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文學과 評論

두두물물(頭頭物物)과 현상에 대한 시적 탐구

by 담채淡彩 2011. 5. 24.

두두물물(頭頭物物)과 현상에 대한 시적 탐구

- 오규원의 날이미지시 읽기

이 연 승

 

1. 새로운 관념 해체의 방식과 날이미지

 

오규원은 60년대 이후 다양한 시작 방법론의 모색으로 독특한 입지점을 구축해온 우리 시대의 대표적인 중진 시인이다. 언어와 시쓰는 방식에 대한 자의식을 바탕으로 쓰여지는 그의 시들은 모더니즘적인 편향성을 강하게 보이고 있다. 그는 언어와 시쓰기 방식을 통해 자신을 바라보고 자신을 둘러싼 사회 현실과 존재론적 현황을 직시하는데, 세계 속에서 사용되는 의미나 관념을 획일적으로 고정시키고 자기 동일적인 의미만을 재생산하는 것을 항상 경계해 왔다. 초기의 관념 해체의 시와 중기의 문명비판시장르 해체의 시를 거쳐 90년대 이후에는 환유적인 시쓰기로 전환을 가져왔는데, 이는 시적 사유의 주축인 은유적 사고에 대한 회의와 반성을 통해 가능한 것이다. 특히 90년대 이후 오규원은 날이미지라는 독특한 형태의 시를 선보이면서 평단에 강한 반향을 불러 일으켜 왔다.?길, 골목, 호텔, 그리고 강물소리?(1995),?토마토는 붉다 아니 달콤하다?(1999) 에서는 이미 기존의 시적 사유의 틀로는 해명되지 않는 변화의 징후와 방법론이 정착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1995년 발간된 ?길, 골목, 호텔 그리고 강물소리?는 현상에 대한 의미 탐구가 본격화되고 있는 시집으로 오규원 후기시의 중요한 분기점이 된다. 이 시집에서 날이미지의 시적 형식이 새로운 방법론으로 등장하기 때문이다. 오규원이 자신의 시적 사유의 틀이 바뀌었다는 사실을 처음 밝힌 것은 1991년 ?작가세계?(겨울호) 에 발표한 「은유적 체계와 환유적 체계」라는 산문에서이다. 그의 시쓰기가 구상적 인식, 해체적 인식에 이어 이번에는 현상적 인식의 세계로 진입했음을 스스로 밝히는 대목이기도 하다. 그리고 날이미지의 시론을 공식화한 것은 1994년 ?현대문학?(8월호)의 신작 특집과 함께 발표한 「시작노트」이다. 시인은 세계를 현상 그 자체인 날(生) 이미지로 파악하겠다는 새로운 시각과 방법론을 천명한다. 그렇다면 날(生) 이미지란 무엇인지, 이에 대한 시인의 설명을 옮겨본다. 

 

…  실존의 문제를 그 바닥으로부터 다시 생각해보는 사람들은 언어라는, 피할 수 없는, 이 미끈거리는 존재와 부닥친다. 인간이 세계를 의미화하고 조직화하는 존재가 언어이기 때문이다. 아니 한 철학자의 말을 빌린다면 언어가 바로 「존재의 집」이기 때문이다. 이 존재의 집을 구조적으로 지난 날과 다르게 고쳐 인간인 만이 아닌, 세계와 함께 언어를 사는 방법은 없을까? 만약 우리가 명명하는 것이, 즉 정(定)하는 것이 세계를 끊임없이 개념화시키는 것이라면, 명명하는 사고의 근본인 은유적 사고의 축을 버리고, 그리고 그 언어도 이차적으로 두고, 세계를 그 세계의 현상으로 파악하면 어떻게 되는 것일까 - 라는 것이 지금의 나, 나의 세계이다. 현상은 굳어있는 개념도 아니며, 추상적인 관념도 아니다. 그것은 존재의 살아있는 의미망 - 즉 날(生)이미지가 아닌가.1)

 

그의 시가 은유적 언어체계에서 환유적 언어 체계로 변했다는 것은 세계에 대해 명명(命名)하고 해석하는 주체 중심의 사고 속에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음을 명시하는 부분이다. 주체 중심의 사고는 그 밑바닥에 인간이 세계의 중심이고 주인이라는 인본주의적 사유가 깔려 있으며, 그런 의식의 바탕 위에서 세계를 정의하고 해석한다. 그와 같이 정의하는 언어체계의 중심이 바로 은유의 원리이므로 은유적 언어체계의 거부는 인본주의적 세계관에 대한 저항이기도 하다. 날(生) 이미지는 시인의 정의에 따르면 개념화되거나 사변화되기 이전의 의미, 즉 날(生)이미지로서의 현상, 그 현상으로 이루어진 시이다.2) 시인은 현상을 직시하지 못하게 방해하던 기존의 관념을 부수고 보다 투명한 시선으로 현상에 접근하고자 한다. 날이미지 시론의 확립과 그 시론의 구체적인 작품화의 공간이 바로 이 시집인데, 시인은 은유적 언어체계에서 환유적 언어체계로 변모하는 과정을 보여줌으로써 그가 세계에 대해 명명하고 해석하는 주체 중심의 사고관을 벗어나고 있음을 알게 해준다.

 

나는 해변의 모래밭에 지금 있다

바다는 하나이고 모래는 헤아릴 길 없다

모래가 사랑이라면 아니 절망이라면 꿈이라면

모래는 또한 죽음, 공포, 허위, 모순, 자유이고

모래는 또한 반동, 혁명, 폭력, 사기, 공갈이다

 

수사적으로, 비유적으로, 존재적으로,

모래(사물)와 사랑, 절망(관념) …은 

동격이다 우리는 이를

원관념 = 보조관념의 등식으로 표시한다

그래서 모래는 끝없이 다른 그 무엇이다

오, 그래서 모래는 끝없이, 빌어먹을

… (중략) …

역사적으로, 문화적으로, 존재적으로,

모래(사물)는 사랑, 절망 …  에

복무한다 우리는 이것을 인본주의라는

말로 표현한다 오, 빌어먹을 시인들이여

그래서 모래는 대체 관념이다 끝없이

모래가 아닌 다른 그 무엇을 반짝이고

― 「나와 모래」 부분

 

의미론적 유사성에 그 바탕을 두고 있는 은유적 사고는 세계를 명명하고 해석하는 뿌리깊은 전통적 사유방식이지만, 은유의 기본틀인 A=B 라는 도식에서 보이듯 언어는 어떤 관념을 해석하는 대체관념에 불과하다는 점을 이 작품은 선명하게 보여준다. 이 시는 오규원 후기시에 새롭게 부상하는 시적 주체의 모습을 보여주는데, 은유적 유사성의 세계가 아닌, 파편화된 세계 속에서 존재하는 주체의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주체가 해체되어가는 과정을 통해 시인 자신의 언어관을 드러내고 있다.

시인은 언어의 모근(母根)을 이루는 말이 인간의 관념과 떠날 수 없기 때문에 여기서부터 은유적인 왜곡이 일어난다고 본다. 그래서 언어의 대체 관념은 무수히 많은 시니피앙으로 존재하며 사유 체계에서 볼 때 은유적 사고 체계에 의한 세계인식이란 파편화된 것이며 지극히 자의적이고 주관적인 것이라는 믿음이 깔려 있는 것이다.

결국 모래언어이자 대체관념의 다른 이름이 된다. 숱하게 많은 대체관념과 시니피앙을 개념화시킬 수 있는 것이 곧 언어라는 시인의 사유가 이 작품에 구현되어 있다. 허위, 모순, 자유 같은 추상적 개념들이 유사성의 원리에 의해 다른 기호에서 다른 기호로 그 의미가 전이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모래처럼 파편화된 수억 개의 개념이 지구상에 존재하지만 모두 본질적인 의미에 다가가지 못하고 미끄러지고 있다는,  언어 자체에 대한 회의까지 함축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시인은 대체관념이나 재해석, 재구성이 아닌 그 어떤 것을 찾으려 한다. 다시 말해 은유적 사고방식, 은유적 시쓰기에 대한 근본적인 반성과 비판을 내포하는 것이다.

 

 

2. 자의식의 영도화(零度化)와 시선의 전도

 

?길, 골목, 호텔, 그리고 강물소리?(1995)가 문제적이고 흥미로운 것은 날이미지의 방법론과 실제 의미화 양상을 실천하고 있기도 하지만, 시인의 시의식과 세계관이 작품 배열 순서와 장(章) 구성 원리에 따라 나타나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1999년에 발간된 ?토마토는 붉다 아니 달콤하다?는 날이미지의 세계관과 구조적 특성이 정착되고 있는 시집이다. 오규원이 간절하게 바라는 것은 일차적으로 개념화가 만들어낸 의미의 횡포, 다시 말해 모든 관념의 허구 를 벗어나는 일이다. 이 두 권의 시집에 나타나는 날이미지의 시적 인식과 세계관의 문제는 자의식의 영도화와 시선의 전도 현상을 중심으로 그 의미가 회전하고 있다. 시인은 의미의 확장을 새롭게 도모하되, 언어를 통해 미학적인 충돌의 경험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대상의 지각 과정 자체를 새롭게 쇄신하고 있다. 어떤 측면에서 그가 본 풍경과 대상들은 그에게 대상으로 외부에 놓여있다기 보다는 그 자신인 사유의 주체로 자리잡는다. 시선의 상호교환이나 시선이 자기 내부에로 수렴됨으로써 대상과 타자 사이의 경계를 파기하고 고정된 의미를 해석하는 의식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다.

그가 강조하는 개념화되거나 사변화되기 이전의 의미, 즉 날이미지로서의 현상, 그 현상으로 이루어진 시 인 날이미지시에서 개념화와 사변화는 대상에 대한 명명과 해석이라는 은유적 사고의 다른 표현이다. 개념화되기 이전의 의미를 지향하므로 날이미지시는 당연히 환유적 의미가 된다. 시인은 허위와 대립하고 관념적 의미에 대립하는 사실과 현상을 두두물물의 말이라고 한다. 두두물물두두시도 물물전진(頭頭是道 物物全眞)이라는 선가(禪家)의 말에서 따온 것으로 모든 존재 하나 하나가 모두 진리라는 뜻이다. 시인은 구체적인 존재와 존재(頭頭物物)로부터 세계의 본질을 보고 그 본질의 언어(현상적 사실)를 작품으로 구체화하려는 욕망 속에 있는 것이다.

 

오후 두 시 나비가 한 마리

저공으로 날았다 나비가 울타리를

넘기 전에 새가 한 마리

급히 솟아올랐다 하강하고 잠자리가

네 마리 동서를 천천히

가로질러 갔다 동쪽의 자작나무와 서쪽의

아카시아나무 사이의 이 칠십 평의       

우주는 잠시 잔디만 부풀었다

다시 남동쪽 잔디 위로 메뚜기

한 마리가 펄쩍 뛰고

햇빛은 전방위로 쏟아졌다 그리고 적막이

찾아왔다가 토끼풀 위로 기는

개미 한 마리와 함께 사라졌다

잠자리 두 마리가 교미하며 날았다

― 「뜰의 호흡」에서

 

필터가 노란 던힐을 물고 김병익이 머리를 하늘에 기대고 있다

2 - A 출석부를 들고 어제까지는 305였던 강의실로 최창학이 간다

무슨 일인지 바지를 입고 두 다리로 김혜순이 걷고 있다

정장을 하고 이창기가 윤희상과 함께 별관으로 간다

남산 가는 길로 남진우가 출강을 하고 있다

김현이 서 있던 자리에 이번에는 코스모스가 서 있다

이원이 문구점 앞에 서 있더니 어느새 층계 위에 서 있다

길에서 이광호가 새삼 다리를 내려다보고 있다

박기동이 사람과 어울려 남산의 밑으로 가고 있다

(강의 물이 보이는 여의도에 김옥영이 있다)

문창과 93학번 1학년 학생을 강의실에 두고 박혜경이 간다

― 「우주 1」전문

  

현상에 대한 시적 탐구는 현대 사회의 병리 현상과 모순을 그 나름대로 인식하기 위한 노력과 우리 시의 흐름이 타성적이고 관념적인 접근으로 이루어진다는 자각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언어와 시쓰기에 대한 자의식의 첨예한 노출을 넘어 날이미지시에서는 주체의 탈관념화 의지로 인해 자의식이 영도화(零度化)되는 단계에 진입하고 있다. 이것은 주체와 타자 사이의 상호 충돌과 긴장이라기보다는 관념의 탈각으로 인해 메시지로 환원되지 않는 순간의 의미를 텍스트화하고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순간의 응집으로서의 자의식이 영도화되는 지점은 주체의 불안정성이나 긴장 보다는 대상에 대한 묘사를 바탕으로 하면서 현실에 대한 이념과 가치가 추방되고 중성화되는, 오규원의 탈관념 의지가 집약되는 부분이라고 하겠다. 이 자의식이 영도화되는 지점은 탈관념화 의지로 인한 미학적 자율성을 강조하되, 의미와 권력에 대한 부정과 반항의 태도를 함축하고 있다는 점에서 재독을 요한다.

이 두 편의 시는 각각 자연 공간과 도심의 공간을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치밀한 언어적 묘사와 관념의 제거라는 공분모로 인해 언술 방식상 공통점을 보이고 있다. 「뜰의 호흡」에서는 식물과 곤충의 미세한 움직임이 환유적 인접의 원리인 묘사에 의해 형상화되면서 공간적 전개에 따라 시적 풍경이 구성되고 있다. 첫번째 시는 뜰의 적요한 풍경을 묘사하고 있다. 아카시아 나무 사이의 칠십 평의 우주라는 공간을 중심으로 나비, 새, 잠자리, 메뚜기 등의 대상으로 순차적으로 시선이 이동한다. 나비가 저공으로 날고 있는 허공에서부터 메뚜기, 개미 등 순차적으로 하향적인 시선 이동을 하고 있지만, 시인은 자연물의 생명력이 절정 상태에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평범한 자연 풍경을  묘사한 시임에도 긴장감을 가지고 있는 이유는 바로 이런 표현과 대상에 대한 미적 거리 때문이다. 이렇게 시인은 낯익은 풍경을 낯설게 포착함으로써 긴장감 있는 날이미지에 접근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평범한 대상에 대한 묘사로만 그치는 것은 아니다. 이 정밀한 묘사력과 함께 독자의 시선을 요하는 것은 시선의 전도 현상일 것이다. 시선의 특징은 시적 주체에 의해 이동하는 것이 아니라 텍스트 속에 등장하는 사물들 각각의 자발적 흐름이나 형태에 따라 이동한다. 주체의 시선은 작품 표면에 등장하지 않는다. 다만 사물들 각각의 시선이 있을 뿐이다. 사물을 대하는 인간의 감각은 일반적으로 시선의 출발점으로서 인간 자신에게서 출발하는 것이 관례이다. 그래서 모든 서술은 인간적 관점에서 이루어진다. 그러나 날이미지시에는 인간이 인간의 관점에 따라 만들어 놓은 인간중심의 시선, 즉 원근법을 폐기하고 인간 중심의 사물 묘사보다는 사물이 주체가 되는 묘사가 등장하고 있다.

두 번째 시에는 12명의 주변 인물이 등장하여 일상적인 공간을 우주로 변모시킨다. 역시 환유적인 인접성의 원리에 따라 각각의 인물들이 놓여 있지만 인물들의 행위나 분위기가 하나의 일관된 정황과 사건을 따라가는 것은 아니다. 극단적으로 관념성이 제거된 사물적인 언어는 세계를 아예 탈각시키고 언어 자체가 만들어가는 세계를 드러내는 방식으로 작용한다. 필연적인 내적 인과관계가 아니라 12명의 인물들이 각각의 정황 속에 순차적으로 나열되어 있는 언어에 의한 소묘가 방법론으로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직접 연결되지 않는 인물들의 풍경은 환유적 성좌를 이룬다. 더 정확하게는 엄밀한 카메라적 시선을 통해 지극히 일상적이고 소소한 주변 정황의 사적인 우주를 드러낸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사물이 주체가 되는 묘사는 다음의 시에 더 강하게 부각된다.

 

쥐똥나무 울타리 밑

키 작은 양지꽃 한 포기 옆에 돌멩이 하나

키 작은 양지꽃 한 포기 옆에 돌멩이 하나 그림자

키 작은 양지꽃 한 포기 그림자 옆에 빈자리 하나

키 작은 양지꽃 한 포기 옆에 빈자리 지나

키 작은 양지꽃 한 포기 옆에 새가 밟는 새의 길 하나

키 작은 양지꽃 한 포기 옆에 바스락거리는 은박지 하나

― 「양지꽃과 은박지」전문

 

이 작품은 키 작은 양지꽃 한 포기 옆에 있는 작은 사물과 정황을 묘사하고 있는 시다. 키 작은 양지꽃 한 포기라는 작고 여린 식물 하나에 모든 정황과 시각이 철저하게 집중되어 있다. 양지꽃 옆에 돌멩이 하나가 있고, 돌멩이의 그림자가 있고, 그림자 옆의 빈자리가 있는 이 좁은 공간은 작은 사물들이 모여 응집된 단위를 이룸과 동시에 사물이 살아 움직이는, 활성화된 느낌을 부여한다. 시적 주체의 시선과 정서는 개입되어 있지 않지만 사물들 각각의 상태와 움직임이 있다. 다시 말해 사물들을 바라보는 인식 주체가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사물 스스로가 자신을 드러내는 방식으로 되어 있는 것이다. 이렇게 날이미지는 사물들로 꽉 차 있는 자율적인 서정성을 보여준다. 즉 텍스트에 가득찬 사물들이 시각과 조합의 어떤 새로운 방식으로 활성화되고 있으며 환유적 묘사라는 새로운 양식 수단이 세계를 바라보는 주체의 시적 사유방식과도 연결되는 것이다.

 

토마토가 있다

세 개

붉고 둥글다

아니 달콤하다

그 옆에 나이프

아니 

달빛

 

토마토와 

나이프가 있는

 

접시는 편편하다

접시는 평평하다

― 「토마토와 나이프 -정물 b」 전문

 

밤새 눈이 온 뒤 어제는 지워지고 쌓인 흰 눈만 남은 날입니다

쌓인 눈을 위에 얹고 物物이 허공의 깊이를

물물의 높이로 바꾸고

나뭇가지에서는 쌓인 눈이 눈으로 아직까지 그곳에 있는 날입니다

뒤뜰에 붙은 언덕의 덤불 밑에는 오목눈이와 멧새와 지빠귀와

그리고 콩새가 서로 다른 방향으로 먹이를 찾고

새들이 먹이를 삼킬 때마다

        덤불 밖의 하늘이 꼬리 쪽으로 자주 기우는 날입니다

― 「물물과 높이」부분

  

사물의 배경 없이 사물의 극단적인 묘사만으로 이루어진 「토마토와 나이프」는 사물의 물질성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사물의 실체적인 감각으로 이루어진 시라는 인상을 불러 일으킨다. 토마토, 나이프, 접시등의 사물은 텍스트 내부에서 처리된 현재 시제로 인해 그 자체의 개별성과 구체성이 살아나고 있다. 이 작품에서도 색채와 형태를 부여받는 주체는 시적 주체가 아니라 사물 자신이다. 이런 의미에서 날이미지들은 관습적인 해석에 사로잡혀 있던 기존의 사물과 언어에 존재의 활성을 부여하고 자율성을 강화시킨다.

두 번째 시는 눈 온 뒤의 풍경을 소박한 사생 묘사로 형상화시키고 있는 작품이지만, 풍경 속에 놓여있는 사물들의 움직임을 바라보는 주체의 시선은 대상에 대한 정밀한 묘사를 수반하는 해부학적 시선이라기보다는 자연물에 대한 순화된 시선으로 처리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두 작품에서도 주체의 자의식이나 정서는 느껴지지 않는다. 시적 주체는 텍스트의 개입을 최대한 억제하고 날이미지의 자율성을 복원하는데 주력하고 있는 것이다. 주체인 를 탈각시킴으로 인해 더 풍성하고 자유로운 세계의 풍경을 열어보이고 있지만 개별적인 사물이 시선의 전도, 주체의 부재로 인해 관념이 없는 전혀 다른 차원의 세계에서 존재할 수 있음을 시사한다. 이것은 곧 인간의 지각방식에 대한 수정과도 연관이 되는 바, 타자(사물)의 개입을 통해 세계에 대한 자율성을 부여하는 날이미지는 주체의 시선이 세계를 억압할 수 있음을 역설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3. 현상의 현재화와 해방의 미적 실천

 

오규원의 날이미지는 정밀한 묘사를 통해 시선을 탈각시키는 방법을 취하고 있지만, 사실은 카메라적인 정밀한 시선으로 대상과 사물을 꿰뚫어보는 양상으로 나타난다. 텍스트에 은폐된 그러나 존재하는 주체의 시선은 사물과 대상들에 자신의 시선을 집중하고 관념을 탈각시키면서 경험적 현실의 개입을 차단하려는 주체의 태도를 보여준다. 여기에는 시선의 권력에 대한 미적 저항이라는 문제가 개입된다. 이러한 묘사의 방법은 시간적 선조성을 배제한 병렬과 병치를 통해 경험적 현실의 파편을 차단하는 방법이다. 이런 점에서 날이미지의 관념 해체와 주체의 부재는 수사학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라 주체의 세계 인식의 태도를 표출하는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날이미지에서 사물의 자생력, 자율성을 복원시키는데는 시간의 생성과 조율이라는 새로운 문제가 개입하게 되는데, 이것은 관념과 경험적 현실, 시간의 폭력성에 대한 방어의식과도 연관된다.

 

7월 31일이 가고 다음날인

7월 32일이 왔다

7월 32일이 와서는 가지 않고

족두리꽃이 피고

그 다음날인 33일이 오고

와서는 가지 않고

두릅나무에 꽃이 피고

34일, 35일이 이어서 왔지만

사람의 집에는

머물 곳이 없었다

나는 7월 32일을 자귀나무 속에 묻었다

그 다음날과 다음날을 등나무 밑에

배롱나무 꽃 속에

남천에 

쪽박새 울음 속에 묻었다

― 「물물과 나」 전문

 

시인은 수량화되고 인위적인 인간의 시간이 아니라 물물의 시간에 초점을 맞춘다. 이전의 시에서는 현대 문명의 폭력성이나 날이미지의 현상방법에 대한 관심으로 시간을 파악했다면 이제는 직선적인 시간을 거부하면서 순환적 시간을 구체화시키고 있다. 순환적 시간을 거부하고 있다는 것은 7월 31일이 가고 다음 날인 7월 32일이 왔다는 구절에서 이미 알 수 있다. 시간의 단위를 정한 달력과 시계는 인간의 삶을 인위적으로 맞추고 조절하려는 대상이다. 인간의 달력에는 7월 32일이라는 날짜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이 작품은 존재하지 않는 시간대인 7월 32일이 왔다는 진술에서 시작하고 있다. 사람의 집 에 있는 달력을 거부하고 정상적인 시간대를 파기하는 것은 주체인 가 인위적인 문명에 물들지 않은 순수한 시간, 원형적 시간을 회복하고 그 시간대에서 존재하고 싶다는 역설적인 욕망을 드러낸다. 그래서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는 7월 32일에는 족두리꽃이 피고, 33일에는 두릅나무에 꽃이 핀다. 그 날짜는 계속해서 34일, 35일로 이어진다. 그러니 순차적 시간대에서 벗어난 그 날짜들이 사람의 집에는 머물 곳이 없 음은 당연한 일이다. 오규원은 시간의 순차성을 거부하고 사물들의 자율적인 움직임으로 복원된 순환론적 시간을 갈망한다. 다시 말해 시간의 폭력성에 저항하기 위해 훼손되지 않은 사물들의 시간을 갈망한다. 이때 지속적으로 나오는 동사나 형용사의 현재 시제는 공간의 시간화를 강화, 강조하는 경계의 시간으로서의 역할을 한다.

 

한 아이가 공기의 속을 파며 걷고 있다

 

한 아이가 공기의 속을 열며 걷고 있다

 

한 아이가 공기의 속에서 두 눈을 번쩍 뜨고 있다

 

한 아이가 공기의 속에서 우뚝 멈추어 서고 있다

 

한 아이가 공기의 속에서 문득 돌아서고 있다

― 「오후와 아이들」전문

 

이 시 역시 한 아이가 있다는 단일한 정황이 시간의 축을 이루며 전개되는데, 있다 라는 현재형 형용사의 쓰임으로 아이가 처해 있는 정황의 순간성이 잘 포착되고 있다. 날이미지시에서의 있다 라는 존재사는 현재를 나타내기 위해 쓰여진다. 현재라는 시간은 언제나 찰나의 연속성이며 매순간 과거와 미래로 바꾸어 나아간다. 그래서 살아있는 존재의 의미망을 포착해내는 살아있는 언어는 늘 현재라는 시간 속에 있다. 그런 의미에서 날이미지는 끊임없이 현재를 날 것의 언어로 포획하려는 작업의 일환이다. 이 시에서도 역시 주체의 입김이나 시선은 느껴지지 않는다. 이러한 현재 시제의 강조는 사물 자체의 자율성을 강조하여 고정된 해석을 거부하려는 시인의 의도적 장치라 할 수 있다.

 

지금까지 살펴보았듯이 날이미지시들은 인간이 사물과 세계를 선택하고 해석하는 기존의 시와는 달리, 각각의 개별적인 사물들이 중심이 되고 있다. 이 날이미지로 포섭되는 사물과 자연은 인위적인 해석을 거부한 채 있는 그대로의 사물로만, 현상으로만 존재한다. 시간을 시의 공간 속에 옮겨놓는 현상의 현재화 라는 수사법상의 특징은 세계 속에 살아있는 활물의 이미지를 구축하여, 공간의 시간화라는 구조적 특성이 공간 전체를 살아있는 현상으로 만든다. 사물 자체만이 자유롭게 숨쉬는 공간에는 고정된 시간, 문명의 시간을 해체하고 이로부터 이탈하려는 주체의 미학적 지향을 보여준다.

이러한 미학적 지향성은 고정된 시니피에를 추방하고 무의식적인 억압에 함몰되어 있는 언어를 복원시켜 탈자아의 욕망을 드러내며 사회의 고정적인 제도나 이데올로기로부터 억압을 해방시키고 그 자율성을 복원하고자 하는 글쓰기인 것이다. 날이미지는 새로운 것과 낡은 것, 주관과 객관, 문명과 인공 등 흑백 논리가 지배하는 사회에서 그것을 파기하려는 적극적인 전략으로서의 의미를 가진다. 주체의 관념이나 시선을 철저하게 배제한 채 중성적인 언어를 구사하며 모든 종류의 억압을 거부하고 관념의 틀 밖에 위치하는 것, 이것이 오규원의 날이미지가 지향하는 시적 이상이 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관념을 해체하고 기존의 인식을 전복시키는데 주력했던 시인은 이제 관념의 옷을 벗긴 맨 얼굴의 사물과 현상을 탐구하고 있다. 관념을 배제한 투명한 이미지로 현상을 읽어나가는 그의 작업은 90년대 이후 현재까지 지속적으로 이어지고 있다. 이런 작업은 곧 현상에 대한 탐구와 시쓰기를 통해 후기 산업 사회의 맹점을 지적하고 탈인간중심적인 시선으로 세계와 사물을 바라볼 것을 유도하고 있는 것으로 풀이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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