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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두 한 켤레 구두 한 켤레 /담채 아파트 분리수거함 옆 누군가 놓고 간 낡은 구두 한 켤레 항해를 끝낸 폐선처럼 문득 멈춰있다 주인은 가고 남겨진 또 하나의 행로 까마득 흐르는 먼 길을 걸어온 밑창에선 흙냄새가 난다 날마다 밑바닥을 치며 여기까지 오기까지 얼마나 많이 걸었을까 생이 끝나는 순간에야 놓아주었을 길과 길 아궁이 속 온기 같이 한 웅큼 남겨져 있다 이제, 속절없이 밀려난 유배객流刑客처럼 시절을 잃고 주름만 소슬하거니 노고는 길었고 길은 깊었으리라 2024. 3. 12.
노년의 驛舍 노년의 驛舍/담채 불과 수년 전만 해도 나는 老人이 따로 있는 줄 알았다 마트에 가도 식당에 가도 어르신, 아버님으로 불리는 나는 꼼짝없이 노인이 되었다 세월은 굳이 우리 人間만을 편애하지 않는다 긴 감정노동*의 시절을 지나 지금 내가 당도한 이 驛舍 아직도 가슴이 뛴다는 건 실로 고마운 일이다 길은 막힌 적이 없으므로 오늘도 나는 흐른다 * 실제적 감정을 속이고 전시적 감정으로 타인을 상대해야 하는 노동 2024. 3. 11.
동행同行 동행同行/담채 갯벌 밭에 와불처럼 누워있는 작은 목선 위에 제비가 집을 짓는다 좁은 조타실 뒷벽, 횡행한 바람 속에 만삭의 제비가 집을 짓는다 어느 마을에서 집을 짓다 말고 황급히 쫓겨온 걸까 저 막막한 곳에 큰 꽃을 피우려는 몸부림이 처연하다 저 가여운 미물에게는 이곳에 혈연도 지연도 없으리라 출항을 접은 어부가 집으로 돌아와 둥지가 완성되기를 기다리며 헝클어진 그물을 손질하고 있다 몇 번이고 고개를 돌려 바라보는 바다 쪽 봄이 새롭다 어부는 새로 생긴 인연과 나란히 몇 번의 발자국을 파도 위에 찍게 될 것이다 이 봄 지나고 어디 먼 바다로부터 숭어가 돌아오는 철까지 두 개의 외로움이 저마다의 고달픔을 마주보며 만경창파, 함께 노 저어 갈 것이다 2024. 3. 10.
낙타 詩를 읽다가 낙타 詩를 읽다가/담채 낙타는 다음 생엔 사람이 된다 낙타의 모습에는 익숙한 비애가 모래처럼 쌓여 있다 그렇게 뜨거운 모랫바람 속을 걸어가면서 몇 킬로 떨어진 모래 속의 물냄새를 맡는다 오백 킬로의 몸무게와 오백 킬로 가량의 짐을 싣고 모래산을 넘는 낙타의 일상. 이 위대한 무릎을 느낄 때마다 내 삶이 그리 가볍게 보일 수가 없다 끝까지 가서도 마른풀 한 단이 보상의 전부인 삶, 어떻게 내가 고독하다고 삶이 무겁다고 아프다고 엄살을 부릴 수 있으랴 낙타의 일생을 생각하면서 내 삶이 내 노래가 부디 엄살스럽지 않기를... 낙타는 눈물을 저장해 놓고 가볍게 씹는 법을 안다 낙타는 다음 生엔 사람이 된다 2023.03.10 낙타 - 도선사 가는 길 20 / 한승원 살아가는 일 모두가 비지땀을 흘리지 않으면 안.. 2024. 3. 10.
인생 인생/담채 굴곡진 삶의 길 눈물 반, 웃음 반 힘겹게 올랐거늘 내려가는 길 왜 이리 멀미가 나나 2024. 3. 7.
나이를 생각함 나이를 생각함/담채 헛도는 속도로 하루가 간다. 다시 온 3월, 문득 문득 세월을 붙잡고 멈춰보는 날들이 잦아졌다. 이 우울한 도시에 또 한 번의 겨울이 왔다가 가고 사방에 지천인 나무와 풀은 성장을 위하여 오늘도 분주하다. 가고 오는 것들의 비틀거리는 걸음, 한 몸에 공존하는 생명과 비생명의 팽팽한 이 대결, 우리는 무심으로 돌아가는 낙엽 한 잎의 행로조차 다 읽을 수 없으므로 까닭 없는 우울과 다시 관계를 맺는다. 서시처럼 왔다가 세월 밖으로 떠나는 내 나이가 이제는 참 긴 소리를 낸다. 점점 작아지는 내 자리는 우주의 질서이며 나는 아무 것도 가져갈 것 없는 영혼이다. 눈부신 황혼 속으로 석양이 지고 있다 사는 일이 내 의지의 너머에 있으니 나이를 읽는 자세는 누군가의 영혼을 대하듯 조용히 환대해 .. 2024. 3. 7.
老年日記 70 - 근황 老年日記 70 - 근황/담채 몸 곳곳 균열의 협곡에서 부는 바람 시리다 이제 기침소리 조차도 질서있게 낼만큼 둥그러진 나이 팔을 들면 어깨에서 일어서면 무릎에서 뚝, 나뭇가지 부러지는 소리가 난다 쟁기를 끌고 가는 늙은 소의 위대한 도가니를 생각하다가 나는 이미 너무 둥글어졌다고 버릇처럼 되뇌어본다 時間의 뜻은 내게 주어진 만큼만 살다 가라는 것이다 더 나아갈 곳 없는 老年에는 까닭 없는 서러움과 다시 관계를 맺는 것이다 2024. 3.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