 대중주의와 인기영합주의로 질시받기도 한다. 일부 문화 분야에서 엘빈 토플러가 제창한 뉴웨이브 현상, 브리꼴라쥬(손재주), 신표현주의, 미니멀리즘(최소한주의) 등이 도입되기도 한다. 미술, 대중예술(팝아트), 음악, 광고, 패션, 건축 분야에서는 어느 정도 포스트모더니즘 성향이 응용되고 있으나, 문학에서는 아직도 모더니즘의 성향이 강하게 잔재하는 듯하다. 한국 시 문단에서는 주로 이념주의시(민중시, 참여시 등)와 모더니즘시가 대종을 이루면서, 최수철, 이인성, 장정일 등에 의해 포스트모던 성향의 시가 시도되기도 한다. 그러나 한국적 시문학 시장(출판시장, 대중의 기호, 시적 동인의 추세 등)의 특성 상, 포스트모던 성향의 시는 존재할 여유가 많지 않다. 

한국 시단에서는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의 사조가 체계적으로 구분 수용되어 정착되기보다는 오히려 혼용된 사조로 존재하는 듯하다. 포스트모더니즘은 세계화 과정에서 문화와 민족 간의 다양성, 문화적 상호성, 국내외 지적 교류가 필수로 요구되는 사조다. 한국시에서 이러한 세계화 적응성이 수월하다고 평가하기는 매우 의문스럽다.1) 자연히 한국시의 포스트모던 성향은 크게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회의주의자와 긍정주의자 두 부류로 정의할 수 있다. 전자는 포스트모더니즘 사조의 시간관, 언어관, 이론 자체를 거부한다. 이들은 이론이란 그 자체가 이미 대상을 통제, 왜곡, 배타시키는 성향이 있으며, 그 근본은 별 다르지 않다고 믿는다. 긍정주의자들은 포스트모더니즘 이론의 완전부정보다는 변혁적 적용을 요구한다. 이러한 운동이 사회운동, 환경운동, 여성운동 등으로 양산된다. 한국에서는 민족적 기질과 시인의 사회적 위치로 보아서, 극단적 부정주의보다는 개량적 중도주의자 성향이 강하다. 따라서 포스트모더니즘 성향도 자연히 모더니즘의 양상과 중복 개선되는 성향이 높다.

현금에는 포스트모던 사회의 문제점을 극복하기 위한 제3문화 운동이나 대안문화가 수용되는 듯하다. 이는 포스트모더니즘이 자리잡기도 전에 그 폐단을 극복하려는 대체 현상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성향은 물질적 현실주의의 여파와 폐단을 극복하기 위한 대안학교, 선사상, 생명사상, 생태학 이론, 동양사고적 자연관 제시 등으로 확산된다. 이러한 사회현상은 문학에도 그대로 도입되어서 선취향시의 재조명, 반문명시로서의 환경시, 신비주의적 문화성 등으로 부각된다.

아직 진정한 서구식 포스트모더니즘의 사회성이나 문화적 경향이 정착되지 않은 상태에서도, 모더니즘 시와는 특성을 달리하는 시가 시대적 변화에 따라 발견된다. 그 특징을 몇 가지로 분류해본다.

우선 산업사회의 제반 특성인 도시적 색채의 문화성과 감수성을 표현하는 시가 많다. 둘째, 현대사회의 세속적 불안과 정신적 공허감을 반영하듯 종교적 성향의 시, 즉 신비주의 성향의 시가 많아졌다. 일례로 불교적 선시 취향 시, 일반 구도 시, 캐톨릭 신비주의 대변 시, 토속적 무속 시나 전통 비학적(秘學的) 내용 시 등의 비전(秘傳)사상 시가 있다. 셋째, 부조리적 회의주의 시 성향이 발견된다. 기형도 시인 같은 도시적 아이러니 세대의 젊은 시인들이 불명확한 시적 방향에서도 현대적 감각을 표현하고 있다. 넷째, 여권 신장과 여성 참여적 사회에서 여성운동적 페미니즘 시가 발견된다. 다만 급진적이고 이론적 여성운동 시보다는 여성적 감수성이 분출되는 초감수성의 시, 독백시 성향의 시가 많다. 다섯째, 탈도시적, 전원주의적, 농촌적 시가 발견된다. 이러한 시는 생태시 범주에 속하나, 환경사상이나 생명사상을 옹호하는 전통적 서정적 감수성, 고향회귀적 서정시 등에서 많이 발견된다. 한국에서는 아직 매체시, 구체시, 전자시, 언어시, 시각시 등의 변형된 작업이 흔치는 않다.

그러면 과연 포스트모던한 시가 실제로 구현되고 있는가? 전통적 재현성(시 창작)과 형식성을 극복하고, 불가능한 시적 탐구를 시도하고, 기호(記號)의 획일성을 거부하고, 시 창작의 실험성을 즐기는 시인이 얼마나 있는가? 역설적이게도, 이러한 기질을 가진 시인은 이미 포스트모더니스트가 아니다. 이러한 시적 열정이나 의지, 시적 창조의 기능과 경지를 성취한 시인은 모더니스트적 선사(禪師) 시인이 되고도 남는다. 지적으로 모더니스트의 거대담론, 즉 생의 의미나 진리를 위한 거대담론을 추구하는 시인이다. 이런 경지의 시인들은 이미 일상적 포스트모더니즘 경지나 대중주의를 벗어나 있다. 내부적으로 포스트모더니즘의 가벼운 성향을 천박주의, 흐드러진 다원주의를 목표 없는 정신적 방황주의, 광고 같은 다언성(多言性)을 열등주의를 극복하려는 세속성이라고 인식하기 쉽다. 이러한 시인들은 료타르(Jean Francis Lyotard)의 메타담론을 발견하지 못하는 고통에서 이미 포스트모더니스트가 아니라 모더니스트의 진지한 고뇌에 빠져있는 것이다. 이러한 진지한 인생 고뇌를 경험하는 시인은 모더니스트적 기질이 강하다. 일례로 앞서가는 시인들이 선(禪) 취향 시로 환원하는 성향은 바로 이러한 기질을 대변한다. 

보드리야르(Jean Baudrillard) 말대로 모든 것은 이미 다 발생했고, 새로운 것은 하나도 없다고 하더라도, 세상에는 항상 새로운 일과 실재적인 삶이 발생하고 있다. 그 근본은 동일하여도 현상적으로 발생하는 것은 항상 다르게 인식된다. 근본에 대한 인간의 감성은 순간마다 색다르게 반응한다. 이러한 변화로운 마음 읽기가 바로 포스트모던한 자연 읽기다. 포스트모던 성향을 단순히 대중매체나 이미지 시대로 인정하고 영화나 사진, 공연예술 등에만 치우칠 수 있다. 그러나 유사 진리나 위상(僞像, simulation), 허상을 통합하는 마음의 본체를 발견할 수 있으면, 포스트모던의 이면에 숨어있는 진상이 드러난다. 그 때에는 모더니즘이나 포스트모더니즘의 구분이 또 다른 허상의 파도 위에서 춤추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데리다(Jacques Derrida)의 해체주의도 결국은 의미와 텍스트에 고정된 의미를 거부하고, 일정한 시스템과 시공간에서 연기(緣起)된 것일 뿐이라고 추론하는 서구적 사유다. 이러한 이치는 언어 기호에 내재되지 않은(즉 항상 변형 가능한) 의미를 구조적으로 항상 새롭게 유추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인식론은 마음의 가능성 때문에 불교적 사유와 비교된다. 최근 한국시에서 선적 취향 시가 증대하는 까닭도 오히려 해체주의적 성향 때문이라면 포스트모던 성향을 반영하는 것이리라. 마음의 중심이 분열되고 배가 흔들릴수록, 뱃속에 무게추로 쌓아두는 돌무더기에 대한 인간 욕망은 항상 커진다. 그 무게중심을 잡는 바위에 대한 탐색 과정이 포스트모던적 모색이라고 한다면, 모더니즘과 더욱 다르지 않다.

푸코(Michel Foucault)가 제시한 포스트모던 사회의 존재요소인 권력과 그 이동성에 대한 역사연구도 결국은 일상적 삶의 편린에 대한 인식과 정체성을 체계화 시켜놓은 것이다. 이는 곧 전통적 역사관과는 다른 인식법을 보여주고, 주목받지 못한 억압된 대상에 대한 새로운 인식법에 불과하다. 여기서 인간의 삶을 바라보는 새로운 인식소(episteme)를 발견할 수 있으면, 인간과 사회질서에 대한 설득력 있는 코드/가설의 속살을 채울 수 있다면, 문학 양식이나 이념/사조의 구분은 더 이상 의미가 없어질 것이다. 매일 매일 바꿔 입는 의상에 불과한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의 구분은 원초적 몸둥아리인 존재소에 밀려날 것이다. 그렇다고 몸의 예찬이 정신의 깊이를 덮어씌우면 밤의 어둠에서 신음하는 침대생활의 허무만 남을 것이지만.


2) 한국시의 포스트모던 성향 : 신낭만주의

이러한 맥락에서 한국 시단에서는 두 가지 기본 조류를 발견하게 된다. 대중적 인기와 일반 독자의 기질과 현 사회적 현상, 패션 및 오락, 문학 이외의 기타 예술활동에 윤색(潤色)되어 가는 포스트모던 성향을 반영하는 그룹과 대중적 소비주의적 포스트모던 성향을 거부하고 역으로 모더니즘적 기질과 대안 정신을 추구하는 그룹이 있다. 이러한 파스텔 그림에서 번지는 색채를 구분하기는 사실 어렵지만, (편리상) 대중문학과 본격문학의 구분으로 접근할 수 있다. 대중문학의 시적 가치나 높낮이, 시인의 정신적 위상, 시적 내용을 평하기 이전에, 그 기질적 성향만은 포스트모던적 사회 추구 방향에 동승하고 있다. 그래서 문학적 가치 있는 대중시를 일단은 포스트모던 성향에 근접한 시라고 분류한다.

다음으로 본격문학에 종사하고 있는 시인들이 있는데, 사실 이들에 대한 분류가 더 어렵다. 모든 시인들은 자신의 지적 영역을 하나의 섬 같은 독립된 영지(領地)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높다. 그들은 타인이 넘어올 수 없는 시 세계에서 호령하는 영주가 되고 싶어한다. 그러나 포스트모더니즘의 이론과 특성으로 조명해야할 숙명적인 용기로 과감해진다면, 그들의 지적 영지도 충분히 사려 깊은 지층(地層)의 단층도로 식별할 수 있다. 본고에서 개별 본격문학 시인에 대해 총체적으로 개념적 분류만 해본다.

우선 모더니즘이나 포스트모더니즘의 시론을 이해하고 창작 활동하는 시인과 그렇지 않은 전통적 시인으로 구분 가능하다. 시론을 바탕으로 시 창작하는 시인들은 주로 대학교단에 종사하는 시인들이나 시론 교육을 받은 시인들이다. 이들의 시풍이나 시 성향에서 두 사조의 대비 색채를 어느 정도 발견할 수 있다. 본고에서 비평하는 대상 시인도 자연히 이러한 시론을 바탕으로 창작하는 시인이 되기 쉽다. 전통적 시인은 포스트모더니즘 이론으로 조명하기도 어려운 실정이다. 그들은 대개 전통적 시학, 즉 서정적 표현기법이나 낭만적 감상성, 고전주의적 추상성, 시조적(時調的) 감성주의에 한정된 경우가 많다. 이들은 포스트모더니즘 성향 연구에서 제외된다. 이들은 전통주의자나 초기 낭만주의자로 분류 가능하기 때문이다. 어찌 보면 이들은 아직 서구적 모더니즘의 사조를 응용하는 모더니스트라고 분류하기도 어렵다. 물론 시적 감각으로 훈습한 경우에 대한 반발은 충분히 가늠할 수 있지만.

둘째, 시론 학습에 의한 새로운 이론의 시화 작업이 가능한 시인 중에서는, 그 실험성이나 새로운 표현성 면에서 분류가 가능해진다. 먼저 20C초의 아방가르드(Avant Garde) 적인 실험성과 20C 후반의 포스트모더니즘적인 실험성으로 구분된다. 전자의 시성에는 시적 표현 목표나 표현 대상의 궁극성이 존재한다. 후자는 그러한 최고성을 획일주의, 전체주의, 억압주의라고 보면서 거부하기에 (좋게 말하면) 다원주의, 다양성, 구체성, 매체주의 등으로 지향하는 목표가 있다. (나쁘게 말하면) 무방향주의, 무정견주의, 회의주의, 찰라주의, 색정광적 몰입성, 땜쟁이나 웹사이트 제조공적인 즉흥성 등의 흔들림이 있다. 전자는 카베르네 소비뇽, 카베르네 프랑, 피노 느와, 그르나쉬, 쉬라, 마르벡, 메르로, 가메, 요히니스 베르거 리스링, 샤블리에 샤르도네, 쇼비뇽 블랑, 세미용 등을 모두 맛보았기에 우아한 바에서 여유있게 와인 잔을 기울이고 있다. 후자는 로제, 셰리, 포트를 구분하고 부르고뉴와 소테른 지방을 다녀오기도 하였지만, 아직 희석식 소주와 텁텁한 토속주를 찾고 있다. 전자는 아주 고즈녁하게 베란다에 앉아서 저녁 노을을 즐기고 있다. 후자는 아직도 만족치 못한 듯이 옹알이를 하며 보도 블록이 뜯겨져 나간 뒷골목을 배회하고 있다. 후자는 전자의 창문 아래서 서성이며 줄리엣의 그림자를 찾는 로미오처럼 초조해한다. 전자의 모더니즘적인 평안과 고즈녁한 만족이 그림자를 찾는 자신의 기다림보다 따뜻해 보이는 마음을 지울 수 없다.

이 두 부류의 실험성에는 엄연한 외적 차이점이 있다. 후자가 보다 연기적(演技的), 행위적, 비언어적, 비정신적, 상업적, 사회참여적, 물질주의적, 찰라적, 멜로디적, 거리적(距離, street, 꺼리), 분위기적이다. 전자는 대상을 적확, 구체, 확연, 정밀하게 포착하려 한다. 후자는 다만 수증기처럼 뽀얗게 떠올리고, 분위기적으로 상황을 창출하고, 나열식으로 관련된 속성을 주욱 연결시킨다. 전자가 간결체, 장중체, 영웅체 표현, 은유적 비유를 선호한다면, 후자는 만연체, 유려체, 소시민체 표현, 나열식 환유적 비유를 선호한다. 그러나 이러한 표면적 차이에도 불구하고 그 실험성을 언어라는 재료에 국한시킨다면, 그 구분은 애매모호해진다. 비언어적 구분은 기질과 성정의 차이, 표현 이전의 속마음 차이, 표현 부호 상의 길고 짧음의 차이일 뿐이다. 언어 상의 표현, 내용, 기법 면에서는 그리 큰 차이가 나타나지 않는다. 이는 곧 사유 및 경험 상의 차이가 없음을 의미한다. 재료적 차이 이외에는 동일선상의 순수 시적 범위에서는 별다른 차이가 없다. 이러한 범위에서 비록 시론으로 준비된 실험시 사이에서도 두 사조의 시성에는 별다른 변화가 숙지되지 않는다. 이 점에서 한국시에서는 아직도 모더니즘적인 시성이 더욱 지배적인 현상으로 나타난다.

다음으로, 시론을 겸비한 시인들끼리 상대 작품에 대한 비평에서 구분의 단초가 발견된다. 이는 시적 표현의 태도, 심정적 자세에 의한 구분이기도 하다. 시적 사유의 크기에 따라서 시인을 구분하면, 시적 틈사위 읽기를 거부하는 시인과 사이 읽어내기를 선호하는 시인이 존재한다. 전자는 전체 크기를 보기 좋아하고 사소한 것들을 총합하는 사유와 표현을 좋아한다. 후자는 전체 모양을 볼 수 없기에 세세한 구석을 비집고 들어가려 하고, 자기 주변의 주어진 환경에서 나타나는 현상을 확대 해석하기를 좋아한다. 전자는 연역적 추론(확실한 보편적 원리를 전제로 하고 그에 따른 특수 원리나 사실을 이끌어낸다)을 선호하고 후자는 귀납적 생각(특수한 사실에서 일반 진리를 끌어낸다)을 좋아한다. 자연히 전자는 후자의 생각이 너무 쫀쫀하고 시적 사유가 방대 웅혼스럽지 못하다고 생각하고, 후자는 전자가 너무 허황성세적이며 진짜로 알고서 떠드는 것인지 의심한다. 전자는 후자가 나무와 모래만 보고 숲과 갯벌을 보지 못한다고 통탄한다. 그러나 후자는 전자가 너무 거대한 정문(正門), 정면 사진, 그리스 로마 신화적 벽화만 보았지, 찌그러지는 후문이나 측면/뒷면 사진, 웅녀 신화 동굴에 직접 가보고 만져보았느냐고 질문한다. 전자는 후자가 너무 불란서, 미국 지향적이지 않느냐고 공세하고, 후자는 전자가 너무 공자적, 장자적, 부처적, 플라톤적, 칸트적이지 않느냐고 반격한다. 전자는 명언과 경귀를 스케일과 추상으로 읽어내려 하는데, 후자는 동일한 언어대상을 조금씩 비뚤게, 마치 자기가 창조한 것처럼 패스튀쉬적 모방으로 그럴 듯하게 새롭게 읽어낸다. 이러한 모방을 전자는 생쥐처럼 좁쌀 훔치는 지적 도난이라고 생각하고, 창조성이 부족한 행위라고 질타한다. 이에 반해 후자는 조금씩 바꿔 읽기는 교회 스테인글래스 벽화 문양을 새롭게 읽어내기 일뿐 모방이 아니라고 반박한다. 사실 세상이 점점 좁아지고 지적 팽창이 확대될수록, 이미 밟고 지나간 시적 발자욱을 다시 읽어낼 수밖에 없는 현상을 나무랄 수 없다. 이것은 이미 흘러가는 추세로 수용해야 할 것이다. 겨울 눈 무늬 하나하나에 빛나는 매혹에 반하지 않은 사람은 포스트모던 시를 쓸 수가 없다. 자연의 신비는 항상 새롭게 다가가는 자에게만 발견된다. 멀리 떨어져 그랜드 캐년의 전체를 보았다고 하여도, 지나가는 여행객에게 신비한 그곳만의 속내음은 결코 드러나지 않는다.

이렇게 한국시에는 모더니즘 성향과 포스트모던 성향 시가 혼재한다. 그들은 상호 차이보다는 상호 교접, 중첩되는 진부분 집합성이 더 강하다. 겉으로 드러내는 형식성, 기호성 면에서는 약간씩 구분을 강요하지만, 시 정신이나 주제와 같은 내면적 요소에서는 양파 같은 동심원 향취가 강하다. 이러한 혼재성, 정신성, 서정적 최고성 추구, 지적 퀘스트 욕망, 감성적 초연물외성, 물아 혼연일체성, 혁명적 사회참여성 등의 측면에서 모더니즘적 포스트모더니즘이나 포스트모더니즘적 모더니즘이라는 용어보다는 신낭만주의(Neorom anticism)라고 규정하고 싶다. 이는 한국의 포스트모던 시가 아직은 낭만주의 전통을 이어받은 모더니즘의 시성을 많이 내포하고 있음을 암시한다.

한국시가 아직 모더니즘에 더 가까운 신낭만주의 성향을 보여주는 이유는 여러 가지다. 첫째, 시 사상이나 시 의미, 시적 논리 및 시적 정의의 표현/탐구과정에서 신낭만주의적 요소가 발견된다. 현대 한국 시 비평과정에서, 서구적 포스트모더니즘 이론에 부합되는 다층적 시론과정과 다양한 표현성, 복합적 문화 요인의 시적 융합 현상, 지적 사유가 우선되는 시를 발견하기보다는 시적 감수성 면에서 설익은 듯이 신 용어나 색다른 시적 무드만을 차용하는 경우가 많다. 대중시의 가벼움과 신세대의 감수성, 편지체의 감성토로적 표현성, 일회용 잡지적인 용도의 시 읽기에 필요한 시 내용, 성공학에 필요한 경귀적 시 어귀, 인터넷 상의 낭송 및 시 사랑 동호회에 상재되는 시풍 등은 대중시라고 경멸되는 포스트모던 시성은 될 수 있다. 그러나 본격 시에서는 대개 현대적 낭만주의의 유전적 시성을 보여준다. 도시적 감수성의 시, 신비주의 성향 시, 부조리적 회의주의 시, 여성주의 시, 전원주의적 (생태) 시에서도 언어적 특성이나 시형, 감성, 분위기만 조금씩 다르지, 시적 기저(基底)에서는 일관된 공통점을 부인할 수 없다. 그것은 서정성, 시의식의 구조성, 주제적 보편성, 등의 유전적 형질의 공통성이다. 특히 명상적 논리에서 중심성과 상향성은 확연한 공통성이 있다. 일례로 선시의 논지가 강한 시에서는 모더니즘적 근본성, 정신적 귀결점 등의 성격이 강하다. 끊임없이 보다 높은 최고성으로 향하는 지적, 감성적 욕망을 강하게 감지할 수 있다. 신비주의나 캐톨릭적인 보편성 추구성이나 신관(神觀)에서 거의 전부 동양적 신의 내재성을 신봉하는 듯하다. 언어 측면에서도 신세대적인 인터넷 용어 사용이나 신조어 창조이외에는 일반 시인들이 사회맥락에 따라 용례 의미를 변화시키려는 시도성이 부족하고, 아직도 언어기호가 외계의 사물을 직접 지시하는 지시적 언어 사용에 국한되고 있다. 시그니휘앙과 시그니휘에의 분리성이 높지 않은 면에서 아직은 모더니즘 성향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이 점에서 한국시에서는 아직도 모던한 전통적 시성, 시형식이 주조를 이루고 있으며, 정신적 정통성을 추구하는 면에서 낭만주의적 기질을 떨쳐버릴 수 없다. 뉴에이지 음악적인 이탈 세계를 추구하는 측면도 결국 낭만주의적 벗어남의 기질을 반영한다.


III. 결론

한국 현대시(contemporary poetry)는 아직 모더니스트 시성(諡聖)의 젖줄에서 멀리 떨어져 있지 않으며, 포스트모더니즘의 착유기를 아직 넘어서지 못하고 있는 듯하다. 이러한 두 사조의 틈 사이에서 변증법적 이유기를 경험하는 면모에서 신낭만주의 전통을 가늠하게 된다. 많은 시인들이 표방하는 한반도의 거대담론인 정치적 색채도 낭만주의적 혁명의 거대담론이 되어 화려한 젖병에서 울려나오고 있다. 이들의 민족 문학적 특성이 통일문제, 참여문학, 민중시적 서사로 낭만주의적 팡파르를 울리고 있다. 이 외에도 신낭만주의의 파생현상이라고 할 수 있는 다양한 형태의 시성이 표현되고 있다. 그러나 한가지 확실한 것은 한국시에서는 아직 언어시적 특성을 순수하게 표방하는 시가 많지 않다. 언어학적 언어시, 메타언어시적 시가 부족한 현상은 아직 포스트모더니즘의 완전 상륙을 의미하지 않는다. 한국시에서는 아직 감성의 표방시, 사물과 표현의 관계에 대한 이론적 표현시, 종교적 이념의 구체시가 더욱 강세적이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언어를 매개로 하는 순수 언어시가 아직 너무 사념시, 형이상학시, 개념시로 치부되는 성향이 있다. 시의 존재성은 언어에 기초한다. 그런데도 언어를 바탕으로 사물을 직관하는 순수예술적 언어시가 아직 입관(入觀)되지 않는 현상은 아직 포스트모더니즘은 개화시기를 기다려야 할 초겨울 동백꽃이다.

한국 현대시가 내용 및 형식면에서 어느 사조를 반영하느냐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외양이 달라도, 그 내면에는 한 시대의 가능성을 확대시키려는 진보주의 성향과 과거회귀적인 보수성을 강조하는 개성적 열정을 각자 표현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한 시대의 문화와 문명을 유지 개선하려거나, 황폐되어 가는 정신 속으로 파고드는 언어성을 고집하는 측면도 있다. 시대와 자아, 사회와 개인의 신비한 존재성을 측량하려는 나름대로 의미화 작업이기도 하다. 오든(W. H. Auden)의 말대로 시가 일을 내지는 못한다(Poetry does not make anything happen). 그러나 시를 읽는 독자의 마음을 통해서 개인과 사회의 변화를 유도할 수 있으며, 심리/도덕/정치/종교적으로 시대적 사건을 발생시킬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할 수 있다. 이러한 가능성과 민족적 기능성 면에서, 한국시는 단순히 서구적으로 노후화된 포스트모던적 사회문명과 문화의 나른한 표현에 머물기를 거부한다. 이러한 한국시의 역할과 그 가능성 면에서 신낭만주의의 미래성을 믿는다.  

한국시에서 포스트모더니즘 성향은 두 조류로 구성된다. 대중적 기호에 주력하는 시 조류와 최고성으로 향하는 선도적 시 조류가 병행 실존한다. 이는 신낭만주의적 이원적 조류로 이해할 수 있다. 포스트모던적 대중문화성에 고유한 한국적 시성이 조화롭게 접목된다면, 가르치는 자로서의 시인의 임무에 충실한 시가 만개할 것이다. 이러한 시는 새로운 시 성향을 획기적으로 개발할 것이다. 그 이유는 포스트모더니즘의 기본 사조를 후기구조주의 사조라고 한다면, 한국시의 정신구조를 구조적으로 정립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 중에서 한국시의 심리적, 언어적, 인지론적 상반관계, 음양관계, 정반합의 관계를 극명하게 표명해주는 불교사상 및 주역 사상 등이 새로운 포스트모던적 시성을 개발할 것이다. 헤겔(Hegel)의 변증법적 사유는 서구에서 융성했으나, 한국의 자생적 정신원리인 음양사상과 크게 상충되지 않는다. 그 사유가 인류 보편적 정신사상인 것처럼, 서구의 포스트모더니즘 사조 또한 우리의 내성에 이미 내재되어 있다. 따라서 서구 발생 사조를 어떻게 수용 변화 각색시키느냐의 문제도 중요하지만, 이미 우리 속에 태생적으로 내재한 우리 것의 포스트모던(탈현대, 미래) 문화성을 조화 융합시키는 작업이 더 시급하다. 단순히 서구 사상으로서 포스트모더니즘을 수입하는 문제로 귀착해서는 안 된다.

포스트모더니즘 사상을 마치 서구에서 시발된 수입사상으로만 인식해서는 안 된다. 단순히 문학 이외의 다른 문화 양식에서 수입된 영향처럼 물질주의에 빠져서도 안 된다. 문학은 포스트모더니즘의 진원지인 기타 예술 분야와는 다른 성격을 갖고 있다. 문학은 그러한 문화현상의 지표를 제시할 수 있는 언어작용이며 정신 각성제이다. 매체문화와 영상문화의 화려한 표현력에 이끌려서 단순히 소비적/광고적 장식음으로서만 시 창작되어서는 안 된다. 한국의 토착적 사상을 포스트모던 사상으로 접목 재생시켜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한국시의 포스트모더니즘은 수입된 사조로서 물질분야와 생활분야에서 더 많이 착생될수록, 조만간 퇴색기를 맞이할 것이다. 아니면 제대로 착생시키지조차 못하고, 새로이 몰아치는 서구 사상의 수입조류에 밀려갈지도 모른다. 해체주의 사유처럼 우리의 정체성과 존재이유에 합당한 형태로 우리의 사상체계나 신앙체계를 순화, 정화시킬 수 있도록 계발해야 한다. 이럴 때, 이러한 사조는 우리 발목을 지나가는 시냇물이 되지 않을 것이다. 서구 각처에서 발흥되는 불교사상의 수입/변용의 물결에 우리가 시적 참여성을 강화할 때, 새로운 포스트모던 사상을 주도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때 한국시의 포스트모더니즘 시성향이 제대로 면모를 갖추게 될 것이다.

그 한 가지 방법은 시대 초월적 상상력 개발을 강조하는 것이다. 독자의 환상과 지성을 움직이는 멋진 상상력은 두 사조의 구분조차 필요 없게 만든다. 멋진 상상력은 표현행위나 매체가 다르더라도, 그 상상력의 깊이와 멋짐에 독자들이 감사하며 감동받는다. 시대가 변하여 러시아 마임극 스노우 쇼의 다양한 공연법을 이해하지 못해 공연 자체가 낯설어도, 그 환상과 상상력의 진선미에 기쁨을 같이 공감할 수 있다. 이것이 시의 포스트모던적 생존법이요 목적지다. 시적 형태와 표현법이 달라도, 시적 정신의 교감에 의한 정신적 감응도를 높일 수 있다. 시는 문자적 문화행위이기에, 기타 영상매체의 친근하고 재미있는 접촉력, 영향력, 친근성을 가질 수 없을 수도 있다. 그러나 시적 영감과 지적 쾌락, 고독의 반려자, 예시적(豫示的) 언어성, 순간적 기억을 돕는 언어구조, 구어체적 전파력, 인생의 본질적 정신을 파내는 정신작업 등의 장점은 미래 문화의 개척자를 자임할 수 있다.  

이러한 특성이 두 사조의 양면성을 아우르는 신낭만주의 혁명성이다. 신낭만주의란 이러한 최고성을 찾아서 정신적 항해를 떠나는 지적 양식(良識)을 대변한다. 로맨스 양식(樣式)의 환상과 지고한 가치를 찾아서 자신을 희생하며 갖은 역경을 헤치고서 순수 미(귀니비어 왕비, 비너스 여신, 등)를 발견하는 로맨스 문학이 신낭만주의의 표상이 된다. 전설과 서사적 로맨스 문학과 비극이 다시 자연의 실재(reality)와 유사성이 높은 희극으로, 다시 실재와의 유사성이 유리되기 시작하는 센티멘털한 희극과 서정적 감수성이 새로 등장하고, 다시 아이러니와 풍자가 한 시대의 서사로 기능하기 시작하는 총체적 문학의 복합적 양식을 신낭만주의라고 칭한다. 이러한 문학 양식은 사회 문화의 순환 고리처럼 순환하는 법이므로, 시대적 흐름에 따라 항상 새로운 양식으로 전환 가능하다.

한국 시단에서는 아직 이러한 신낭만주의적 총체성과 탈범주와 (포스트) 모더니즘을 아우르는 시적 표현이 아직 정착되지 않은 상태이기에 보다 큰 이미지로 신낭만주의 범주에 귀속시켜본다. 이러한 귀속 행위 자체를 거스르는 의식구조가 포스트모더니즘 특성이기에, 이런 정의 자체를 거스리는 지적 욕망의 출현을 은근히 기대해본다. 바로 그러한 욕망의 분출이 강해질 때에, 한국에서도 제대로 된 포스트모던 시 운동이 활성화 될 것이다. 그러기 전에는 모더니즘의 낭만주의 영웅적 탐구성으로 배 젓는 율리시즈의 의지, 로맨스 정신, 환상을 신낭만주의라고 과정화시키는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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