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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常22

봄마중 봄 마중/ 담채 다시 오는 봄, 사연 많은 이 땅에서 나목으로 서 있던 나무들은 순을 밀어내기 위해 묵상에 들었다 지나간 겨울은 춥고 길었다 바라보기만 해도 우울과 고뇌가 전속력으로 가라앉는 꽃을 만나기 위해 나는 관찰자가 되어 있다 미세먼지 지나는 3월 아침 오늘은 바람이 계란처럼 순하다 겨울 동안 혹한에 떨다가 꽃 먼저 밀어내던 목련 나무는 花信의 전령사처럼 봄소식을 알릴 것이다 밤이 짧아지고 있다 햇살과 바람과 소생을 염원하는 내 마음이 봄을 데리고 온다 2024.03.14 note 불가사의한 자연의 치유력으로 시간이 흐르면 다시 태어나는 계절의 왕은 단연 봄이다. 보통은 1㎡의 밭에 7만5천개의 풀씨가 잠자고 있다는데 물과 온도가 적합해도 햇빛을 못 보면 싹을 틔우지 않고 땅속에서 10년~20년을.. 2024. 3. 13.
2023.09.15 2023.09.15/ 내리는 둥 마는 둥 여우비 같은 부슬비가 내린다. 도시를 배경으로 바닥에 귀를 대고 흐르는 북한산 자락 소리 없이 적막하다 약 두 시간 반 헬스를 마치고 오니 딸애가 문을 열고 들어섰다. 오랜만에 의대 재학 중인 외손녀와 함께라서 반가움이 더 크다. 쇠고기, 버섯, 무화가, 배, 열무김치를 사왔는데 그 양이 많다. 멀지 않은 길음 뉴타운에 살고 있으니 자주 보는 편인데도 올 때마다 많은 먹거리를 들고 온다. 제게도 부담이 될까싶어 더러는 돈도 주고, 너무 많이 사오지 말라는 당부도 잊지 않는다. 부모를 생각하는 마음에 변함이 없으니 잘 키운 것 같아 믿음이 가는 자식이다. 노년에 이를수록 기력은 쇠잔하고 감회는 깊어진다. 노년은 고요히 깊어지고 가만히 높아질 필요가 있다. 그러기에 .. 2023. 9. 15.
2023.02.24 - 삶의 퇴행* 2023.02.24 - 삶의 퇴행 지난 밤 꿈길에서 비정기적으로 방문하신 아버지를 아주 오랜만에 보었다 바로 그날 어머니를 케어하는 요양보호사의 전화를 받았다 97세 노모의 환청과 환각이 갈수록 심각해진다는 내용이다 정신이 박약한 이웃집 노총각이 날마다 담을 넘어와 소금을 퍼가고 있다는 것과 노모가 안쓰러워 자주 놀러와 주시는 이웃집 아줌마가 단 한 번도 남에게 열어보인 적 없는 문갑을 열고 돈을 훔쳐갔다고 난리가 났다는 얘기다 큰일이다 천 년 전 주법을 기억하는 박물관의 악기처럼 칼금 무늬로 음각되어 있던 노모의 기억들은 다 어디로 떨어져나가 어디에서 욱신거리고 있는지 요양보호사는 치매증상 같다 하고 나는 아직도 일기를 쓸 줄 아는 어머니의 맑은 정신이 잠깐 한 눈을 팔고 있었다고 애기했다 한 평생 당.. 2023. 2. 23.
외손녀의 알바 2023.01.30 - 외손녀의 알바 의대 2년차 외손녀가 첫 겨울방학을 맞았다. 1학년 땐 비대면 수업을 받았으니 그땐 방학도 없었다. 처음으로 등교가 시작되었던 2학년 해부학 실습 기간 중엔 시신 옆에서 쪽잠을 자면서 얼마나 힘들게 공부를 했던지 엄마가 가보니 혼자서 울고 있더라는 것. 그 외손녀가 긴 겨울방학을 맞아 난생 처음으로 알바를 지원했다. 혜화동 대학로에 소재한 찜닭집에서 음식을 나르고 식탁을 정리하고 바닥 청소를 하는 등 오후 5시부터 10시까지 다섯 시간 일을 하고 시급 만원, 하루 오만 원을 번다. 1학년 비대면 수업 기간 중 고교생 1명에게 1주에 4번 하루 3시간 과외를 하면서 월 300만 원 가까이 받은 것에 비하면 용돈도 안 되는 벌이지만 지금 하는 알바도 괜찮다며 웃는다. 쪼.. 2023. 1. 30.
2022.11.22 - 견디며 살아가기* 2022.11.22 - 견디며 살아가기/담채 목숨이 사라지는 것들은 모두 21g의 무게가 줄어든다 한다. 21g이란 영혼의 무게다. 영혼에 무지한 나는 때때로 영혼을 벗어 아무 곳에나 걸어놓고 몸만 살아있었다. 차고 가벼운 한 방울의 몸, 살면서 고통당한다는 것은 육체와 영혼이 나쁜 것을 경험한다는 뜻이다. 육신의 고통의 연속은 인간의 내면을 두렵고 황폐하게 만든다. 나는 대략 30여 년 동안 의사도 모른다는 복부통증을 달고 살아간다. 서울 소재 여러 대학병원과 유명 한의원을 모두 찾아다녔으나 어느 한 곳에서도 치료에 도움을 받지 못했으니 그럴 때마다 세상의 빛들이 일순간 나를 위해 적막해지는 것 같았다. 생각의 끝으로 더듬어지는 통증의 정체는 늘 궁금했고, 두려웁고, 뒷걸음쳐 도망치다가 어둠에 걸려 휘.. 2022. 11. 22.
2022.11.18 - 구구소한도九九消寒圖* 2022.11.18 - 구구소한도九九消寒圖/담채 삶은 저만치 혼자서 외롭고 슬픈 꽃이어서 누군가를 조용히 기다리는 습성이 있다. 옛날 선비들은 구구소한도(九九消寒圖)라는 일력을 만들어 추운 겨울을 지냈다고 한다. 동지를 보낸 후 매화나무 가지를 그려놓고 거기에다 하루에 하나씩 매화꽃을 피우며 봄을 기다린 것이다. 붓끝에서 하루 한 송이씩 붉게 피어나는 꽃, 여든 한 송이 홍매가 종이에 채워지면 창문을 활짝 열고 가득한 설레임으로 봄을 마중했다고 한다.. 겨울을 보내며 봄을 기다리는 유정한 심정에는 삶에 대한 깊은 외경이 자리하고 있었을 터. 새하얀 한지에 꽃을 채우며 다음 계절을 기다렸을 선비들의 마음 깊음이 그지없이 아름다워 보인다. 우리의 삶을 너무 멀리까지 보려 하면 잘 보이지 않는다 구구소한도는 .. 2022. 11. 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