自作詩219 生 生/담채 1 아찔한 벼랑에 노송 한 그루 바위 틈 몇 가닥 힘줄이 저 푸른 목숨을 지키고 있다 한 점 바람에도 수없이 키를 낮추며 저리도 평온히 허공을 얻었을 것이다 2 수족을 잃은 한 사람이 곧은 붓을 물고 조금씩 앞니 깎아 혼을 울려 써 내려간 일필휘지 사막에서 물을 찾듯 하늘로 직립하는 극한은 아궁이 속에서도 싹을 틔운다 3 집 없는 달팽이가 마른 땅을 기어간다 셋방을 구하러 가는 중이다 발 없는 몸이 종일 걸어간 낯선 배추밭 고요한 밤마다 별들이 내려오는 露霜 단칸 가을이 깊어지면 또 어디론가 이사를 가야 할 것이다 어차피 세상에는 온전한 내 것이 없는 것이다 4 한 톨의 씨앗이 건너는 긴 겨울 生을 보듬는 일은 아리고 적막하다 뿌리를 떠난 길 위에서 침묵으로서 타는 갈증으로서 다음 生을 궁리했을.. 2023. 1. 28. 등잔불* 등잔불/담채 달걀 세 개를 석유 한 홉과 바꿔 등잔불 밑에서 공부하던 때가 있었다 고추 벌레 같은 구멍을 신심信心으로 뚫고 가는 길 어머니는 등잔불 밑에서 구멍난 양말을 꿰매고 나는 그 옆에서 알파벳을 외우고 숙제를 하고 소설책을 읽었다 석유 냄새가 새카맣게 코밑을 그을렸다 어둠이 뒤척이는 소리 올올이 당겨 읽었던 것들이 거름이 되어 무지한 나를 문맹에서 건져냈다 2023. 1. 26. 기억보다 착하게* 기억보다 착하게/담채 다람쥐 한 마리가 입안 가득한 도토리 알을 어쩌지 못해 수북한 낙엽 밑이나 우묵한 땅속에 묻어 놓고는 종종 잊어먹는다고 한다 나무 십자가라도 세워놓았으면 좋았으련만 까맣게 잊은 탓에 먼 훗날 거기서 숲이 나온다고 한다 땅속이 길인 땅강아지도 그냥 지나친 그늘 깊은 곳에서 기억보다 착하게 숲을 밀어내는 망각의 관용 다람쥐는 종종 숨겨둔 도토리를 잊고는 몸짓을 바꿔가며 땅을 판다고 한다 2023. 1. 26. 老母의 세족* 老母의 세족/담채 밑바닥만 전전해서 구두창 같은 발바닥 찬물 깊이 데워 가뭄처럼 터진 어머니 맨발을 씻는다 발가락 사이사이 흙냄새와 남은 생을 버티기에도 한없이 약한 노모의 맨발을 씻는다 2천 년 전 예수가 열두 제자의 발을 씻어 주었듯이 오늘은 죄 많은 내가 눈물 다하도록 97세 노모의 맨발을 씻는다 머지 않은 어느 날 저승으로 걸어갈 어머니 맨발이 걸어갈 하늘에 별자리가 휜다 note 비정기적으로 어머니에게 간 날 어머니의 발을 씻어드렸다. 구두창 같은 발에서 사막을 건너는 낙타의 거품 냄새가 났다. 눈물 다하도록 어머니의 발을 씻어드린다. 2023. 1. 25. 들꽃 편지* 들꽃 편지/담채 세상으로 가는 緣 죄 자르고 구겨진 잎 다시 펴는 들꽃 한 무리 쓰러질 듯 바람 견디며 홀로 아름다운 옷을 입었다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곳에서 소리 소문 없이 첫꽃을 피우는 들꽃들 평생 바람 한 번 벗어난 일 없이 번번이 휘청거리며 날씨를 확인했을 것이다 문득, 삶의 높이를 재보는 들꽃들 비바람에 길을 놓치며 존재를 참고 사는 일이 애달팠을 것이다 바람이 긴 바퀴를 돌리며 계절을 몰아가는 동안에도 몸 깊이 씨앗을 앉히며 야생을 흘렀으리라 한 생애의 낱장 낱장 바람 속에 띄우며 하늘과 바람을 사랑한 죄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야생의 고독 2023. 1. 25. 간월암看月庵에서* 간월암看月庵에서 /담채 목이 마르다 천수만 한복판에서도 갈증하는 갈매기처럼 나는 언제나 천 년 귀목나무* 해풍에 젖는 간월암 관음전 그 안에 들어 목조보살좌상 아래 무릎을 꿇었다 극락도 아수라도 저 아래 염주 알 같은 생각들이 침묵을 거머쥐고 억겁을 흐르는 말씀의 바다 말의 뿌리가 피워 올리는 말의 여진이 쓰디쓴 탕약처럼 느리게, 그러나 깊게 스미는 참회의 시간 나는 지금 어디에 서 있으며 지상에서의 나의 그림자는 어떤 모습으로 여운 질 것이며 이생의 닻은 어디에 내려지는가 천 년 하심下心에 들고 나는 문이 어디 있으랴만 이 작은 목조보살좌상 안에 큰 뜻 앉아계신다 당신 계신 곳 서쪽으로 삼만 리를 가도 닿을 수 없는 곳이라는데 나는 허공이 남긴 빛깔과 수수 만리 저 너머의 공간에 대하여 생각해본다 물과.. 2023. 1. 22. 이전 1 ··· 5 6 7 8 9 10 11 ··· 37 다음