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글623 인연에 대하여 인연에 대하여/담채 무엇을 사랑한다는 것도 사실 끔찍하게 서로 다르다 한마디로 인연이란 만나는 일이다 나로부터 떨어져 있던 먼 시간에서 내게로 와 한 지점으로 수축된 우주다 엉성한 거미줄처럼 끊어질 인연들 우연이든 필연이든 나는 그 무슨 緣에도 속하지 않는 날들이 많았다 몇 십 억년의 자연史와 천 년 너머의 역사를 꿰면서도 우리는 예정된 인연을 준비하지 못한다 흔들리는 봄/담채 기다리던 사람이 다녀갔다 먼 길 안개를 밟고 온 사람 한 사람을 찾아가는 길은 얼마나 먼 기도인가 맑은 정신으로 그를 보았다 깊고 푸른 바다를 안고 갔을까 울울한 솔숲 고요를 안고 갔을까 황사바람 등지고 그가 간 후 긴 형벌의 시간이 오지 않기를 2024. 2. 18. 2024.02.18 2024.02.18 한가할수록 타락을 꿈꾸는 마음 몸 안에 갇힌 발광하는 짐승을 다스리기 위해 나는 오늘도 개천변에 나가 걷는 일에 몰두했다. 두 시간 가량 걷기를 끝내고 집에 들어서니 반갑잖은 겨울비가 내린다. 어제는 아들네 가족이 다녀갔다. 긴 구정연휴가 시작되던 날 아들은 갑작스런 혈변으로 고대구로병원 응급실에 입원을 했다. 구정날 집에 오지 못했다. 그런 아들이 아무 이상 없이 퇴원하여 집에 왔으니 반가움이 두 배다. 이번 일로 아들과 며느리가 건강에 대한 관심도가 높아진 것 같아서 무엇보다 다행한 일이다. 사는 일이란 바람의 회오리가 전신을 파고 드는 모래 언덕을 넘고 또 넘는 일과 같아서 유목의 시간을 지나는 것과 같아서 오래 멈춰 서서 생각 깊게 세상을 바라볼 줄 아는 자식이 되었으면 좋겠다.. 2024. 2. 18. 자존심 자존심/담채 왕년의 나보다 더 낮아진 자리로 내려갈 수 있다는 것에 대하여 이게 자존심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점점 낮아지는 지금의 내 자리를 지키는 일이 자존심이라는 생각, 이 마지막 영토에는 부끄러움이 머물러도 좋다 2024. 2. 17. 청년의 눈물 청년의 눈물/담채 해마다 수조 원의 國稅를 구체적으로 작살내는 xx공기업 2년 전 행정학을 전공한 청년이 비정규직으로 입사 함께 일을 했다 게으른 직원 몇 몫의 일을 해내며 그가 최선을 다 한 2년, 그는 2년 이상 고용이 불가한 "비정규직 보호법"에 따라 재고용이 불가해졌다 청년의 어머니는 날마다 새벽기도에 나가 고용이 승계되기를 빌고 있었음에도 청년은 결국 울면서 직장을 떠났다 나는 자식 같은 청년을 데리고 술을 마셨다 고용안정을 약속한 정치권은 이 법을 도마 위에 올려놓고 여야가 몇 년째 기싸움만 하고 있다 그가 떠나고 행정학을 전공한 또 한 명의 청년이 그 자리를 메웠다 청년은 열심히 근무했고 다시 계약기간이 끝나가고 있다 며칠 후면 으서지도록 껴안고 싶었을 직장을 말없이 떠나게 될 것이다 청년은.. 2024. 2. 16. 이해한다는 말 이해한다는 말/담채 이해한다는 말 함부로 쓰지 말자 앞이 안 보이는 사람을 말이 안 들리는 사람을 쉽게 이해할 수 있는가 너를 이해한다는 말은 나도 네가 되어보았다는 것이다 길 위에서 68 / 담채 사람은 저마다 다니는 길이 있다 내가 다니는 길을 좌우한 취약한 내 습성 삶은 의혹투성이였다 세월도 그랬다 내 존재 밖의 큰 질서를 축소한 내 안의 운행, 그 길 위에서 우연을 가장하고 스며들던 운명의 간섭 혹은 섭리의 작용, 나는 언제나 그 標指를 알아낼 수 없다 시간이 꿈인 것을 알고 나서 말과 글을 찾아 나섰다 그러나 이 일도 바람 같아서 언제나 바람인 채로 나는 절망한다 오늘도 나는 믿을 것이 없어서 뜬구름 같은 문장에 나를 기댄다 2024. 2. 15. 2024.02.09 - 아들 입원 소식 2024.02.09 - 아들 입원 소식 구정을 하루 앞둔 2024.02.09. 오후 아들에게서 구로고대병원 응급실에 입원했다는 소식이 있었다. 직장에서 근무 중 갑자기 혈변을 보았다고 했다. 그 양이 적지 않았다고 하니 겁이 났을 것이다. 내일이 구정이라 차례준비로 바쁜 와중에 갑자기 아들 입원 소식을 접하니 명절은 뒷전이고 걱정이 태산이다. 당장 내시경을 봐야하는데 연휴가 4일간이라 대학병원인데도 불구하고 내시경을 보는 의사가 한 명도 없단다. 별 도리 없이 긴 연휴기간 동안 금식하며 반복되는 혈액검사와 수액만을 맞으며 며칠을 기다려야 하는 상황이라 답답하고 초조했다. 의사를 만날 수 있는 연휴가 끝나려면 아직도 4일을 더 넘겨야 한다. 긴 악몽이 시작되었다. 모쪼록 별일 없이 지나가기만을 간절히 바라.. 2024. 2. 10. 따질 수 없는 것들 따질 수 없는 것들/담채 어린 시절 여자 짝꿍 주려고 풀꽃 모가지 댕강댕강 잘랐듯이 젊은 엄마가 과수원 품팔이 갔다가 새끼 먹이려고 사과 몇 알 치마폭에 숨겼듯이 긴 노역으로 허리 꺾인 家長이 집으로 돌아가다 길바닥에 떨어진 지폐 한 장을 슬쩍 챙겼듯이 세상에는 묻지 못할 죄들도 많은 것이다 세월이 간다/담채 겨울이 느리게 간다 겨울비에 가랑잎은 길을 재촉하지만 그 둔덕 사이로 한껏 희망처럼 물오르고 있는 쑥풀들, 하나의 가슴으로 맞고 보내는 이 겨울이 쓸쓸하다 할머니의 세월을 내가 믿지 못하였듯이 내 아버지의 세월을 조금밖에 믿지 못하였듯이 남아있는 어머니의 세월과 너와 나의 세월이 간다 바람은 변심하여 햇살을 간지르고 대지는 또 한 차례 순환을 준비한다 무반주 첼로를 들으니 코끝에 저수지가 생기는 기.. 2024. 2. 7. 이전 1 ··· 7 8 9 10 11 12 13 ··· 89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