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고난한 여정의 기록/이 윤 정
김혜순의 이번 시집, ?한 잔의 붉은 거울?은 종합선물세트다. 말하자면, 이 시집은 그녀가 천착해온 ‘몸’과 ‘여성’의 연장선상에 있는 동시에 소결이며 이미지와 알레고리의 잔칫상이다. 그 안에서 나/너의 대립은 ‘나는 누구인가’ 라는 존재증명의 철학적 질문을 낳고, 이 질문의 연결고리를 통하여 유영하다보면 숨이 차오른다. 배도 부르다. “너무 많이 차리신 거 아니에요?” 라는, 감사함과 부담스러움을 동시에 담은 인사치레가 절로 나온다.
그러나 여기서는 화려한 반찬들은 잠시 뒤로하고 그녀가 정성스레 뜸들인 ‘밥’에만 주목하려한다. 입맛을 돋우는 것은 반찬이지만 결국 배를 채워주는 것은 밥, 곧 이 시집을 가로지르는 시인의 근원적 인식이다. 그녀의 잔칫상을 살펴보자. 밥만으로도 먹을만한지, 어떤지.
1
이 시집에서 김혜순의 시적 인식은 늘 주체와 타자 사이, 어디쯤을 서성거리고 있다. 이 서성거림은 집요하며 반복적이다.
네 꿈의 한복판
네 온몸의 숨이 밀려왔다가 밀려가는 그곳
그곳의 붉은 파도 자락을 놓지 않을래
내 밖의 네 안, 그곳에서 영원히
돌아오지 못할래
― 「붉은 장미꽃다발」부분
김혜순의 어법은 매력적이다. 집요하고 반복적이라는 특징은 질림과 지루함을 낳지만 적어도 그녀의 시에서 그것은 미지의 장소로 길게 이어진 줄의 끝을 따라가는 일처럼 호기심과 긴장감을 느끼도록 이끈다. 그것은 그녀가 “그곳의 붉은 파도 자락을 놓지 않을래”라고 말하는 것처럼 다분히 호소적이기도 하다. 그녀가 나/너/우리라는 문제를 두고 얼마나 종착점에 다다르기를 소원하는가는 이 시집의 전 시편을 통하여 아프게 드러난다. 그러기에 우리는 ‘길게 이어진 줄의 끝’을 좀처럼 놓지 못한다. 시작했다면, 끝까지 읽을 수밖에 없다. 기꺼이, 고난한 여행의 동반자가 된다. 그만한 흡입력이 있다는 이야기다.
「붉은 장미꽃다발」에서 그녀는 “뜰래”,“할래”,“않을래”,“못할래” 등의 서술어를 통하여 자신의 의지를 드러낸다. 그러나 이 서술어는 강박증에 시달리는 아이처럼 연약하고 고집스럽기 그지없다. “내 밖의 네 안, 그곳에서 영원히/ 돌아오지 못할래”는 곧, ‘네 안에서 영원히 살고 싶다’는 전언이며, ‘네 안에서 영원히 살게 해줘’라는, 막무가내식의 호소다. 그만한 절박함의 다른 표현이다.
혹 당신이 멀리 떠나 있어도 당신 속의 당신은 여기에 또 있습니다 나는 당신 속의 당신을 돌려보내지도, 피하지도 못합니다.
아마 나는 부재자의 인질인가 봅니다
내 속의 내가 단단히 나를 당겨 잡고 있는 동안 나 또한 살아 있을 테지만 심지어 나는 매일 아침 내 속의 나로 만든 치즈를 당신의 식탁 위에 봉헌하고 싶어집니다
―「얼굴」부분
“내 속의 나”는 번제가 되기를 원한다. 김혜순은 “내 속의 나”라는 말로 육체와 정신을 분리한다. 육체가 정신을 놓지 않는 한, 곧 “내 속의 내가 단단히 나를 당겨 잡고 있는 동안”은 ‘살아있음’이 성립되겠지만 화자는 ‘살아있음’에 의미를 두지 않는다. 오히려 “내 속의 나로 만든 치즈”, 곧 ‘정신과 육체, 나를 규정할 수 있는 전부’를 봉헌하고 싶어한다. “부재자의 인질”로 사로잡히기를 원한다. 그러므로 화자가 “당신 속의 당신을 돌려보내지도, 피하지도 못”하는 것은 내부의 요청이다. 타자를 통해 규정되고 싶은 주체의 바람이다.
그러면 이처럼 김혜순이 타자에 집착하는 것은 어떤 이유 때문일까? 이는, 다음과 같은 부분으로부터 추측할 수 있다.
아직도 여기는 너라는 이름의 거울 속인가 보다
(중략)
네 속에는 너밖에 없구나 아무도 없구나 늘 그랬듯이
너는 그렇게도 많은 나를 다 뱉어내었구나
그러나 나는 네 속에서만 나를 본다 온몸을 떠는 나를 내가 본다
― 「한 잔의 붉은 거울」 부분
즉, ‘너’는 이름일 뿐, 실체는 거울이다. 거울은 ‘나’를 비추어주는 기능을 한다. 주체의 거울이 곧 타자이다. 사르트르는?유예?에서, “나는 관통당하고 동시에 불투명했지. 나는 하나의 시선 앞에 존재하고 있었네” 라고 썼다. 사르트르에게 타자는 대자존재로서 주체의 존재근거이다. 이 시에서 화자는 “나는 네 속에서만 나를 본다”고 사르트르처럼 말한다. 또한 자신의 이미지를 첫 타자로 보는 라깡처럼 “너라는 이름의 거울 속인가 보다”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와 같은 노력은 결국 노력일 뿐이다. “네 속에는 너밖에 없구나 아무도 없구나”라는 탄식은 타자를 통한 주체의 정의 역시 쉬운 일이 아님을 나타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결국 타자 속에서만 나를 볼 수 있다. 그것은 “우리들 중 누구도 각자의 몸 속 사과를 따 먹을 수 있는 사람은 없다”(「心臟」)는 한계의 자각으로 이어진다.
이 시집, 이 시점에서 그녀가 택한 탈출구는 ‘우리’, 즉 ‘너’와 ‘나’의 결합이다. 그녀는 「나비」에서, “내 왼쪽 귀와 네 오른쪽 귀로 만든 나비 한 마리”를 날려보낸다. 이 나비는 “환한 날개 가루들로 네 꿈을 채워줄게”라고 속삭인다. ‘나’와 ‘너’가 만나 일체를 이루었기에 그가 전하는 메시지는 꿈이며 희망일 수 있다. 이와 같은 이미지는 「O」에서, “우리가 마주 앉으면/ 우리는 O가 되어요/ 당신은 ( 가 되고/ 나는 ) 가 되어요”처럼이나, “두 개의 입술이 포개지자 너는 무한해진다”(「기상특보」)와 같이 변주된다. 곧 분리된 두 부분이 ‘마주볼 때’ 혹은 ‘포개질 때’ 나는 ‘나’를 버리고(“나는 사라져가고 있어요”「O」), “두근거리는 무한”(「기상 특보」)으로 재탄생한다.
그녀의 이러한 작업이 아프게 느껴지는 이유는 “무한해져서 오히려 사라져간다”(「기상 특보」)에서와 같이 그녀의 시도가 무화되는 지경으로까지 나아가기 때문이다.
바다는 지쳤어요
파도치기 지쳤어요
왔다가 갔다가 그러는 거 이제 그만 하고 싶었어요.
축축한 바람이 온몸을 둘러싸고 놓아주지 않는 거
지구는 둥글어서 내 품도 둥글어서
내일인지 어제인지
똑같은 세월이 왔다 갔다 하는 거
(중략)
모두 모두 지쳤어요
― 「그녀의 음악」 부분
끊임없는 성찰, 반복적인 존재 증명에의 요구에 “지쳤어요”라고 말하는 시인의 품은 ‘둥글어서’ 마침표를 찍지 못한다. 그러나 존재증명의 요구가 반복적으로 드러나는 것은 집요한 추적의 반증이다. 시인은 이를 기꺼이 자신의 몫으로 감당하려한다. ‘그만 하고 싶지만’, 멈추지 않는다. 해답이 제시될 수 없는 문제에 골몰하다보니 전체적인 분위기가 음울하다.
“밖은 뜨겁고, 안은 시리다”(「오래된 냉장고」). 그녀는 내부로도, 외부로도 소통되지 못한다. 그러므로 이 시집은 “희망이 썩어버린”(「움켜쥔 마침표 하나」), “슬픔의 푸른 상자”(「저 붉은 구름」)이다. 그녀에게 구원의 희망은 ‘푸른 상자’안에서 여전히 봉인되어있다.
2
봉인된 상자를 열지 못한 채, 그녀는 2부에서 다시 ‘몸’과 ‘여성’ 혹은 ‘여성의 몸’으로 시선을 돌린다. 여기서는 다양한 군상의 여성들이 드러난다. 그것은 그저 ‘여자’이기도 하고 ‘어머니’ 이기도 하며, ‘벙어리 여자’도 되었다가 ‘투신 자살한 젊은 여자’가 되기도 한다.
여기서 그녀는 알레고리를 채용하여 이러한 여성들의 대척점에 역시 ‘아버지’와 ‘절대자’를 위치시키고 있다.
ⅰ) 이렇게 두꺼운 아버지의 고막을 찢고 그에게 가리.
ⅱ) 파수병이 깰 것이다. 아아 아버지의 군대도 깰 것이다.
ⅲ) 아버지의 북이 둥둥 울릴 때마다 내 안의 병사들도 출정한다.
ⅳ) 아 아버지, 이 북을 찢고 그를 만나리, 그녀가 울면서 온다
― 「낙랑공주」 부분
「낙랑공주」의 서사는 ‘아버지’를 중심으로 위와 같이 전개된다. 화자 ‘그녀’, 곧 ‘낙랑공주’는 ⅰ)에서 ‘아버지의 고막’으로 은유되는 ‘북’을 찢고 ‘그에게 가겠다’는 의지를 표출한다. 그러나 의지로도 아버지를 향한 두려움을 멈출 수는 없다. 그녀는 ⅱ)에서, ‘아버지의 군대’가 깨어날 것을 극도로 두려워한다. 아버지는 ‘파수병’이며 ‘군대’이다. 그리고 결국 ⅲ)에서처럼 ‘아버지의 북’을 통하여 ‘내 안의 병사들도 출정’하게 된다. 군대인 아버지의 명령에 복종한다. 그러나 그녀는 ⅳ)에서 보듯이 ‘이 북을 찢고 그를 만나리’라는 스스로의 의지를 놓지 않는다.
이는 그녀가 계속적으로 골몰한 ‘여성’이라는 주제를 관통하고 있는 서사이다. 모든 법과, 제도와 중심을 거부하겠다는 의지는 작용하되, 의연한 척 하지 않는다. ‘아버지’ 자체를 비틀기보다는 ‘아버지’가 근원인 두려움을 내세운다. 이와 같은 모습은 “아버지가 집에 돌아올 때면/ 밥상 위의 그릇들이 벌벌 떨었어요”(「붉은 이슬 한 방울」)와 같은 부분에서도 드러나는데, 매우 솔직하다. 어쩔 수 없이, “내 안의 병사들도 출정”해야 하는 군대의 일부, 곧 아버지의 일부로서 제도에 편승해야하는 그녀의 솔직한 어려움은 이 단순구조를 넘어서, 여성으로 종착한다.
밤새도록 여자가 칠흑 속에다
그 머리털들로 수를 놓는다
수금의 현을 쥐었다 놓듯이
죽음에 갇힌 여자가
무덤 속에서 머리를 묶었다 풀듯이
풀었다 다시 묶듯이
가슴속 붉은 실타래를 미친 듯 감아올린다
벙어리 여자의 눈에서 불길은 타오르고
여자의 손가락이 바늘처럼 창을 찌른다
― 「거미」부분
‘벙어리 여자’는 머리털로 수를 놓는다. 긴 머리털은 여성성의 상징이다. 여자는 머리털로 수를 놓는 반복적 행위를 하고 있을 뿐, ‘죽음에 갇혀’ 있다. 그리고 무덤 속에서 ‘가슴속 붉은 실타래를 미친 듯 감아’ 올리는데, 이 ‘무덤’은 다른 시, 「붉은 이슬 한 방울」에서 “저 머나먼 공중에 벙어리 방이 하나 떠 있어요/ 온 몸의 구멍을 내 눈물이 다 막아버려서/ 구멍이 하나도 없는 방이 하나 떠 있어요”라고 노래되는 것을 보았을 때, ‘벙어리 방’으로 연결될 수 있겠다. 그러므로 방은 ‘몸’이다. ‘온 몸의 구멍을 내 눈물이 다 막아버려서 구멍이 하나도 없는 방’이다. 다시, ‘무덤’이다.
여성의 몸을 ‘구멍이 없는 방’이나 ‘무덤’으로 인식하는 것은 「갈겨쓴 편지」에서 “그녀는 구멍투성이다”라고 말하는 것과 다르게 보인다. 그러나 「갈겨쓴 편지」에서의 ‘구멍’은 “새끼를 낳아 기르는” 생식의 기능만을 하고 있다. 이 지점에서 여성의 몸은 눈물의 무덤이며 기계적인 생식의 장소로 전락한다.
또 그 목소리가 나에게 이르기를
할머니는 자라서 엄마 되고
엄마는 자라서 네가 되지 하였다
나는 내가 너무 많아 정말, 죽을 지경이다
― 「내 꿈속의 문화 혁명」
김혜순은 이러한 비극적 인식을 대물림한다. ‘나’의 비극은 끝없이 순환한다. ‘할머니’에게서 ‘엄마’로, ‘엄마’에게서 ‘나’로. 그러므로 ‘나’의 비극은 ‘정말, 죽을 지경’일 정도로 되풀이된다. 피라네즈의 계단처럼, 끝이 없다.
그런 점에서 김혜순의 이번 시집은 고통과 인내의 기록이다. “모두 참 위태롭다”(「살아 있다는 것」). 위태로움은 시인에게 있어 균형과 조화로움을 뛰어넘는 미덕이다. 그녀는 위태롭다. 고난한 존재증명에의 요청, 여성으로서의 자기 성찰의 어려움에 해답이 있을 수 없겠기 때문이다. 시인에게 끝나지 않는 질문을 반복적으로 던지는 일은, 권태로움을 동반할 수 있다. 그러나 참지 못하고 섣부른 결론을 내려버리거나, 질문 뒤로 교묘하게 숨어버리거나 하는 나태한 권태론자들의 포즈로부터 김혜순은, 적어도 자유롭다. 고통을 동반한 자유. 설 곳을 찾지 못하는 위태로움. “혼자서 가라앉기만 하는”(「날마다의 장례」), 고독한 김혜순을, “잊지는 말아줘”(「날마다의 장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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