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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위에서

길 위에서 63 - 가을 소묘/담채*

by 담채淡彩 2022. 11. 17.

 

길 위에서 63 -가을 소묘/담채

 

헛도는 속도로 하루가 간다

섬을 떠나온지 10년,

고추가 오이가 되지 않는 것처럼 나는 산으로 간 한 마리 바닷게였다

 

이 우울한 도시에  또 한 번의 가을이 왔다가 간다 

소슬한 바람이 불고 사방에 지천인 꽃도 벌들도 바쁠 일이 없다

사명을 다한 나무는 잎을 보내며 월동을 준비하는 자세가 지극하다

나는 과장되고 까닭없는 이 환절기의 우울을 다시 앓는다     

 

가고 오는 것들의  비틀거리는 걸음 ,

우리는 사랑도 이별도 다 배우지 못했으므로

무심으로 돌아가는 낙엽 한 잎의 행로조차 다 읽을 수 없다            

 

가을비 그치자 바람은 차고 낙엽의 계절이다

한 몸에 공존하는 생명과 비생명의 이 팽팽한 대결,

나무들은 뿌리에게 다음 계절을 위탁하고 성하盛夏를 건너온 잎들을

미련없이 보내고 있다

 

매미들이 사라진 후에도 그 허물은 제 자리를 지킨다 

지상의 여름이 일곱 번 돌아오는 동안에도 한번도 들어 보지 못한

자신의 울음을 속이 빈 허물 속에 가두었다        

 

겨울로 가는 길목,

잎을 보낸 나무들마다 가득 외롭다 

누군가는 목로주점에서 낙엽의 시詩를 쓰고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일흔 번도 넘는 난세일기亂世日記를  쓰고 있다         

 

낙엽을 밟으러 산사山寺에 든 날

다음 계절을 걸어갈 풀잎들이 허리를 굽혔다

삶이란 파도처럼 부서지며 흘러갔으므로

이 가을 또한 길 끝에 당도한 바람으로 나를 떠날 것이다           

 

서시序詩처럼 왔다가 세월 밖으로 떠나는 가을, 

나는 가져갈 것 없는 영혼이다   

      

동토凍土에서 살아남을 나무들은

저마다 지극한 자세로 수행의 길을 떠난다 

 

잎들은 시한부의 사명을 다하고 낙엽의 길을 간다  

풀꽃들은 종種을 위하여 바람에 흔들리며 씨앗을 떨구고 있다 

 

 

가을에 쓴 /담채

 

 

나이가 들면

나무도 풀도 해수병咳嗽病을 앓는다

 

시간의 뜻은

내게 주어진 만큼만 살다 가라는 것이다

 

더 나아갈 곳 없는 노년에는

까닭 없는 서러움과 다시 관계를 맺는 것이다

 

영혼의 결정이

보다 먼저 이루어져야 하는 날

 

사랑하는 사람들은 미리

이별하는 연습을 해두는 것이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